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ture

학습하는 능력 – 인공지능 시대 진짜 경쟁력은 무엇인가

인공지능 시대의 진짜 경쟁력은 인공지능을 다루는 기술이 아니라, 학습하는 능력 그 자체다. 이 말은 구글 딥마인드 최고경영자 데미스 하사비스(Demis Hassabis)가 2025년 9월 아테네의 헤로데스 아티쿠스 극장에서 한 발언이다. 2024년 노벨화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그는, 앞으로 10년 안에 인공일반지능(AGI)이 도래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하면서, 다음 세대에 가장 필요한 역량은 특정 기술이 아니라 학습하는 법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듣고 나면 당연한 이야기 같은데, 대부분의 사람은 여전히 뭔가 하나를 잘 배우면 된다고 믿고 있다.

시대마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강점은 달랐다. 농경 시대에는 체력이 경쟁력이었다. 땅을 갈고 추수하고 물을 길어 올리는 힘이 곧 생산이었다. 산업화 시대에는 규율과 성실함이 경쟁력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동작을 반복하는 능력. 입시의 시대에는 암기력이 경쟁력이었다. 머릿속에 얼마나 많은 정보를 저장하고 꺼낼 수 있는가. 조직의 시대에는 관계가 경쟁력이었다. 누구와 연결되어 있는가. 각 시대가 칭송한 능력은 그 시대의 병목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체력이 부족할 때 체력이 권력이었고, 정보가 귀할 때 암기가 권력이었다.

지금 병목은 어디로 옮겨 갔는가. 정보 입력, 검색, 가공, 인사이트 추출. 이 모든 것이 인간보다 기계가 잘한다. 한때 최고의 엘리트가 하던 리서치 업무를 지금은 평범한 사용자가 한 줄의 질문으로 처리한다. 도구의 문턱이 낮아졌다는 것은, 도구를 쓰는 기술만으로는 더 이상 차별화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2024년 이후 글로벌 IT 대기업들이 주니어 개발자 채용을 급격히 줄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의 노동통계국 자료를 보면 엔트리 레벨 소프트웨어 개발자 채용은 2022년 이후 약 20퍼센트 이상 줄었다. 기계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던 사람 자리가 먼저 비는 것이다. 모두가 같은 도구를 쥐게 되면, 경쟁은 다시 사람이 가진 본질적인 능력으로 되돌아온다.

하사비스가 말한 학습하는 능력은 구호가 아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이름이 붙어 있는 영역이다. 메타인지(Metacognition). 자기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스스로 감시하고 조절하는 능력. 이 개념을 1979년에 처음 체계화한 사람이 스탠퍼드 대학교의 존 플라벨(John Flavell)이다. 그는 American Psychologist에 실린 논문에서 아이들이 공부한 뒤에 자기가 준비됐다고 말하는 장면을 관찰했다. 나이가 많은 아이들은 준비됐다고 말하면 실제로 외우고 있었다. 어린 아이들은 준비됐다고 말해도 대부분 외우지 못한 상태였다. 차이는 지능이 아니라, 자기가 아는지 모르는지를 판별하는 능력이었다.

메타인지의 힘은 40년 넘게 반복적으로 측정되어 왔다. 일본 교토대학의 오타니와 히사사카가 2018년 Metacognition and Learning에 발표한 메타분석은 118개 연구와 149개 표본을 종합해 이 문제를 다뤘다. 결론은 단순하다. 메타인지는 학업 성취를 예측한다. 지능 변수를 통제하고 나서도 예측력이 남는다. 지능이 같은 두 사람이 있을 때, 자기 상태를 정확하게 관찰하는 사람이 더 많이 배운다. 특히 과제 수행 중에 실시간으로 측정한 메타인지는 학업 성취와 상관계수 0.53 수준까지 올라간다. 통계학에서 이 정도 수치는 아주 강한 연결을 뜻한다. 학습량의 문제가 아니라, 학습의 질을 관리하는 능력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2,500년 전 노자가 이미 짧게 말해 버렸다. 도덕경(道德經) 71장에 이런 구절이 있다. 知不知 上 不知知 病.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최상이고, 모르면서 안다고 하는 것이 병이다. 열 글자 남짓한 이 문장이 현대 심리학이 수십 년에 걸쳐 실험으로 확인한 것의 요약이다. 학습의 출발점은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어디까지 알고 어디부터 모르는지를 정확하게 구분하는 데 있다. 이 구분이 흐릿한 사람은 아무리 많이 읽어도 쌓이지 않는다. 이미 안다고 착각하는 영역은 다시 들여다보지 않고, 모르는 줄 모르는 영역은 처음부터 시야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이 구조가 매우 선명하게 드러난다. 25년 넘게 시장을 지켜보면서 반복적으로 관찰한 것이 있다. 같은 손실을 겪어도 두 부류의 사람이 갈린다. 한쪽은 자기가 왜 졌는지 모른다. 운이 없었다거나, 시장이 이상했다거나, 뉴스가 거짓말이었다고 말한다. 다른 한쪽은 자기가 어디에서 판단이 흐려졌는지를 복기한다. 두 부류의 지능과 경험은 큰 차이가 없다. 차이는 자기 사고 과정을 들여다볼 줄 아는지 여부다. 전자는 같은 손실을 5년마다 반복하고, 후자는 같은 구간에서 다시 넘어지지 않는다. 돈이 쌓이는 속도의 차이는 결국 이 하나의 능력에서 온다.

그런데 학습 능력이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곧바로 학습법 얘기로 빠진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 어떤 강의를 들어야 하는지, 하루에 몇 시간 공부해야 하는지. 이 질문들은 메타인지가 이미 작동하고 있다는 전제 위에서만 의미가 있다. 메타인지가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좋은 책을 쥐여 줘도 책의 절반쯤 읽은 뒤에 스스로 다 이해했다고 판단한다. 강의를 들으면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으니 배운 것이라 여긴다. 실제로 남는 것은 거의 없다. 도덕경이 말한 부지지병(不知知病), 모르면서 안다고 착각하는 병의 현대적 형태다.

하사비스의 발언이 던지는 진짜 무게는 여기에 있다. 인공지능이 점점 쉬워지고, 지식에 접근하는 비용이 거의 0에 가까워지는 시대에는, 학습의 외부 조건이 아니라 학습의 내부 구조가 경쟁력이 된다. 누구나 같은 도구를 쓸 수 있을 때, 같은 도구로 다른 결과를 만드는 사람의 차이는 재능이 아니라 자기 사고에 대한 감시 능력에 있다. 내가 지금 이 도구를 제대로 쓰고 있는가. 나는 지금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내 판단의 어떤 부분이 약한가. 이 질문을 자연스럽게 던질 수 있는 사람과, 질문 자체를 모르는 사람 사이의 거리는 해마다 벌어진다.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메타인지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플라벨 이후 연구들이 반복해서 보여준 것이 이 능력은 훈련으로 키워진다는 사실이다. 계획을 세우고, 진행 상황을 중간에 점검하고, 결과를 평가하고, 다음 번에 접근 방식을 조정하는 이 네 단계의 순환을 의식적으로 반복하면 메타인지는 느리지만 분명하게 자란다. 도덕경 71장이 그다음 구절에서 聖人不病 以其病病. 성인이 병에 걸리지 않는 이유는 병을 병으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한 것도 결이 비슷하다. 자기 인지의 병을 병으로 감지하는 능력이 있으면 그 병에 갇히지 않는다.

한편 이 능력이 키워지는 방식에는 오래된 동양적 직관이 녹아 있다. 도교 수행에서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이 관조(觀照)다. 자기를 바깥에서 바라보는 눈을 기르는 것. 생각이 올라올 때 그 생각을 하는 자기를 보고, 감정이 올라올 때 그 감정을 느끼는 자기를 본다. 이것은 종교적인 훈련이라기보다는 인지적인 훈련이다. 현대 심리학이 메타인지라고 부른 것을, 도교는 수천 년 전부터 수행의 첫 단계로 다뤄 왔다. 방법론이 정교했고, 일상과 연결되어 있었다. 명상 앱에서 몇 분짜리 음성을 듣는 것과는 깊이가 다르다.

각 시대의 경쟁력은 바뀌지만, 바뀌는 방향에는 일정한 흐름이 있다. 기계가 대체할 수 있는 능력은 차례로 가치가 떨어지고, 기계가 대체하지 못하는 능력이 뒤늦게 주목받는다. 농업혁명이 체력의 프리미엄을 낮추고 기술의 프리미엄을 높였고, 산업혁명이 손기술의 프리미엄을 낮추고 규율의 프리미엄을 높였다. 정보혁명이 암기의 프리미엄을 낮추고 검색 능력의 프리미엄을 높였다. 그리고 지금 인공지능은 검색과 가공의 프리미엄을 낮추고, 자기 사고를 스스로 감시하는 능력의 프리미엄을 높이고 있다. 도구가 강해질수록 도구 밖의 것이 중요해진다. 역설처럼 들리지만, 한 번도 틀린 적 없는 흐름이다.

앞으로 어떤 능력이 경쟁력이 될 것인가. 하사비스는 학습하는 법이라 말했고, 오타니와 히사사카는 메타인지라 불렀고, 노자는 지부지(知不知)라 했다. 이름이 다를 뿐 같은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다만 이름을 아는 것과 그것을 갖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이름은 방금 알려졌지만, 갖추는 데는 아마 몇 년이 걸릴 것이다. 그 몇 년을 어디서부터 시작할지는,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각자의 몫이다.


댓글에 인색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