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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정과 신뢰의 괴리, 연고 사회가 만든 의리의 착시

한국인은 스스로 정(情)이 많다고 믿지만, 사회과학 데이터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한다. 2022년 세계가치관조사(World Values Survey)에 따르면 사회적 신뢰도(Social Trust) 상위 5개국은 덴마크 74%, 노르웨이 72%, 핀란드 68%, 중국 63%, 스웨덴 62%였다. 상위 4개국이 북유럽인 가운데 중국이 유일한 비서구권 국가로 4위에 올랐고, 한국은 이 수치가 훨씬 아래에 머물러 있다. 2022년 입소스(Ipsos)의 30개국 대인 신뢰 조사에서도 중국은 56%로 최상위권을 차지한 반면, 한국은 30개국 평균인 30% 부근에 걸쳐 있었다. 정이 많다는 자기 인식과 실제 신뢰 수준 사이의 괴리는, 단순히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관계 구조 자체에서 비롯된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한 방송인의 지인이 공개한 메시지에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 10년 넘게 형, 동생 하던 사람들이 의리가 없더라는 한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남자의 의리 부재로 읽었을 것이다. 그런데 해외에서 25년 이상 살아온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남자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가깝다. 실제로 해외 생활 경험이 긴 한국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비슷한 말이 반복된다. 오히려 외국인들이 더 정이 있더라는 것이다. 이웃에게 먼저 안부를 묻고, 약속을 지키고, 관계가 끝나도 예의를 잃지 않는 사람들. 한국인끼리의 정이 더 깊다고 믿고 살았는데, 막상 밖에 나와 보니 그 정이라는 것의 실체가 흐릿해지는 경험을 많은 이들이 공유한다.

위스콘신대학교의 임채윤 교수 연구팀이 2021년 Social Indicators Research에 발표한 논문은 이 현상을 정면으로 다룬다. 한국인의 신뢰 반경(Trust Radius)을 전국 대표 표본으로 측정한 결과, 한국인의 신뢰는 가장 친밀한 내집단(Inner Circle)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가족과 절친한 친구까지는 깊은 신뢰를 보이지만, 그 원이 조금만 넓어지면 신뢰가 급격히 떨어진다. 흥미로운 것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인일수록 신뢰 반경이 더 좁아졌다는 점이다. 유럽 연구에서는 개인주의와 일반적 신뢰가 함께 가는 경향이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정반대였다. 연구팀은 이를 두고 한국의 새로운 개인주의가 도덕적 충동(Moralistic Impulse)을 결여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쉽게 말하면, 전통적 집단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신뢰를 넓히는 방향이 아니라, 그냥 혼자 살겠다는 방향으로 간 것이다.

이 구조를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한국과 중국의 관계망 비교 연구다. 세인트존스대학교의 호락(Sven Horak) 교수와 타우베(Markus Taube) 교수가 2016년 Asia Pacific Journal of Management에 발표한 연구는 중국의 관시(關係, Guanxi)와 한국의 연고(緣故, Yongo)를 체계적으로 비교했다. 표면적으로 둘 다 동아시아의 관계 중심 네트워크이지만, 작동 방식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관시는 목적 기반(Purpose-based)이다. 처음에는 제한적인 신뢰만 제공하되, 상호 거래와 호혜가 반복되면서 신뢰가 역동적으로 성장하거나 줄어든다. 외부인에게도 어느 정도 열려 있고,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을 포괄할 수 있다. 과거에 중국인들과 교류하면서 명백하게 느낀것이다. 결국 이익이 기반이고, 이익으로 묶인 관계들이지만, 장기간에 걸쳐서 형성되면, 국적이든 뭐든 다 넘어서서, 아주 탄탄한 관계를 만들수 있다. 반면 연고는 원인 기반(Cause-based)이다. 같은 학교, 같은 지역, 같은 혈연이라는 태생적 조건이 관계의 근거다. 한번 정해지면 바꿀 수 없고, 외부인에게는 거의 닫혀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연고 네트워크 사이에는 경쟁과 적대감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A대학 출신 네트워크와 B대학 출신 네트워크 사이의 연결은 연고의 행동 규범에 어긋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보면, 10년간 형 동생 하던 사이가 무너지는 것은 의리의 부재가 아니라, 그 관계가 처음부터 연고라는 닫힌 구조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일 수 있다. 연고 안에서의 신뢰는 조건부다. 같은 배를 타고 있을 때는 유연하고 관대하지만, 배에서 내리는 순간 비인격체(Non-person)로 취급받는다. 호락 교수의 연구에서 인용한 김영호(Kim, 2000)의 표현이 정확하다. 연고 원 안에는 유연함과 관용, 상호 이해와 신뢰가 있지만, 원 밖에서는 사람들이 비인격체로 취급되며, 차별과 적대감마저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중국의 관시가 한국의 연고보다 반드시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관시도 부패와 연결되는 어두운 면이 있다. 다만 관시는 외부인을 끌어들이고 새로운 관계를 구축할 여지가 있는 반면, 연고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울타리 안에서만 작동한다. 중국에서 사업을 해본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다. 처음에는 서먹하던 상대가 몇 번의 거래와 식사를 거치면서 진심으로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쌓인 신뢰는 생각보다 단단하다. 2-3년의 관찰 기간을 통과하면, 장기 관계가 형성된다. 서양 국가에서도 비슷한 것을 느낀다. 이웃이 눈을 치워주고, 처음 보는 사람이 문을 잡아주고, 낯선 사람들과 스몰토크 등 그런 작은 것들이 쌓여서 사회 전체의 신뢰를 만든다. 실제로 세계가치관조사에서 사회적 신뢰도 60%를 넘는 나라들, 덴마크 74%, 노르웨이 72%, 핀란드 68%, 중국 63%, 스웨덴 62% 같은 국가들은 하나같이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기본적인 호의를 전제하는 사회다.

한국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보면, 조선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호락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조선의 양반 계급은 학맥, 혈연, 지역에 따라 상호 배타적인 파벌과 씨족으로 나뉘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이 파편화된 네트워크 구조가 수백 년간 이어져 온 것이다. 거기에 한국 남성의 경우 군대라는 특수한 유대 형성 공간이 있다. 군 복무 중 만들어진 관계는 연고만큼이나 강력해서, 이후 비즈니스 관계로까지 발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역시 닫힌 구조다. 군대를 가지 않는 여성은 이 네트워크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된다.

이런 구조의 사회적 비용은 숫자로 드러난다. 한국은 2003년 이후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인구 10만 명당 24.6명으로, OECD 평균 11.0명의 두 배가 넘는다. 2022년 기준 한국인의 34.5%가 1인 가구이며, 고독사는 연 8.8%씩 증가하고 있다. 최근 조사에서 19세에서 59세 한국 성인의 57%가 일상적으로 외로움을 경험한다고 답했다. 정이 많은 사회에서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외로운 것일까.

답은 간단하지 않지만, 한 가지 실마리는 있다. 한국의 정은 관계의 넓이가 아니라 깊이에 관한 것이다. 아주 좁은 원 안의 사람들에게는 놀라울 만큼 헌신적이지만, 그 원이 한번 깨지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관시는 원을 넓히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서구 사회의 신뢰는 아예 원의 개념 없이 일반적 호의를 전제로 작동한다. 한국의 연고는 원을 단단하게 만들되, 원 밖을 황무지로 남겨둔다. 10년 동생이 하루아침에 남이 되는 것은, 어쩌면 처음부터 그 관계가 연고라는 울타리 위에서만 유효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이 많은 것과 신뢰할 수 있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그 차이를 알아채는 데 어떤 사람은 4년이 걸리고, 어떤 사람은 평생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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