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힘 – 마음의 소모를 끊는 도가의 지혜
현대인이 느끼는 피로의 대부분은 몸에서 오지 않는다. 마음이 스스로를 갈아내는 소모에서 온다. 그리고 그 소모의 뿌리는 일어난 일 자체가 아니라, 떠오른 생각과 남이 던진 말을 진짜로 받아들이는 데 있다. 마음을 닦는 일의 마지막 단계는 욕심을 모두 끊거나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을지 가려내는 일에 가깝다.

누군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를 며칠씩 곱씹는다. 작은 실수 하나에 자신을 통째로 부정하며 밤을 새운다. 끝난 관계 하나를 오래 붙들고 놓지 못한다. 일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무겁게 쥐는 것이다. 같은 일을 두고도 어떤 사람은 하루면 흘려보내고 어떤 사람은 한 달을 앓는데, 차이는 사건이 아니라 그것을 쥐는 손아귀에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 되새김을 반추(rumination)라고 부른다. 수전 놀런-혹세마(Susan Nolen-Hoeksema)가 정리한 응답 양식 이론(Response Styles Theory)에 따르면, 부정적인 기분이 들 때 그 원인과 결과를 반복해서 곱씹는 사람은 우울이 더 오래가고 더 깊어진다. 흥미로운 대목은 따로 있다. 반추는 문제 해결력을 떨어뜨리고 주변의 지지마저 갉아먹는다. 같은 생각을 스무 번 굴려도 새로운 정보는 한 톨도 늘지 않는데, 사람은 그 헛바퀴를 두고 자신이 무언가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검토가 아니라 마모다.
생각을 진짜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부터 보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잡념은 하늘을 지나는 구름이나 숲을 스치는 바람과 다르지 않다. 왔다가 가는 것이 그 본성이다. 떠오른 생각은 사실도 아니고 너의 본심도 아니다. 그것을 진짜로 못 박는 순간, 생각이 감정을 끌고 다니고 감정이 하루를 끌고 다닌다. 반대로 그저 지나가게 두면, 그것은 너를 건드릴 손잡이를 잃는다. 한낮의 불안과 한밤의 자책, 까닭 없는 의심은 대개 스스로 지어낸 족쇄다.
세상일을 진짜로 못 박지 않는다는 것은 더 실전적이다. 삶은 본래 반은 달고 반은 쓰며, 한결같이 순탄한 인생도 영원히 막힌 처지도 없다. 일이 됐다고 우쭐할 일이 아니다. 때를 잘 만나 흐름을 탄 것뿐이다. 일이 안 됐다고 자신을 깎을 일도 아니다. 한 줄의 경험이 쌓인 것뿐이다. 나는 삼십 년 넘게 시장을 들여다보면서, 무너지는 사람은 틀린 사람이 아니라 손실을 놓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거듭 보았다. 진입가에 자기를 묶고, 본전을 찾겠다며 같은 자리에 다시 들어가고, 한 번의 손실을 자기 자신에 대한 판결로 받아들인다. 포지션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순간 판단은 굳어 버린다. 반대로 모든 자리를 하나의 가설로만 두는 사람은 틀렸다 싶으면 가볍게 끊고 다음으로 넘어간다. 손절이 빠른 사람의 진짜 강점은 손이 빠른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진짜로 여기지 않는 마음이다.
노자는 이 자리를 일찍이 짚어 두었다. 도덕경 13장에 寵辱若驚, 貴大患若身이라 했다. 총애를 받아도 놀란 듯하고 모욕을 받아도 놀란 듯하며, 큰 근심을 제 몸처럼 귀하게 여긴다는 말이다. 왜 칭찬에도 놀라고 비난에도 놀라는가. 노자의 대답은 서늘하다. 吾所以有大患者, 爲吾有身.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까닭은 나에게 몸이, 곧 떠받들어야 할 자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평가에 흔들리는 것은 평가가 날카로워서가 아니라, 평가를 받는 그 자리를 내가 너무 무겁게 모셔 두었기 때문이다. 그 자리를 가볍게 비워 두면, 총애가 와도 모욕이 와도 그저 지나간다. 받을 사람이 가벼우면 던지는 돌이 박힐 곳이 없다.
그래서 마음을 닦는 일의 끝자리는 깊은 산속이나 오래된 절집에 있지 않다. 저잣거리의 번잡함 한가운데, 매일의 득실과 매일의 말들 속에 있다. 생각에도 못 박지 않고, 득실에도 못 박지 않고, 비난에도 못 박지 않는 평상심(平常心) 하나를 지키는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가 남는다. 떠오르는 생각을 진짜로 여기지 않는 그 자리, 그것을 진짜로 여기지 않는 자는 또 무엇인가.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것과 아무것에도 마음이 가닿지 않는 무심함 사이의 경계는, 과연 어디쯤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