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개인, 그 필연적 불균형에 대하여
우리는 종종 착각한다. 내 삶이 온전히 내 것이라고.
하지만 조금만 거리를 두고 보면, 우리의 삶은 시대라는 거대한 무대 위의 연극과 같다. 대본은 이미 쓰여 있고, 우리는 그저 주어진 역할을 연기할 뿐이다. 물론 약간의 애드리브는 가능하지만, 전체 줄거리를 바꿀 수는 없다.
태어남의 우연성
1950년생과 1990년생의 삶을 비교해보자.
1950년생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태어나 산업화의 전 과정을 목격했다. 그들에게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땅도 쌌고, 사업 기회도 널렸고, 학력이 없어도 성공할 길이 있었다.
1990년생은 이미 완성된 체계 속에 태어났다. 모든 자리는 차 있고, 모든 땅에는 주인이 있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경쟁’이라는 단어뿐이다. 더 좋은 대학, 더 높은 스펙, 더 안정적인 직장을 위한 무한경쟁.
이것은 개인의 능력 차이가 아니다. 단지 언제 태어났느냐의 차이일 뿐.
시대정신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만의 정신이 있다. 그것은 공기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어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한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질서가, 일제강점기에는 생존이, 산업화 시대에는 성장이, 그리고 지금은 ‘각자도생’이 시대정신이다. 우리는 이 정신에 저항할 수도 있지만,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물고기가 물을 벗어날 수 없듯이.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선택을 ‘자유의지’의 결과라고 믿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왜 하필 모두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선택을 할까? 90년대에는 모두가 대기업을, 2000년대에는 공무원을, 2010년대에는 스타트업을 꿈꿨다. 우연의 일치일까?
구조와 행위자
사회학에서는 이를 ‘구조와 행위자의 문제’라고 부른다.
구조(시대)는 개인의 행위를 제약하지만, 동시에 가능하게도 한다. 마치 도로가 자동차의 경로를 제한하지만, 동시에 빠른 이동을 가능하게 하듯이.
한국의 교육열을 보자. 개인적 차원에서는 ‘내 아이의 미래를 위한 투자’지만, 구조적 차원에서는 ‘학벌 사회가 만든 강요된 선택’이다. 부모는 선택했다고 믿지만, 사실은 선택하도록 강요받은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구조를 거부하는 것조차 시대의 산물이다. N포 세대, 욜로족, 파이어족… 이들의 ‘반항’조차도 시대가 만든 틀 안에서의 움직임이다.
세대론의 함정과 진실
늘 세대론은 존재해 왔다. 386세대, X세대, MZ세대…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시대가 개인을 규정하는 가장 명확한 증거다. 같은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이 왜 비슷한 특성을 보일까? 유전자가 같아서? 아니다. 같은 시대적 경험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386세대의 민주화 경험, X세대의 IMF 트라우마, MZ세대의 디지털 네이티브 정체성. 이것들은 개인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시대가 부여한 것이다.
더 깊이 들어가면, 한 세대 안에서도 계층에 따라 전혀 다른 시대를 산다. 강남의 MZ와 지방 소도시의 MZ는 같은 세대지만 다른 세계에 산다. 시대는 평등하게 모두를 규정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차별적으로 작동한다.
기술 결정론과 인간의 자리
21세기 들어 시대의 힘은 더욱 강력해졌다. 기술이 그 중심에 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을 상상할 수 있는가? 불과 15년 전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스마트폰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 이것은 우리가 선택한 것일까, 아니면 시대가 강요한 것일까?
AI의 등장은 더욱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인간의 고유성이라고 믿었던 창의성마저 기계가 대체하기 시작했다. 변호사, 의사, 예술가… 어떤 직업도 안전하지 않다.
우리는 적응할 수밖에 없다. 그것도 빠르게. 시대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도태된다. 이것은 자연선택도 아니고 사회선택도 아니다. 시대선택이다.
우연과 필연 사이
철학적으로 보면, 우리의 삶은 우연과 필연의 교차점에 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가정에 태어날지는 순전히 우연이다. 하지만 일단 태어나면, 그 시대의 법칙에 따라 살아가는 것은 필연이다.
마치 주사위를 던지는 것과 같다. 어떤 숫자가 나올지는 우연이지만, 1에서 6 사이의 숫자가 나오는 것은 필연이다. 시대는 그 주사위의 면을 규정한다.
가끔 누군가는 주사위 자체를 바꾸려 한다. 혁명가들, 선구자들, 예언자들. 하지만 그들조차도 시대의 산물이다. 시대가 막히면 혁명가가 나오고, 시대가 혼란하면 예언자가 나온다. 개인이 시대를 바꾸는 것 같지만, 사실은 시대가 그런 개인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상대적 자유의 공간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자유도 없는가? 그렇지는 않다.
시대는 큰 흐름을 결정하지만, 구체적인 삶의 결은 우리가 만든다. 같은 시대를 살아도 누군가는 시를 쓰고, 누군가는 빵을 굽는다. 큰 강의 흐름은 같지만, 그 안에서 헤엄치는 방식은 다르다.
중요한 것은 이 상대적 자유의 공간을 인식하고 활용하는 것이다. 시대를 바꿀 수는 없지만, 시대 안에서 나만의 길을 찾을 수는 있다. 완전한 자유는 환상이지만, 완전한 결정론도 진실은 아니다.
시대를 읽는다는 것
현명함이란 무엇일까? 시대를 거스르는 것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도 아니다. 시대를 읽는 것이다.
농부가 계절을 읽듯이, 우리는 시대를 읽어야 한다. 봄에는 씨를 뿌리고, 가을에는 수확한다. 겨울에 씨를 뿌리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어리석음이다.
지금 한국사회의 계절은 무엇일까? 성장의 여름은 지났고, 수확의 가을도 끝나가고 있다. 어쩌면 긴 겨울을 준비해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이때 필요한 것은 성장이 아니라 생존이고, 확장이 아니라 보존이다.
존재론적 성찰
결국 시대와 개인의 관계는 존재론적 질문으로 귀결된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나’라고 믿는 것들 중 얼마나 많은 것이 실제로는 시대의 산물일까? 내 욕망, 내 꿈, 내 가치관… 이것들이 정말 ‘내’ 것일까?
불교에서는 ‘무아(無我)’를 말한다. 고정된 자아란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진실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우리는 시대라는 큰 흐름 속의 한 물결일 뿐, 독립된 실체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물결도 나름의 모양과 리듬을 갖는다. 비록 바다에서 왔다가 바다로 돌아가지만, 그 찰나의 존재에도 의미가 있다.
시대는 거대하고 개인은 작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작다는 것이 무의미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별들도 우주에 비하면 먼지에 불과하지만, 그 먼지들이 모여 은하를 이룬다.
우리 각자는 시대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시대를 구성하는 요소다. 물방울이 모여 강을 이루듯, 개인이 모여 시대를 만든다. 비록 물방울 하나가 강의 방향을 바꿀 수는 없지만, 물방울이 없으면 강도 없다.
이것이 시대와 개인의 변증법이다. 거대한 필연성 속의 작은 우연들,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러니 시대를 탓하지도, 무시하지도 말자. 다만 이해하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자. 그것이 시대 속을 사는 인간의 품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