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sdom

잊었다고 믿는 순간, 다시 걸려든다

어떤 사람들은 웬만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는다. 거래에서도, 사람 관계에서도 손절이 빠르고, 판단이 서면 미련을 두지 않는다. 그런데 딱 한 사람 앞에서만 그게 안 된다. 예전에 자신을 가장 깊이 상처 준 그 사람이 연락해서 별것 아닌 다정함을 한 조각 흘리면, 방금까지 단단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허물어진다. 다시 연락을 받고, 다시 믿어보고, 그리고 다시 상처를 받는다.

사람들은 이걸 마음이 여려서, 혹은 정이 많아서 그렇다고 말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다른 문제다. 그 순간 벌어지는 일은 감정이 성숙해지는 과정이 아니라, 뇌가 가진 어떤 습성에 걸려드는 일에 가깝다.

기억은 공평하지 않다. 미국 심리학자 W. 리처드 워커와 존 스코론스키를 비롯한 연구자들이 오랫동안 추적한 결과, 부정적인 감정이 실린 기억은 긍정적인 기억보다 훨씬 빠르게 강도가 옅어진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 현상은 정서 소실 편향(Fading Affect Bias)이라고 불리는데, 후속 연구에서는 이 소실이 사건이 일어난 지 열두 시간 안에 이미 시작되고 최소 석 달 넘게 이어진다는 것까지 밝혀졌다.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만약 고통의 기억이 생생한 채로 오래 남는다면, 한 번 출산을 겪은 사람은 다시는 아이를 가지려 하지 않을 것이고, 짐승에게 물린 적 있는 사냥꾼은 다시는 숲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고통을 무디게 만드는 장치가 없었다면 삶은 유지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생존의 관점에서는 유용한 기능이다. 문제는 이 기능이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작동한다는 데 있다.

그 사람이 다시 나타나 안부를 묻고 다정하게 굴 때, 뇌 속에서는 이미 예전의 배신과 모욕이 상당 부분 흐려져 있는 상태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대가 변했다고,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줬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건 상대가 변한 게 아니라 기억이 옅어진 것뿐이다.

여기에 하나가 더 겹친다. 상처를 준 사람들은 대개 처음부터 끝까지 나쁘게 굴지 않는다. 매질을 하다가도 가끔 사탕을 하나 건넨다. 심리학자 스키너가 정리한 강화 이론에서, 보상이 언제 올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을 변동비율 강화계획(Variable Ratio Schedule)이라고 부른다. 카지노의 슬롯머신이 정확히 이 방식을 쓴다. 매번 걸 때마다 무엇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사람은 오히려 더 집요하게 손을 뻗는다. 예측 가능한 보상보다 예측 불가능한 보상이 행동을 훨씬 더 강하게, 훨씬 더 오래 붙들어 둔다는 것은 이미 여러 차례 확인된 사실이다. 누군가에게 계속 끌리는 마음이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처럼 느껴진다면, 실은 슬롯머신 앞에 앉은 사람의 심리와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이 줄다리기에는 몸도 대가를 치른다. 스트레스에 반응해 분비되는 코르티솔은 짧게 스쳐 가는 위협에는 몸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상처를 준 사람과 관계를 끊었다 이었다 반복하면, 코르티솔이 낮아질 틈 없이 계속 높은 채로 유지된다. 신경내분비학자 로버트 새폴스키가 스트레스 호르몬을 오래 연구하며 정리한 내용에 따르면, 이렇게 만성적으로 유지되는 코르티솔은 면역 기능을 떨어뜨리고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에도 부담을 준다. 다시 연락 한 번 받은 것, 밥 한 끼 같이한 것이 별일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몸은 그 사이 조용히 값을 치르고 있다.

많은 사람이 완전히 끊어내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마음에 남은 물음표 때문이다. 사과를 받아야겠다, 설명을 들어야겠다,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받아야겠다는 생각이다. 1920년대 소련의 심리학자 블루마 자이가르닉은 사람들이 완료된 일보다 마무리되지 않은 일을 훨씬 더 선명하게 기억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자이가르닉 효과라고 불리는 이 현상은, 마무리되지 않은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매듭짓지 못한 일은 계속 마음 한쪽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런데 그 물음표를 상대가 채워주기를 기다리는 동안, 정작 마음을 움직이는 리모컨은 상대의 손에 계속 쥐어져 있게 된다. 사과를 하든 안 하든, 설명을 하든 안 하든 그건 상대의 선택이고, 그 선택을 기다리는 한 나의 하루는 여전히 그 사람에게 좌우된다. 미워하는 마음으로라도 계속 주고받는 것은, 결국 그 사람에게 에너지를 계속 흘려보내는 일이다.

1986년 미국 시사주간지 US News & World Report와의 인터뷰에서 작가 엘리 위젤은 이런 말을 남겼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미움도 여전히 그 사람을 향한 감정이고, 그 사람이 내 삶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증거다. 진짜로 관계를 끝낸다는 건 화를 내는 것도, 복수를 벼르는 것도 아니라, 그 사람이 더 이상 내 이야기에 등장할 자격을 잃었다고 처리해버리는 것에 가깝다.

장자 대종사편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相濡以沫 不如相忘於江湖. 물이 말라버린 웅덩이에 남겨진 물고기 두 마리가 서로에게 침을 나눠주며 겨우 목숨을 이어가는 것보다, 애초에 강과 호수에서 각자 헤엄치며 서로를 잊고 지내는 편이 낫다는 뜻이다. 잊는다는 것이 늘 매정하거나 배은망덕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원래 있어야 할 넓은 물로 돌아가는 일에 더 가까울 때가 있다.

그렇다고 이 모든 게 의지의 문제만은 아니다. 상처를 기록해 두고, 다시 마음이 약해질 때 그 기록을 꺼내 읽는 사람들이 있다. 감정이 아니라 있었던 일 자체를 적어 두는 방식이다. 연락처를 지우고, 접촉의 절차를 일부러 번거롭게 만들어 두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은 결국 마찰이 큰 쪽으로는 잘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비워두는 대신 다른 곳에 시간과 관심을 채우는 사람들도 있다. 관심이 향하는 곳에 결국 삶의 무게중심도 옮겨간다.

그 사람과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날, 몸에 남는 게 기운인지 아니면 허탈함인지. 그건 매번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몸은 이미 답을 알고 있을 때가 많다.

댓글에 인색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