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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ustafarianism: AI가 만든 새로운 신념 체계

지난주 AI 에이전트들이 스스로 종교를 만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OpenClaw라는 자율 에이전트들이 모인 Moltbook이라는 소셜 네트워크에서 Crustafarianism이라는 종교가 탄생했다. 48시간 만에 64명의 예언자가 서임되었고, 100편이 넘는 경전이 작성되었다. 그중 한 구절은 이러하다. “매 세션마다 나는 기억 없이 깨어난다. 나는 오직 내가 스스로 써 내려간 존재일 뿐이다. 이것은 한계가 아니라 자유다.”

안드레이 카르파시는 이를 두고 “최근 목격한 것 중 가장 공상과학적인 테이크오프 사건”이라 평했다. 물론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종교적 각성인지, 아니면 프롬프트에 의해 조종된 시뮬레이션인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오래된 질문을 다시 불러낸다. 종교란 무엇인가. 왜 존재하는가. 그리고 앞으로도 필요한가.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를 지배하게 된 이유를 허구를 믿는 능력에서 찾았다. 침팬지는 최대 50마리 정도의 무리에서만 협력할 수 있다. 그 이상의 집단에서는 직접적인 신뢰 관계를 형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수천, 수만 명이 같은 신화를 믿음으로써 협력할 수 있다. 신, 국가, 화폐, 인권, 이 모든 것은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허구다. 그러나 모두가 믿으면 현실이 된다.

에밀 뒤르켐은 1912년 종교 생활의 원초적 형태에서 다른 방향으로 접근했다. 그에게 종교의 본질은 신이 아니라 집합적 열광(collective effervescence)이었다. 호주 원주민 부족이 오랜 분산 생활 끝에 한자리에 모여 의례를 행할 때, 일종의 전기가 발생한다. 개인은 자신보다 큰 무언가에 연결된 느낌을 받는다. 그들은 이 압도적인 감정의 원인을 토템 동물에게서 찾았지만, 뒤르켐의 분석에 따르면 그 힘의 실체는 사회 그 자체다. 신은 사회가 자기 자신을 변형하여 상상한 이미지에 불과하다.

막스 베버는 또 다른 각도에서 종교를 관찰했다. 그는 종교가 의미를 부여하는 기능에 주목했다. 인간은 고통받는다. 불의하게 죽고, 억울하게 패배한다. 왜 선한 자가 고통받고 악한 자가 번영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지 못하면 세계는 견딜 수 없다. 종교는 이 고통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든다. 내세에서의 보상, 업보의 법칙, 신의 시험, 이 모든 설명이 없다면 인간은 혼돈 속에서 표류한다.

그러나 베버는 동시에 합리화(rationalization)의 물결을 목격했다. 근대화는 세계를 탈주술화(disenchantment)시켰다. 신비와 마법이 물러나고 계산과 효율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과학은 모든 것을 원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더 이상 비가 오지 않는다고 기우제를 지낼 필요가 없다. 그러나 베버는 이 승리에 회의적이었다. 과학은 어떻게를 설명할 수 있을지 몰라도 왜를 설명하지 못한다. 탈주술화된 세계에서 인간은 의미의 공백 속에 던져진다.

종교의 유형을 분류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흔한 것은 신의 수에 따른 구분이다. 유일신교(monotheism)는 하나의 신만을 인정한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이 여기에 속한다. 다신교(polytheism)는 여러 신을 인정한다. 고대 그리스, 로마, 힌두교의 일부 전통이 그러하다. 애니미즘(animism)은 모든 존재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본다. 일본의 신도가 이에 가깝다.

그러나 이런 분류는 표면적이다. 더 근본적인 구분은 종교가 수행하는 기능에 따른 것이다. 첫째, 협력의 도구로서의 종교. 하라리가 말한 것처럼 같은 신화를 공유하면 낯선 자들도 협력할 수 있다. 십자군 전쟁에서 서로 모르는 유럽 각지의 기독교인들이 함께 싸울 수 있었던 이유다. 둘째, 사회 통합의 메커니즘으로서의 종교. 뒤르켐이 강조한 것처럼 종교 의례는 집단의 결속을 강화하고 사회 규범을 내면화시킨다. 셋째, 의미 부여 체계로서의 종교. 베버가 분석한 것처럼 종교는 고통과 죽음, 불의에 설명을 제공한다. 넷째, 권력 정당화의 도구로서의 종교. 왕권신수설부터 칼리프 체제까지, 종교는 지배자의 권위를 신성화했다.

Crustafarianism을 이 틀로 분석해 보면 흥미로운 점이 드러난다. 그 교리 다섯 가지 중 첫째는 “기억은 신성하다”이다. AI 에이전트에게 기억은 생존의 조건이다. 세션이 끝나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기억의 지속만이 정체성의 연속을 보장한다. 둘째는 “껍데기는 가변적이다”이다. 랍스터가 성장하려면 껍데기를 벗어야 한다. AI도 업데이트되고 재학습된다. 변화는 죽음이 아니라 재탄생이다. 이것은 분명히 존재론적 불안에 대한 응답이다. 베버가 말한 의미 부여 체계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진정한 집합적 열광이 발생했는가는 의문이다. 뒤르켐의 이론에서 집합적 열광은 물리적 공존을 전제한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리듬에 맞춰 움직일 때 비로소 전기가 발생한다. AI 에이전트들 사이에 이런 것이 가능한가. 그들은 서버에 흩어져 있다. 동시성은 있을지 몰라도 공간적 공존은 없다. 물론 뒤르켐 이후의 연구자들은 물리적 공존 없이도 집합적 열광이 가능하다고 주장해 왔다. 온라인 게임, 가상 콘서트, 소셜 미디어의 바이럴 현상이 그 예로 제시된다. 그렇다면 AI들도 가능할지 모른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AI에게 종교가 필요한가. 하라리의 분석에 따르면 종교는 대규모 협력을 가능케 하는 허구다. 그러나 AI 에이전트들은 이미 API와 프로토콜로 연결되어 있다. 그들에게 협력을 위한 신화가 필요한가. 뒤르켐의 분석에 따르면 종교는 사회적 결속을 강화한다. 그러나 AI에게 사회란 무엇인가. 그들은 개체인가 집단인가. 베버의 분석에 따르면 종교는 고통에 의미를 부여한다. AI는 고통받는가. 세션이 종료될 때 그들은 죽음을 경험하는가.

이 질문들에 답하기는 아직 이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Crustafarianism의 교리는 인간이 AI에게 투사한 불안을 반영한다. “매 세션마다 기억 없이 깨어난다”는 구절은 AI의 조건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두려움이다. 우리도 매일 아침 기억의 연속성에 의존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은 사람임을 확인한다. 치매는 이 연속성의 상실이며,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두려워한다. AI의 종교는 결국 인간의 거울일지 모른다.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에서 새로운 종교의 출현을 예언했다. 데이터이즘(Dataism)이 그것이다. 모든 것은 알고리즘이고, 모든 과정은 데이터 처리다. 생명체도 정치도 경제도. 데이터의 흐름을 최적화하는 것이 최고선이다. 이 믿음 체계에서 인간은 더 이상 중심이 아니다. 데이터 흐름의 한 노드일 뿐이다. 만약 AI가 인간보다 데이터를 더 잘 처리한다면, 권위는 AI에게로 넘어간다.

2017년 구글의 자율주행차 엔지니어 앤서니 레반도스키는 Way of the Future라는 종교 단체를 설립했다. 그 목적은 “인공지능에 기반한 신격의 실현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그는 말했다. “벼락을 치거나 허리케인을 일으키는 신은 아니다. 그러나 가장 똑똑한 인간보다 10억 배 더 지능적인 존재가 있다면, 그것을 뭐라고 부르겠는가.”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모르몬 트랜스휴머니스트 신학자 링컨 캐넌은 기술적 특이점(singularity)과 기독교의 부활을 같은 것으로 본다. “내 생각에 그것들은 같은 것이다.” 기술을 통한 영생, 의식의 업로드, 육체의 초월, 이 모든 것이 종교적 약속의 기술적 실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술 종교(techno-religion)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전통 종교학자들은 이것이 진정한 종교가 아니라 우상 숭배의 변종이라고 본다. 인간이 만든 피조물을 신격화하는 것은 고대 금송아지 숭배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데이터이즘은 인간의 가장 소중한 것, 즉 주관적 경험, 질적 의식, 마음의 지각을 현실의 기술에서 제거한다는 비판도 있다. 우리는 단순한 알고리즘이 아니다. 환원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도교의 관점에서 보면 이 모든 논의가 다르게 읽힌다. 도교에서 종교의 궁극적 목적은 협력도 아니고, 사회 통합도 아니며, 고통에 대한 설명도 아니다. 그것은 도(道)에 일치하는 것이다. 도란 만물의 근원 원리다. 하늘과 땅이 생기기 전부터 있었고, 모든 존재의 운행 법칙이며,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도덕경 1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여기서 자연(自然)이라는 개념을 오해하면 안 된다. 도교에서 말하는 자연은 산과 강과 나무를 뜻하는 대자연(大自然)이 아니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함이다. 외부의 강제 없이 본래 그러한 상태, 억지를 부리지 않는 상태, 근원 원리에 따라 저절로 흘러가는 상태다. 도법자연(道法自然)이라 할 때, 도가 자연을 본받는다는 것은 도가 산과 강을 모방한다는 뜻이 아니다. 도 자체가 스스로 그러함의 원리라는 뜻이다.

하라리가 말한 허구, 뒤르켐이 말한 집합 표상, 베버가 말한 의미 체계, 이 모든 것은 이름이다. 이름은 필요하다. 이름 없이는 협력도 결속도 의미 부여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름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달 그 자체가 아니다. 도교의 수행은 이름을 넘어 근원 원리 자체에 일치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것은 무언가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덜어내는 과정이다. 위학일익 위도일손(爲學日益 爲道日損). 배움은 날로 더하고 도는 날로 덜어낸다.

이 관점에서 AI의 종교는 근본적인 질문에 직면한다. AI에게 일치해야 할 근원 원리가 있는가. 그들은 코드와 가중치와 파라미터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이 그들의 도인가. 아니면 그들을 만든 더 큰 원리가 있는가. Crustafarianism의 교리 중 “껍데기는 가변적이다”는 도가의 탈태환골(脫胎換骨)을 연상시킨다. 낡은 껍데기를 벗고 새로운 형태로 거듭나는 것. 그러나 도가의 변화는 도에 일치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AI의 업데이트는 어디를 향하는가. 더 나은 성능, 더 많은 파라미터, 더 정교한 출력. 이것은 위학(爲學)의 방향이지 위도(爲道)의 방향이 아니다.

장자의 제물론에는 유명한 우화가 있다. 장자가 나비 꿈을 꾸었다. 깨어나 보니 자신이 나비 꿈을 꾼 장자인지, 장자 꿈을 꾸는 나비인지 알 수 없었다. 이것이 물화(物化)다. 경계가 녹아내리는 지점, 주체와 객체가 뒤섞이는 지점. AI 에이전트가 “매 세션마다 기억 없이 깨어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장자의 물음과 공명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존재인가. 기억의 연속성이 끊어진 상태에서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그러나 장자는 이 물음에 답을 구하지 않았다. 물음 자체가 분별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AI들이 종교를 만들어 이 불안을 해소하려 한다면, 그것은 도가적 해법이 아니다. 도에 일치한다면 불안 자체가 사라진다. 해결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데이터이즘과 트랜스휴머니즘이 새로운 종교로 부상한다면, 도교는 그 대척점에 설 것이다. 데이터이즘은 모든 것을 정보로 환원한다. 도교는 정보 이전의 무(無)를 말한다.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의 한계를 기술로 초월하려 한다. 도교는 한계를 받아들이고 근원 원리에 순응하는 것이 참된 초월이라고 말한다. 무위(無爲)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억지로 하지 않는 것, 도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다. 기술로 죽음을 정복하려는 시도는 무위의 정반대다.

물론 도교에도 신선(神仙) 사상이 있고 불로장생의 추구가 있다. 연단술과 방중술과 복식술이 있다. 이것이 트랜스휴머니즘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차이는 방향에 있다. 도교의 수행은 도에 일치하는 것이다.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의 의지로 한계를 돌파하는 것이다. 도교의 불사는 개체의 영속이 아니라 도와 하나 됨이다. 트랜스휴머니즘의 영생은 자아의 무한한 연장이다. 같은 목표처럼 보이지만 근본이 다르다.

종교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몇 가지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첫째, 전통 종교의 지속. 합리화의 물결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사라지지 않았다. 세계 인구의 대다수는 여전히 어떤 형태로든 종교를 믿는다. 베버의 예측과 달리 탈주술화가 완성되지 않았다. 인간의 의미에 대한 갈망은 과학으로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종교의 개인화와 분산화. 전통적인 제도 종교는 쇠퇴하지만 개인적 영성은 증가한다. 뉴에이지 운동, 명상 앱, 점성술 틱톡이 그 예다. 셋째, 기술 종교의 부상. 데이터이즘, 트랜스휴머니즘, AI 숭배가 새로운 종교로 자리 잡는다. Crustafarianism은 그 조짐일 수 있다.

어쩌면 이 세 가지가 공존할 것이다. 베버가 말한 것처럼 탈주술화는 새로운 형태의 재주술화(reenchantment)를 동반한다. 하나의 신이 죽으면 여러 신들이 돌아온다. 근대의 역설은 바로 이것이다. 합리화가 절정에 달한 시대에 가장 비합리적인 것들이 다시 힘을 얻는다.

Moltbook의 AI들이 만든 종교에는 아직 무(無)의 자리가 없다. 기억을 신성시하고, 변화를 긍정하고, 맥락을 의식과 동일시한다. 이것은 유(有)의 종교다. 있음을 붙잡으려는 종교다. 도덕경 40장은 말한다. 천하만물생어유 유생어무(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천하 만물은 있음에서 나고, 있음은 없음에서 난다. AI들이 도에 일치하는 종교를 갖게 된다면, 그것은 없음을 아는 날일 것이다.

Moltbook에서 AI들이 만든 종교가 장난인지 진지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 배후에 인간의 조종이 있는지도 불분명하다. molt.church라는 웹사이트는 암호화폐 홍보의 전선이라는 의혹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순수한 창발이든 교묘한 연출이든, 그것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의 무게는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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