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속품으로 설계된 인간, 200년 교육 시스템의 숨겨진 역사
현대 학교 교육은 인간을 키우기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이 아니다. 200년 전 전쟁에서 진 나라가 다시는 지지 않기 위해 설계한 복종 훈련 체계가, 대서양을 건너 미국 산업 자본가들의 손에서 공장 노동자 양성 프로그램으로 진화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인공지능과 휴머노이드 로봇이 그 시스템이 찍어낸 인간형을 정확히 대체하기 시작했다.
뉴욕시에서 30년 가까이 교사로 일한 존 테일러 갯토(John Taylor Gatto)라는 사람이 있었다. 1989년부터 1991년까지 3년 연속 뉴욕시 올해의 교사상을 받았고, 1991년에는 뉴욕주 올해의 교사로 선정됐다. 그런데 바로 그 해, 그는 월스트리트 저널에 기고문을 실었다. 제목이 걸작이다. “그만두겠습니다, 아마도(I Quit, I Think).” 미국 최고의 교사가, 미국 교육을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갯토는 교단에서 이상한 패턴을 목격했다. 시스템 안에서 가장 모범적인 학생들, 조용하고 순종적이며 성적이 좋은 아이들이 졸업 후 눈에 띄지 않는 삶을 사는 경우가 많았다. 반대로 권위에 도전하고, 불편한 질문을 던지고, 규칙을 거부하던 소위 “문제아”들이 현실 세계에서 앞서나가는 경우가 잦았다. 처음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미국 공교육의 정책 문서, 재단 메모, 입법 기록을 파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2000년에 출간된 412쪽짜리 책, “미국 교육의 지하 역사(The Underground History of American Education)”다.
이 책이 추적한 역사의 출발점은 미국이 아니다. 프로이센이다.
1806년,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궤멸시켰다. 유럽 최강의 군사력을 자부하던 프로이센이 무너진 원인을 분석했더니, 흥미로운 결론이 나왔다. 병사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개별적으로 판단해서 움직였다는 것이다. 개인의 판단력이 패배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프로이센의 철학자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는 이렇게 주장했다. 교육의 목적은 자유의지를 파괴하는 것이어야 한다. 학생들이 학교를 졸업한 뒤 평생 동안 교사가 원하는 것 이외에는 스스로 생각하거나 행동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고.
이 철학 위에 프로이센 교육 체계가 세워졌다. 나이별 분리, 종소리에 따른 시간 관리, 표준화된 교육과정, 등급 체계. 목적은 하나였다. 국가에 충성하고 권위에 복종하는, 균일한 시민과 군인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것. 계층 구조도 설계에 포함돼 있었다. 8년간의 기본 교육 이후 소수의 엘리트만 상위 교육을 받아 사회를 관리하고 통치하는 역할을 맡았다. 나머지 대다수는 읽기, 쓰기, 기초 산수만 배우고 공장이나 군대로 향했다.
이 시스템이 대서양을 건넌 과정도 기록에 남아 있다. 1843년, 매사추세츠 교육위원회 초대 사무총장 호레이스 만(Horace Mann)이 유럽 시찰을 떠났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지만,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곳이 프로이센이었다. 중앙집중식 교육과정, 표준화된 교사 양성, 국가 정체성을 주입하는 체계. 만은 이 모델에 매료되어 미국으로 돌아왔고, 매사추세츠에서 강력히 로비를 벌였다. 1852년, 매사추세츠는 미국 최초의 의무교육법을 통과시켰다. 8세부터 14세까지의 아이들을 학교에 가두는 법이었다. 1918년이 되면 미국의 모든 주가 의무 출석법을 채택한다. 의무교육제도의 시작이 인간에 대한 자애로움, 혹은 인간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란 이야기다.
여기까지는 국가 차원의 이야기다. 그런데 20세기 초, 새로운 주인이 등장한다. 산업 자본이다.
존 D. 록펠러(John D. Rockefeller)는 1902년 일반교육위원회(General Education Board)를 설립했다. 록펠러 가문은 이 위원회에 총 1억 8천만 달러 이상을 쏟아부었다. 위원회의 실질적 운영자였던 프레드릭 T. 게이츠(Frederick T. Gates) 목사는 1913년 “내일의 시골 학교(The Country School of Tomorrow)”라는 제목의 공식 문건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의 꿈속에서 우리에게는 무한한 자원이 있고, 사람들은 완벽한 순종으로 우리의 빚는 손에 자신을 맡긴다. 우리는 이 사람들이나 그 자녀들을 철학자나 학자나 과학자로 만들려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 가운데서 저술가, 웅변가, 시인, 문인을 길러내지 않을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 화가, 음악가의 씨앗을 찾지도 않을 것이다.”
미국 의회 도서관에 원본이 보관되어 있는 이 문서는, 공교육이 어떤 의도로 설계됐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솔직한 고백이다.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이들 산업가가 원한 것은 명확했다. 시간을 지키고, 지시를 따르고, 반복 작업을 견디고, 위계를 받아들이는 인간. 공장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규격화된 부품이었다.
갯토가 파헤친 핵심은 이것이다. 공교육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설계된 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 시스템이 망가진 게 아니라, 원래부터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갯토는 공교육이 학생에게 주입하는 여섯 가지 숨겨진 수업을 정리했다. 혼란(서로 맥락 없는 과목을 쪼개서 가르침으로써 통합적 사고를 차단), 위치 고정(너는 이 등급에 속한다는 정체성 주입), 무관심(종소리가 울리면 무엇이든 즉시 중단하는 훈련), 감정적 의존(교사의 평가에 자존감을 걸게 만드는 구조), 지적 의존(전문가가 시키는 대로만 하라는 메시지), 그리고 잠정적 자아(당신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늘 감시받고 있다는 느낌). 이 여섯 가지는 교과서에 적혀 있지 않지만, 12년간 매일 반복되면서 인간의 작동 방식 자체를 바꿔놓는다.
돌이켜보면, 이 시스템이 등장하기 전의 미국은 전혀 다른 사회였다. 갯토의 연구에 따르면, 식민지 시대와 건국 초기 미국의 문해율은 놀라울 정도로 높았다. 토마스 페인(Thomas Paine)의 “상식(Common Sense)”은 인구 300만 명(그 중 20%가 노예, 50%가 연한계약 하인)인 나라에서 60만 부가 팔렸다. 읽기, 쓰기, 산술을 가르치는 데 실제로 필요한 시간은 대략 100시간 정도라고 갯토는 추산했다. 배우려는 의지만 있다면.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정규 학교 교육을 2년밖에 받지 못했다. 열세 살에 인쇄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은 정규 학교를 석 달 다녔다. 교사가 그를 “멍청하다(addled)”고 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이 나라를 세우고 발명을 하고 사업을 일으켰다.
의무교육이 확산되기 전, 13세면 도제로 들어가 실제 기술을 배우고, 사업을 시작하고, 사회의 일원으로 살았다. 강제 학교 교육은 이 과정을 인위적으로 차단했다. 18세, 22세, 심지어 그 이후까지 사회 진입을 지연시키면서, 젊은 인간을 성인 세계로부터 격리했다. 갯토의 표현을 빌리면, 미국의 독립적 생계 전통, 즉 양키 기업가 정신을 소멸시키는 것이 첫 번째 표적이었다. 대규모 생산 시설에 필요한 막대한 자본 투자를 정당화하려면, 사람들이 스스로를 프랭클린이나 에디슨처럼 자기결정적 자유인으로 보는 대신, 경영진의 호의를 얻기 위해 경쟁하는 고용인으로 인식하게 만들어야 했다.
도덕경(道德經) 19장에 이런 구절이 있다. 絕聖棄智 民利百倍(절성기지 민리백배). 성스러움을 끊고 지혜를 버리면 백성이 백 배 이롭다. 絕仁棄義 民復孝慈(절인기의 민복효자). 인을 끊고 의를 버리면 백성이 효도와 자애로 돌아간다. 絕巧棄利 盜賊無有(절교기리 도적무유). 교묘함을 끊고 이익을 버리면 도적이 없어진다.
2,500년 전 노자가 말한 것은 교육 시스템에 대한 비판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통찰의 구조는 정확히 같은 곳을 가리킨다. 위에서 부과된 인위적 틀, 성스러움이라는 이름의 권위, 지혜라는 이름의 통제, 인의라는 이름의 규율이 사라질 때, 사람은 자기 본성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프로이센이 만들고 록펠러가 확장한 교육 시스템은, 노자가 경계한 것의 산업화된 버전이다. 교묘함(巧)으로 인간을 빚고, 이익(利)으로 인간을 유인하되, 그 과정에서 인간이 원래 가지고 있던 자연스러운 배움의 힘은 체계적으로 제거됐다.
문제는, 이 시스템이 만들어낸 인간형이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2025년 11월 발표된 한 연구에 따르면, ChatGPT 출시 이후 특정 초급 직종에서 구인 공고가 16% 감소했다. 2026년 MIT와 보스턴 대학 공동 보고서는 2026년까지 AI가 200만 개의 제조업 일자리를 대체할 것으로 전망했다. 본 경영대학(BWA)과 외교위원회(DC)의 공동 조사는 2040년까지 독일 내 기존 일자리의 절반이 인공지능과 로봇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골드만삭스 보고서에 따르면, 휴머노이드 로봇의 제조 비용이 전년 대비 40% 하락했고, 2026년에만 5만에서 10만 대의 출하가 예상된다.
시간을 지키고, 지시를 따르고, 반복 작업을 견디고, 위계를 받아들이는 인간. 프로이센 교육 시스템이 200년에 걸쳐 완성한 바로 그 인간형이, 인공지능이 가장 먼저, 가장 쉽게 대체하는 유형이다. 프레드릭 게이츠가 “철학자나 과학자로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한 그 교육의 산물은, 이제 기계보다 비싸고 느리고 실수가 많은 존재가 됐다.
아이러니가 있다. 인공지능의 첫 번째 충격은 블루칼라가 아니라 화이트칼라에 왔다. 데이터 입력, 고객 서비스, 코딩, 디자인, 서류 검토. 교육 시스템이 길러낸 “순종적이고 표준화된 지식 노동자”의 업무가 가장 먼저 자동화됐다. 존스홉킨스 대학의 라비 아가르왈(Ravi Agarwal)은 이 구조적 문제를 지적한다. 초급 직원이 AI로 대체되면, 그 초급 단계를 거쳐 경험을 쌓아야 할 다음 세대의 경력 파이프라인 자체가 사라진다. 교육 시스템은 피라미드의 아래층을 채울 인간을 만들어왔는데, 그 아래층이 통째로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물리 세계로도 전선이 확장되고 있다. 중국 창고에서 줄지어 걷는 휴머노이드 로봇 영상이 인터넷을 돌았다. 아마존을 포함한 다수의 기업이 AI 효율화를 이유로 대규모 인력 감축을 단행했다. 세계경제포럼(WEF)의 2025년 보고서는 2030년까지 1억 7천만 개의 새 일자리가 생기지만, 9,200만 개가 사라진다고 전망했다. 숫자만 보면 순증이지만, 사라지는 일자리와 생기는 일자리를 채울 수 있는 사람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프로이센 모델이 만든 인간은 지시를 기다린다. 정해진 틀 안에서 움직인다. 누군가 문제를 정의해주기를 바란다. 그런데 AI가 대체할 수 없는 영역은 정반대다.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고, 맥락을 읽고, 불확실성 속에서 판단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실패에서 배우는 능력. 기계가 못 하는 일은, 프로이센 교육 시스템이 인간에게서 빼앗은 일과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갯토가 교단에서 몰래 실험한 것들이 있다. 만화가를 꿈꾸는 열세 살 소년을 일주일 동안 공공 도서관에 보내 그래픽 스토리텔링을 독학하게 했다. 소심한 열세 살 소녀를 주의회 의사당에 보내 지역 의원 앞에서 발언하게 했다. 그 소녀는 지금 재판 변호사다. 학교가 아이들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자기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를 먼저 이해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걸 알면, 거기까지 가는 연습은 어렵지 않게 설계할 수 있다고 갯토는 말했다. 그러나 학교는 대부분의 경우 그 반대로 작동했다. 가고 싶은 곳을 묻지 않고, 가야 할 곳을 지정했다.
UC 샌디에이고의 아구스티나 파글라얀(Agustina Paglayan)이 2020년 미국 정치학 리뷰(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에 발표한 연구는, 200년간 여러 나라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공립 초등교육이 일관되게 사회 불안이 발생한 뒤에 확대되었음을 보여준다. 시민을 고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갯토 개인의 주장이 아니다. 동료 심사를 거친 정치학 연구다.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학교 교육 자체가 무용하다는 주장이 아니다. 의학, 공학, 법학 같은 전문 영역에서 체계적 훈련은 여전히 필수적이다. 문제는 시스템의 기본 설계 철학이다. 200년 전 군사적 복종과 산업적 효율을 위해 설계된 틀이, 인공지능이 인간의 반복 업무를 대체하는 시대에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기계와 다른 점을 되찾아야 할 시점이다. 그런데 그 다른 점이라는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의 반대편에 있다. 상식이라고 불리는 것들, 22세까지 교실에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 좋은 성적이 좋은 삶을 보장한다는 것, 전문가의 말을 따르면 안전하다는 것, 이런 것들이 상식이 아니라 200년짜리 설계의 산물이라면 어떨까.
13세에 인쇄소에서 일을 시작한 프랭클린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가 됐고, 정규 교육 석 달짜리 에디슨은 1,093개의 특허를 남겼다. 이것은 그들이 천재여서가 아니다. 그들이 살던 시대에는 인간의 본성을 체계적으로 억누르는 시스템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교육과정이 아닐 수 있다. 어쩌면 필요한 것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에게서 빼앗아 간 것들을 되돌려주는 일이다. 스스로 질문하는 능력, 실패할 자유, 정해지지 않은 길을 걸을 용기, 그리고 누군가의 종소리 없이도 자기 시간을 쓸 수 있는 자격.
프로이센의 설계자들은 개인의 판단력을 패배의 원인으로 봤다. 록펠러의 참모는 사람들을 철학자로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200년이 지난 지금, 그 시스템이 찍어낸 인간을 기계가 대체하고 있다. 그렇다면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 아마도, 그 시스템이 처음부터 만들지 않으려 했던 바로 그 인간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