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람은 자기를 잘못 아는가 – 뇌가 자기를 구성하는 방식
몇일전에 사주로 책추천하는 시스템을 만들면서, 독서에 관해서 ChatGPT와 토론을 했었다. 내 독서 패턴의 변화 (다독에서 몇개만 반복해서 읽고, 가장 근본을 읽는 시스템으로 변함)가 사실 대부분의 독서 내공이 쌓이면 이뤄지는 변화라는 것. 그 중의 핵심적인 부분이 결국 모든 책은 궁극적으론 자기 인식을 제대로 하도록 도움을 주는 책이 좋은 책이란 이야기 . 그래서 자기 인식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사람이 자기를 잘못 아는 이유는 정직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뇌가 자기를 인식하는 기관이 아니라 자기를 구성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를 들여다보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 하는 일은 자기에 대한 그럴듯한 모형을 만들어 그것을 자기라고 믿는 것에 가깝다. 그 모형은 정확하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안정적이고 일관되며 가능하면 자기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진다. 자기인식의 오류는 고장이 아니라 설계의 결과다. 그래서 타인이 황당한 자기 인식을 가진 사례를 많이 보게 된다. 나는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인식하면서, 비도덕적 행위를 하거나, 나는 논리적인 존재야 그러면서, 로직이란 없는 사람도 많이 보이지 않더냐?
동양이든 서양이든 오래 살아남은 고전들은 묘하게 한 곳을 가리킨다. 너 자신을 알라. 그리스 델포이 아폴론 신전 입구에 새겨졌다는 이 문구는 서양 지혜의 출발점으로 인용된다. 동양에서도 자기를 아는 것을 모든 공부의 첫 단추로 삼았고, 그것이 최종 목적지이다. 그런데 이 명령은 이상하다. 자기를 아는 것이 그렇게 당연한 일이라면 왜 굳이 신전 입구에 새겨두어야 했을까. 당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장 못하는 일 중 하나가 자기를 아는 일이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은 그 사실을 경험으로 알았고, 현대 뇌과학은 그것이 왜 그런지를 구조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열자(列子) 설부편(說符篇)에 도끼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도끼를 잃어버렸다. 그는 이웃집 아들을 의심했다. 그 눈으로 보니 아이의 걸음걸이가 영락없이 도끼를 훔친 자의 걸음이었고, 얼굴빛도 훔친 자의 얼굴빛이었고, 말투도 훔친 자의 말투였다. 동작과 태도 어느 하나 도끼를 훔친 자 같지 않은 것이 없었다. 動作態度, 無爲而不竊鈇也. 그러다 얼마 뒤 골짜기를 파다가 잃어버린 도끼를 찾았다. 알고 보니 자기가 거기 두고 잊은 것이었다. 다음 날 이웃집 아들을 다시 보았는데, 그 동작과 태도가 도끼를 훔친 자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아이는 그대로였다. 변한 것은 보는 사람의 마음뿐이었다.
이 이야기가 이천 년 넘게 살아남은 이유는, 그것이 인간 지각의 한 가지 진실을 정확히 찔렀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 위에서 판단하지 않는다. 먼저 판단의 틀이 있고, 세상은 그 틀에 맞춰 들어온다. 도끼를 잃었다는 전제가 깔리는 순간, 같은 아이의 같은 걸음걸이가 도둑의 걸음으로 보인다. 지각이 판단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판단이 지각을 빚는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래서 오해를 하고, 환상을 만든다. 그것을 환상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팩트라고 착각하지만 말이지.
현대 뇌과학은 이것을 예측 처리(predictive processing)라 부른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뇌가 카메라처럼 작동한다고 생각했다. 바깥 정보가 눈과 귀로 들어오면 뇌가 그것을 받아 처리한다는 그림이다. 그러나 지난 이십여 년의 연구는 그 그림을 거의 뒤집었다. 뇌는 받기 전에 먼저 예측한다. 다음 순간 무엇이 보일지, 무엇이 들릴지, 무엇이 만져질지 끊임없이 미리 짐작하고, 실제로 들어온 감각은 그 예측이 맞았는지를 점검하는 신호로 쓰인다. 예측과 실제가 어긋날 때 발생하는 차이를 예측 오차(prediction error)라 하고, 뇌의 핵심 작업은 이 오차를 줄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보는 세상은 바깥에서 들어온 그림이 아니라 뇌가 만든 최선의 추측이고, 감각은 그 추측을 다듬는 재료다. 어떤 신경과학자는 이 상태를 통제된 환각(controlled hallucination)이라 표현했다. 환각과 지각의 차이는 종류가 아니라 통제의 정도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 예측 기계가 바깥 세상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만든다는 데 있다. 2024년 인지과학자 마테우시 워즈니악은 자기라는 것이 베이즈 추론으로 자라나는 표상이라는 점을 정리했다. 갓난아기가 자기 몸의 경계를 학습하는 단계에서부터, 나는 어떤 사람이라는 추상적 자기상에 이르기까지, 자기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깥 세상에 대한 예측에는 강력한 교정 장치가 있다. 벽이 없다고 예측하고 걸어가면 코를 부딪친다. 예측이 틀리면 세상이 즉시 오차 신호를 보내준다. 자기에 대해서는 그 신호가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 내가 냉정한 사람이라고 예측하며 살아도, 세상은 좀처럼 내 코를 때려주지 않는다. 오차 신호가 약하니 모형은 교정되지 않고, 교정되지 않은 모형은 점점 더 굳어진다.
여기에 한 겹이 더 있다. 자기 모형은 단순히 교정이 안 되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기를 변호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1970년대 신경과학자 마이클 가자니가는 분리뇌(split-brain) 환자들을 연구하면서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좌우 뇌를 잇는 다리를 끊은 환자에게, 왼쪽 뇌에는 닭발 그림을, 오른쪽 뇌에는 눈 내린 풍경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여러 그림 중 관련된 것을 고르게 하자, 오른손은 닭을, 왼손은 삽을 집었다. 닭은 닭발과 연결되고 삽은 눈을 치우는 도구이니 각 반구가 본 것에 맞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말을 담당하는 왼쪽 뇌는 오른쪽 뇌가 본 눈 풍경을 알지 못했다. 왜 삽을 골랐느냐고 묻자 환자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닭장을 치우려면 삽이 필요하니까요. 자기가 왜 그 행동을 했는지 진짜 이유를 모르는 상태에서, 뇌는 즉석에서 그럴듯한 이유를 지어내고 그것을 진심으로 믿었다.
가자니가는 이 기능을 해석기(interpreter)라 불렀다. 왼쪽 뇌에 자리잡은 이 모듈은 우리가 하는 행동에 끊임없이 사후 설명을 붙이는 일을 한다. 그 설명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가 일관되게 이어지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 속의 내가 그럴 만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다. 어떤 연구자는 이 해석기를 변호사나 대변인에 빗댔다. 그 일은 의뢰인을 변호하는 것이지 진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다. 분리뇌 수술을 받은 사람만 이런 것이 아니다. 가자니가는 이 해석기가 우리 모두의 뇌에서 매 순간 작동한다고 보았다. 우리가 자기 행동의 이유라고 믿는 것의 상당 부분은, 행동이 일어난 뒤에 뇌가 붙인 그럴듯한 해설이다.
이것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준 실험이 있다. 2005년 심리학자 페터 요한손과 라르스 홀은 사람들에게 두 사람의 얼굴 사진을 보여주고 더 매력적인 쪽을 고르게 했다. 그리고 손기술로 카드를 몰래 바꿔, 고르지 않은 사진을 마치 그가 고른 것처럼 건네며 왜 이 사람을 골랐는지 물었다. 결과는 당황스러웠다. 대다수가 바꿔치기를 알아채지 못했고, 이후 여러 연구를 종합해도 조작을 감지한 사람은 스무 명 중 네댓 명 수준에 그쳤다. 더 놀라운 것은 알아채지 못한 사람들의 반응이다. 그들은 자기가 고르지도 않은 사진을 두고, 이 사람이 왜 더 매력적인지를 막힘없이 설명했다. 눈매가 좋아서, 분위기가 따뜻해서. 자기가 한 적 없는 선택을 진지하게 변호한 것이다. 이 효과는 잼 고르기에서도, 정치적 입장에서도 똑같이 나타났다. 사람들에게 자기가 반대한다고 답했던 입장을 마치 찬성한 것처럼 되돌려주자, 상당수가 그 입장을 자기 신념인 양 옹호했다. 선택맹(choice blindness)이라 불리는 이 현상이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자기 의도와 신념이라 믿는 것조차, 실은 사후에 구성된 이야기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뇌는 왜 이렇게까지 자기를 지어내고 변호하는가. 2022년 아비브 모카디와 니브 레게브는 이 물음을 예측 처리의 언어로 다시 풀었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오래된 동기가 있다. 하나는 자기 검증(self-verification), 즉 내가 아는 나의 모습을 확인하려는 동기다. 다른 하나는 자기 고양(self-enhancement), 즉 자기를 실제보다 낫게 보려는 동기다. 두 연구자는 이 동기들이 예측 기계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했다. 자기상에 맞는 정보가 들어오면 뇌는 예측이 적중했다고 느끼고, 그 적중은 보상으로 경험된다. 반대로 자기상과 어긋나는 정보가 들어오면 예측 오차가 발생하는데, 뇌는 이 오차를 줄이려 한다. 줄이는 방법은 두 가지다. 모형을 바꾸거나, 들어온 정보를 깎아내리거나. 자기를 바꾸는 것은 비용이 크고 불안정하니, 뇌는 흔히 정보를 깎는 쪽을 택한다. 내게 불리한 피드백은 예외로 처리되고, 나를 비판한 사람은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 된다. 도끼를 잃은 사람이 도끼는 의심하지 않고 이웃집 아이를 의심한 것과 같은 구조다. 모형을 지키기 위해 세상 쪽을 의심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환상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려다 문제가 터지는 과정은 의지의 문제도, 인격의 문제도 아니다. 안정된 자기상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는 시스템이, 정확성보다 일관성을, 진실보다 자기 보호를 우선한 결과다. 환상은 그 시스템의 부작용이 아니라 정상 작동이다.
평생 사람을 관찰해 왔다. 시장은 드물게도 자기 모형에 강한 오차 신호를 보내주는 곳이다. 손익계산서는 변명을 듣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람의 자기 변호는 끈질기다. 나는 리스크 관리를 잘한다고 믿는 사람이 같은 자리에서 같은 방식으로 반복해 깨지는 것을 본다. 손실이 났을 때 시장이 비정상이었다고 말하고, 운이 나빴다고 말하고, 한 번만 더 하면 회복한다고 말한다. 모두 해석기가 즉석에서 지어낸, 자기를 그럴 만한 사람으로 남겨두는 이야기다. 흥미로운 것은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일수록 이 오차 신호를 더 잘 깎아낸다는 점이다. 확신은 예측 오차에 부여되는 가중치를 낮춘다. 그래서 가장 단단한 자기상을 가진 사람이, 가장 교정되지 않는 사람이 되는 일이 드물지 않다.
고대인들에게는 분리뇌 실험도, 뇌 영상 장비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를 아는 일이 인간이 가장 못하는 일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았고, 그래서 그것을 신전 입구에 새기고 공부의 첫 자리에 놓았다. 그들이 본 것과 신경과학이 본 것은 결국 같은 구조다. 자기를 변호하는 자기는 가장 고치기 어려운 자기라는 것. 도끼를 잃은 사람이 골짜기를 파보지 않는 한, 이웃집 아이는 영영 도둑으로 남는다. 자기 골짜기를 파볼 마음이 드는 사람이 있고, 끝내 남의 걸음걸이만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다. 누가 어느 쪽인지는, 보통 한참 뒤에야 드러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