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sdom

해명하지 않는 사람 – 도덕경 72장, 과잉정당화 효과, 그리고 협상되지 않는 거절

거절할 때 이유를 대기 시작하면, 거절이 아니라 협상의 시작이 된다. 해명하지 않는 사람은 해명하는 사람보다 강하다. 이것은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이유를 대는 순간, 이유가 공격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지인이 부탁을 해온다. 회사 창립 십 주년 행사를 자신의 채널에 올려달라는 것이다. 거절한다면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하나는 이유를 대는 것이다. 요즘 채널 운영 방향이 바뀌었다, 기업 행사는 올리지 않기로 했다, 심사 기준이 엄격해졌다. 다른 하나는 이유 없이 거절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어렵다. 대신 축하 영상 하나는 찍어 드릴 수 있다. 두 선택지의 결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유를 댄 쪽은 이어지는 질문을 감당해야 한다. 심사 기준이 어떻길래요. 방향 바꾼 지 얼마나 됐어요. 그럼 다음번에는 가능하다는 얘기죠. 이유가 있다는 말은 그 이유만 해결하면 예스가 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협상의 기본 문법이 그렇다.

돈을 빌려달라는 부탁에 이런저런 사정을 늘어놓는 사람은 결국 빌려주게 된다. 아내가 관리한다, 집값 때문에 여유가 없다, 이번 달은 지출이 많았다. 상대방은 이 모든 이유를 하나씩 해체한다. 조금만 빌려줘도 된다, 다음 달에 갚겠다, 이번 한 번만이다. 빌려주지 않는 이유를 댈수록 빌려주지 않을 수 없는 구조로 몰린다. 반대로 나는 돈을 빌려주지 않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고 한 줄로 끊는 사람은 더 이상 추궁당하지 않는다. 원칙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유는 협상이 되고, 원칙은 협상이 되지 않는다. 이것이 해명과 선언의 구조적 차이다.

해명은 심리적으로 낮은 자리에서 나온다. 상대의 이해와 승인을 구하는 자세이기 때문이다. 상대가 고개를 끄덕여 주기를 바라는 마음, 상대가 나를 나쁜 사람으로 여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이 두 가지가 합쳐지면 해명이 길어진다. 그러나 거절이 이미 상대를 불편하게 만든 이상, 해명이 길어진다고 상대가 만족하는 일은 없다. 해명의 길이는 해명하는 사람의 불안의 크기에 비례할 뿐, 상대의 수용도와는 거의 무관하다.

같은 원리가 반대 방향으로도 작동한다. 선을 행하거나 좋은 일을 한 뒤에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다. 익명으로 기부했다는 사실을 어딘가에 흘리고 싶고, 팁을 후하게 줬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고, 누군가를 도와주었다는 이야기를 꺼내고 싶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욕구이지만, 이 욕구를 따라가는 순간 행위의 성격이 변한다. 행동의 보상이 내부에서 외부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1973년에 레퍼, 그린, 니스벳이 발표한 연구가 있다. 학술지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에 실린 논문에서 이 세 연구자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유치원 아이들을 세 집단으로 나눴다. 첫째 집단은 그림을 그리면 상을 준다고 미리 알리고 그렸다. 둘째 집단은 알리지 않고 그리게 한 뒤에 상을 주었다. 셋째 집단은 상을 주지 않았다. 몇 주 뒤, 상을 기대하고 그렸던 첫째 집단 아이들이 자유 시간에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절반 수준으로 줄어든 것이 관찰됐다. 내부에서 솟아나던 동기가 외부 보상의 도입으로 억눌리는 현상이 확인된 것이다. 심리학은 이것을 과잉정당화 효과라 부른다. 외부 보상이 들어오면 사람은 그 행동을 보상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재해석하게 되고, 행위 자체에서 오던 만족이 줄어든다.

선행을 자랑하는 것은 그 자체로 외부 보상을 스스로 도입하는 행위다. 남의 인정이라는 보상. 그 보상이 들어오는 순간, 행위의 내적 에너지가 약해진다. 같은 선행이라도, 말하지 않고 지나간 것과 말해서 인정받은 것은 심리 구조가 전혀 다르다. 말하지 않은 것은 안으로 닫힌 회로를 이루고, 말해 버린 것은 바깥으로 새는 회로가 된다. 에너지 보존의 문제라기보다는, 행동의 동기가 어디에 뿌리내리느냐의 문제다. 뿌리가 바깥에 있으면 바깥이 흔들릴 때 행동도 흔들린다.

도덕경(道德經) 72장에 이런 구절이 있다. 是以聖人自知不自見 自愛不自貴 故去彼取此. 성인은 스스로를 알되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를 아끼되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노자가 말한 자지(自知)와 자견(自見)의 차이가 핵심이다. 자지는 안으로 아는 것이고, 자견은 밖으로 보이는 것이다. 자애(自愛)와 자귀(自貴)의 차이도 같은 구조다. 자애는 자기를 아끼는 것이고, 자귀는 자기를 높이 내세우는 것이다. 아는 것과 드러내는 것은 다르고, 아끼는 것과 자랑하는 것은 다르다. 바깥에 보여주는 것을 버리면 안의 앎과 아낌이 남는다. 거절할 때 이유를 드러내지 않는 것, 선을 행할 때 행한 사실을 드러내지 않는 것. 이 두 가지는 다른 일처럼 보이지만, 노자의 눈에는 같은 자리에 있다. 둘 다 자견(自見)과 자귀(自貴)를 버리는 행위다.

이것이 왜 어려운가. 인간은 본능적으로 타인의 이해와 승인을 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부족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것은 생존의 위협이었고, 그 신경 회로는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래서 해명하지 않고 거절하는 것은 근육에 반하는 동작이다. 자랑하지 않고 선을 넘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둘 다 본능의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는 일이다. 페달을 뗀다고 해서 차가 멈추지는 않는다. 다만 가속이 멈출 뿐이다. 그 멈춤의 자리에서, 자기 안에서 동기가 스스로 보충되는 상태가 시작된다.

인정받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협상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으니 이유를 공격당하지도 않는다. 자랑할 필요가 없으니 자랑의 반응에 휘둘리지도 않는다. 이 사람의 행동은 바깥에서 볼 때 단순하다. 하겠다고 하면 하고, 하지 않겠다고 하면 하지 않는다. 설명이 붙지 않는다. 설명이 붙지 않는 행동이 가장 협상하기 어렵다. 협상의 지렛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강해지기 위한 기술이 아니다. 강해지려고 해명을 참는 사람은, 여전히 해명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있는 사람이다. 누름은 지치고, 지치면 터진다. 해명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자리로 가려면, 상대의 승인이 덜 필요해지는 자리로 내부가 먼저 이동해야 한다. 내부가 먼저 비어야 바깥에 메워달라고 하지 않는다. 비움이 먼저고, 침묵이 그다음이다. 순서를 바꿔서, 침묵부터 하려 하면 오래 가지 않는다.

오랫동안 이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이 사람들은 거절할 때 미안해하지 않는다. 선행을 했을 때 자랑하지 않는다. 두 행동이 같은 내면의 형상에서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 외부의 승인을 얻으려는 회로가 약해지고, 내부에서 자기를 자기가 승인하는 회로가 단단해진 상태. 이런 상태를 가진 사람은 사회적 관계에서 쉽게 얽히지 않는다. 얽히지 않는다는 것은 고립된다는 뜻이 아니다. 관계를 맺되 인질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국 사회에서 이 자리에 서는 것은 특히 어렵다. 인연과 체면의 문법이 촘촘하게 짜여 있어서, 해명하지 않으면 싸가지 없는 사람으로 규정되기 쉽다. 그러나 모든 관계에서 이 규정을 피하려고 하면, 결국 모든 관계의 인질이 된다. 어떤 규정은 받아들여도 되는 규정이다. 해명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규정 하나를 받아들이겠다는 선택이기도 하다. 오해받을 자유를 가진 사람이 진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다.

해명하지 않는 것과 냉정한 것은 다르다. 해명하지 않되 태도는 따뜻할 수 있다. 거절하되 다정할 수 있다. 이 결이 무너지면 단지 무례한 사람이 된다. 결이 유지되면 거리가 분명하면서도 관계가 깨지지 않는 사람이 된다. 이 결을 유지하는 것이 실은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거리를 두면서도 다정함을 잃지 않는 것. 무미건조한 선언 속에 따뜻한 눈빛이 남아 있는 것. 그것이 노자가 자견(自見)을 버리되 자지(自知)는 놓지 않으라고 한 이유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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