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sdom

오만한 사람은 자신이 오만한지 모른다 – 깨지지 않은 자리의 함정

오만한 사람의 가장 일관된 특징은 자기가 오만하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본인은 그저 정확하게 알고 있을 뿐이고, 본인은 그저 사태를 명료하게 보고 있을 뿐이라고 믿는다. 주변 사람이 답답해 보이고, 반대 의견은 무지의 산물로 보인다. 오만은 자기 인식의 결함이 만들어내는 풍경이지, 도덕적 결함이 아니다. 그래서 오만한 사람을 설득하기 어렵다. 설득해야 할 본인이 자기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장자 추수편에 하백 이야기가 나온다. 황하의 신 하백이 가을비로 강물이 불어나자 천하의 모든 아름다움이 자기에게 모였다고 흐뭇해한다. 동쪽으로 흘러가다 북해에 다다른 순간 그는 비로소 입을 다문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 앞에서 자기가 보아온 강이라는 것이 얼마나 작은 단위였는지를 깨닫는다. 그가 북해약에게 한 말이 인상적이다. 자기가 직접 그 광경을 보지 않았다면 평생 자기 식견을 부끄러워할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우물 안 개구리에게 바다를 말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사는 공간에 매여 있기 때문이라는 구절은 여기서 나온다. 정저지와(井底之蛙)라는 표현이 사람들이 흔히 인용하는 부분이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우물 안 개구리가 자기가 우물 안에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점이다.

오만은 능력이 충분한 사람에게서도 발생하지만, 더 자주 발생하는 곳은 능력이 부족한 자리가 아니라 경험이 부족한 자리다. 정확히 말하면 부딪치고 깨지는 경험이 부족한 자리. 머리로만 알고 있는 사람, 책과 보고서로만 세계를 본 사람, 시뮬레이션은 많이 돌렸지만 손에 흙을 묻혀본 적은 없는 사람. 이런 자리는 한국 사회에 적지 않다. 검사가 그 자리의 한 형태이고, 대기업 기획실과 전략실이 또 다른 형태이며, 특정 학력 라인을 따라 형성된 컨설팅 업계가 또 다른 형태다. 공통점은 의사결정의 결과를 직접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결과가 나쁘게 나와도 본인의 판단력이 의심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깨지지 않는 자리에서 형성된 자기 확신은 좀처럼 갱신되지 않는다.

검증 가능한 사례가 있다. 2007년 LG전자는 맥킨지에 약 1000억 원을 들여 휴대폰 사업 컨설팅을 의뢰했다. 보고서는 스마트폰을 찻잔 속 태풍으로 평가하며 피처폰에 집중하라고 권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LG전자는 이 권고를 따랐다. 결과는 잘 알려져 있다. 2015년 2분기부터 23분기 연속 영업 적자, 누적 적자 약 5조 원, 2021년 7월 휴대폰 사업 종료. 1995년부터 26년간 이어온 사업이 그렇게 닫혔다. 컨설턴트만의 잘못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 권고를 받아들인 경영진의 판단이 더 결정적이었다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시장 현장에서 손에 기기를 쥐고 흐름을 느끼던 사람들과, 데이터와 프레임워크로 시장을 평가한 사람들 사이에서 어느 쪽이 더 큰 자기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질문은 남는다. 자기 확신의 크기와 현장 감각의 크기가 반비례하는 경우는 의외로 흔하다.

학계도 이 패턴을 관찰한다. 2008년 미국의학저널에 실린 버너와 그레이버의 논문은 의사의 진단 오류에서 과신이 핵심 요인이라는 점을 정리했다. 흥미로운 것은 의사들에게 지난 1년간 진단 오류를 한 적이 있는지 물어보면 보통 1퍼센트 정도만 그렇다고 답한다는 대목이다. 실제 부검과 후속 진단을 통해 추적되는 진단 오류율은 그보다 훨씬 높다. 2024년 알마그라비 등의 연구는 더 구체적이다. 진단에 대한 확신이 강한 의사일수록 진단 오류가 더 많았고, 대안적 가능성을 검토하는 시간이 더 짧았다. 능력이 부족해서 틀린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맞다는 확신이 다른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구조다. 과신은 진단의 폭을 줄이고, 좁아진 폭은 다시 자기 판단의 정당성을 강화한다.

흐름이 같다. 자기가 다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른 데서 들어오는 정보는 잡음이 된다. 잡음을 잘 거른다는 자부심은 사실 정보의 차단이고, 차단된 시야 안에서 형성된 결론은 점점 더 단단해진다. 본인은 정밀해졌다고 느끼지만, 외부에서 보면 협소해진 것이다. 깨지지 않은 사람은 자기가 협소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할 통로가 없다. 통로 자체를 자기가 닫았기 때문이다.

도덕경에는 이런 표현이 있다. 자기를 드러내려 하지 않기에 드러나고, 자기가 옳다고 하지 않기에 빛난다. 거꾸로 말하면, 자기를 자꾸 드러내려 하는 사람은 결국 흐려지고, 자기가 옳다고 우기는 사람은 결국 어두워진다는 뜻이다. 이것은 도덕률이 아니라 관찰이다. 사람은 본인이 단단하다고 느낄수록 업데이트를 멈추고, 업데이트를 멈춘 자리에서는 시간이 흘러도 같은 자기만 반복된다. 30년 전에 똑똑했던 사람이 30년 후에는 30년 전 그대로의 똑똑함만 남아 있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 사이 세계는 두세 번 다른 모양이 됐는데, 본인의 지도는 한 번도 업데이트 되지 않은 것이다.

오만의 해독제로 흔히 겸손이 거론되지만, 겸손이라는 단어는 종종 오용된다. 자기를 낮추는 시늉은 오만의 또 다른 형태일 수 있다. 진짜 해독제는 깨지는 경험을 회피하지 않는 것에 가깝다. 사업이 망하는 경험, 시장에서 거부당하는 경험, 본인이 확신했던 판단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경험. 그런 경험은 자기 안에서 만들어낼 수 없고 외부에서만 들어온다. 그리고 그 경험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곧 업데이트의 능력이다. 하백이 북해를 보고 입을 다문 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인식 업데이트의 시작이었다.

문제는 어떤 자리는 깨지는 경험이 잘 들어오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권한은 크고 책임은 분산되며, 결과의 피드백은 늦게 도착하거나 도착하지 않는다. 그런 자리에 오래 있을수록 사람은 자기가 잘하고 있다는 신호만 받게 된다. 신호만 받고 반증은 받지 않는 환경, 그것이 오만이 자라는 토양이다. 토양은 사람을 만들고, 만들어진 사람은 토양을 다시 강화한다. 어떤 직군이 유독 오만하게 보인다면, 그 직군에 모인 사람들의 인격 문제이기보다는 그 자리의 구조적 특성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자기가 오만한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정직한 답은 혼자서는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자기 인식의 결함은 정의상 자기 안에서 감지되지 않는다. 그래서 외부의 거울이 필요하다. 본인의 판단을 정기적으로 반박해주는 사람, 본인이 틀렸을 때 그 사실을 알려주는 시장의 신호, 본인이 만든 결정의 결과를 끝까지 책임지는 구조. 이런 것들이 오만의 자연스러운 교정 장치다. 이 장치들이 없는 자리는 오만하지 않은 사람도 시간이 흐르면 오만해질 수 있다. 그래서 사람보다 자리를 먼저 보는 것이 더 정확할 때가 많다.

하백이 북해를 보았을 때, 그가 본 것은 단지 큰 물이 아니었다. 자기가 보아온 풍경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 누가 어느 쪽인지는 보통 한참 후에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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