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적 사고란 무엇인가, 짜깁기와 진짜 생각을 가르는 한 가지 시험
진정한 독립적 사고(独立思考)는 남과 다른 결론을 내놓는 능력이 아니다. 어떤 결론에 이르렀든, 그것이 스스로 세운 검증의 사슬을 통과해 도달한 것이냐의 문제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내 생각”이라 부르는 것의 대부분은, 출처를 잃어버린 단편들이 슬그머니 엉겨 붙은 짜깁기에 가깝다.
사람은 어떤 견해를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금세 잊는다. 기억에서 출처만 떨어져 나가고 내용만 남으면, 그 견해는 어느새 원래 내 것처럼 느껴진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출처 기억의 오류(source amnesia)라 부른다. 들은 것이 내 것이 되는 과정은 도둑질이라기보다 망각에 가깝다. 그래서 본인은 베낀 적이 없다고 믿는다. 정말로 기억나지 않으니까.

여기까지는 누구나 어렴풋이 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우리는 안다는 느낌과 실제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을 구별하지 못한다. 2002년 예일대학교의 레오니드 로젠블릿과 프랭크 케일은 이 간극을 측정했다(Rozenblit and Keil, Cognitive Science). 사람들에게 변기, 지퍼, 자전거 같은 일상적 사물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얼마나 잘 아느냐고 물으면 대개 자신 있게 높은 점수를 매긴다. 그러나 그 작동 원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글로 설명해 보라고 시키는 순간, 점수는 무너진다. 연구진은 이것을 설명 깊이의 착각(illusion of explanatory depth)이라 이름 붙였다. 자전거를 기억만으로 그려 보라고 하면 페달과 체인이 엉뚱한 곳에 붙는다. 본 적은 수만 번이지만, 설명할 수 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이 착각이 흥미로운 지점은, 무엇으로 깨지고 무엇으로는 깨지지 않느냐에 있다. 2013년 필립 펀바크 연구진은 사람들에게 복잡한 정책을 두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유를 대보라고 했을 때와, 그 정책이 실제로 어떤 과정을 거쳐 결과를 만드는지 작동 원리를 설명해 보라고 했을 때를 비교했다(Fernbach et al., Psychological Science). 이유를 대게 하면 신념은 오히려 단단해졌다. 이유란 가치와 풍문과 일반론으로 얼마든지 채울 수 있어서, 정작 모른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는다. 반대로 작동 원리를 설명하게 하면 자신이 얼마나 모르는지가 드러났고, 의견의 강도도 누그러졌다. 이 실험은 이후 재현 결과가 엇갈렸으니 정치적 태도까지 정말 누그러지는가는 단정하지 말자. 다만 이유 대기와 원리 설명하기가 전혀 다른 시험이라는 사실만큼은 견고하다. 짜깁기와 사고를 가르는 시험이 바로 이것이다. 이유는 누구나 댄다. 원리는 아무나 풀지 못한다.
그리고 지금은 이 착각을 대량으로 생산하기에 더없이 좋은 시대다. 유튜브와 틱톡의 짧은 강의는 매끄러운 편집과 애니메이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채워져 있다. 연구자들은 이런 영상이 일으키는 작용을 유혹 효과(seductive effect)라 부른다. 같은 내용을 글로 읽은 사람과 영상으로 본 사람의 실제 이해도는 비슷한데, 이해했다는 느낌만큼은 영상 쪽이 훨씬 부풀어 있더라는 결과가 반복해서 나온다. 십오 분짜리 영상을 보고 나면 그 주제를 정복한 기분이 든다. 그 기분은 며칠 지나면 내 관점으로 굳는다. 조금만 깊게 물어보면 무너질 관점이지만, 묻는 사람이 없으면 평생 무너지지 않는다.
여기서 또 하나의 흔한 오해를 짚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깊이 생각한다는 말을, 머릿속에서 잡다한 생각을 오래 굴리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현실에서 멀어지는 공상과 반추(rumination)는 깊이가 아니다. 그것은 같은 회로를 헛도는 일에 가깝다. 진짜 사유에는 마찰이 있다. 한 주장을 다른 주장에 부딪쳐 보고, 반례를 일부러 찾아 세우고, 결론이 전제로부터 정말 도출되는지 한 칸씩 밟아 내려가는 과정에는 힘이 든다. 막힘없이 술술 흘러가는 생각은 대개 사유가 아니라 회상이다.
물론 연료 없이 사고는 불가능하다. 읽지 않은 사람에게서 독창적 통찰이 솟아나는 일은 없다. 다만 연료가 곧 사고는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도서관을 통째로 외운다고 사고가 생기지는 않는다. 읽은 것을 그대로 꺼내 쓰는 인출(retrieval)과, 읽은 것들 사이에서 새로운 결론을 끌어내는 도출(derivation)은 다른 일이다. 입력이 아무리 많아도, 그 입력들을 서로 충돌시키는 마찰이 없으면 사고는 일어나지 않는다.
삼십 년 가까이 시장을 지켜보며 배운 것이 있다면, 가장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일수록 대개 합의(consensus)를 암송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22년 가을, 블룸버그 이코노믹스의 모델은 향후 1년 안에 미국이 경기침체에 빠질 확률을 100퍼센트로 제시했다. 설문에 응한 이코노미스트의 85퍼센트가 2023년 침체를 점쳤다. 침체는 오지 않았다. 수백 명의 전문가가 같은 지표를 같은 방식으로 읽고 같은 결론을 같은 확신으로 외쳤다. 그것은 수백 개의 독립적 분석이 아니라, 하나의 합의가 수백 개의 입을 빌린 것이었다. 정작 스스로 사슬을 세우는 사람은 그런 시기에 오히려 머뭇거린다.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직 도출하는 중이라서 그렇다.
노자는 이 풍경을 이천오백 년 전에 이미 그려 두었다. 도덕경 20장은 絕學無憂(절학무우),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다는 말로 시작한다. 그리고 노자는 세상 사람과 자신을 나란히 세운다. 俗人昭昭 我獨昏昏(속인소소 아독혼혼), 세상 사람은 다들 환하게 밝은데 나 홀로 어둑하다. 俗人察察 我獨悶悶(속인찰찰 아독민민), 세상 사람은 다들 또렷하게 살피는데 나 홀로 흐리멍덩하다. 여기서 환하고 또렷한 쪽은 무엇을 물어도 즉답할 준비가 된 사람들, 곧 짜깁기가 매끄럽게 돌아가는 사람들이다. 노자가 자신을 어둑하고 흐리멍덩하다고 말한 것은 못나서가 아니라, 남이 떠먹여 준 또렷함을 잠시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장을 닫으며 노자는 말한다. 我獨異於人 而貴食母(아독이어인 이귀식모), 나 홀로 남과 달라서 어미에게 젖 얻어먹기를 귀히 여긴다. 떠도는 견해가 아니라 근원으로 되돌아가 거기서 길어 올리겠다는 뜻이다.
다음에 내 생각은 말이지, 하고 입을 떼려 할 때 한 가지만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된다. 지금부터 그 생각이 어떤 과정을 거쳐 결과에 이르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막힘없이 풀어낼 수 있는가. 이유 말고 원리를. 그 시험은 십 초면 끝나는데, 우리는 그 시험을 평생 거의 치르지 않는다.
요약 독립적 사고는 남과 다른 결론을 내는 능력이 아니라, 어떤 결론이든 스스로 검증의 사슬을 거쳐 도달했는가의 문제다. 우리가 내 생각이라 부르는 것의 대부분은 출처를 잃은 짜깁기이며, 설명 깊이의 착각과 영상 매체의 유혹 효과가 이를 부풀린다. 이유는 누구나 대지만 작동 원리는 아무나 풀지 못한다는 데서 진짜와 가짜가 갈린다. 깊은 사고는 잡념을 오래 굴리는 일이 아니라 마찰을 견디는 일이며, 독서라는 연료가 도출이라는 과정을 거칠 때 비로소 사고가 된다.
내가 명리학 리포트를 개발하는 것도 비슷하다.
고대 이론들을 현대 상황에 맞게 수정하고
수없이 많은 데이터를 넣어서, 양성과 음성 데이터를 비교 분석하면서, 임계값을 찾고
적용 포인트와 적용 불가 포인트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도출되는 통찰들이 검증이 되면, 이론으로 남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