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sdom

미뤄둔 행복은 회수되지 않는다 — 쾌락적응과 인생 설계의 버그

젊을 때 고생해서 돈을 모으고, 그 돈으로 더 큰 일을 이루고, 영향력을 쌓아 좋은 흔적을 남긴 뒤, 은퇴하면 가족과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보내다가, 말년에 베풀며 마무리하겠다. 많은 사람이 이런 인생 설계를 품고 산다. 단계가 분명하고 순서도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설계는 대체로 그려진 대로 실현되지 않는다. 계획이 부실해서가 아니라 전제 하나가 틀렸기 때문이다. 행복은 나중으로 미뤄두었다가 목돈처럼 한꺼번에 꺼내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설계에는 몇 개의 버그가 박혀 있다.

첫째, 사람은 어떤 상태에도 빠르게 익숙해진다. 1978년 심리학자 브릭만(Brickman)과 동료들은 거액의 복권 당첨자 22명, 사고로 몸이 마비된 29명, 그리고 평범한 대조군을 비교했다. 상식대로라면 당첨자들은 압도적으로 행복하고 사고를 당한 이들은 압도적으로 불행해야 한다.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당첨자들의 행복도는 생각만큼 높지 않았고, 오히려 친구와의 식사나 아침 햇살 같은 일상의 자잘한 즐거움에서 느끼는 기쁨은 줄어 있었다. 큰 자극을 한 번 겪고 나면 그보다 작은 것들이 시시해지기 때문이다. 브릭만은 이미 1971년에 이 구조를 쾌락의 쳇바퀴(hedonic treadmill)라 불렀다. 좋은 일이 생기면 행복의 기준선이 잠깐 올라가지만, 곧 그 자리가 새로운 평상이 된다. 같은 크기의 기쁨을 다시 느끼려면 더 큰 자극이 필요하다. 자극의 크기를 계속 키우는 경주에는 결승선이 없다.

하버드에서 오랫동안 행복을 가르친 탈 벤샤하르(Tal Ben-Shahar)는 이것을 도착의 오류(arrival fallacy)라 불렀다. 저 자리에 오르면, 저 집을 사면, 저 책을 내면 비로소 만족이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믿음이다. 막상 도착하면 기대했던 충만함은 잠깐 스치고 사라지며, 정상에 올라선 사람이 도리어 허탈해지는 일이 흔하다. 미뤄둔 행복은 도착지에서 정산되지 않는다.

둘째, 행복은 애초에 미뤄둘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하버드의 심리학자 대니얼 길버트(Daniel Gilbert)는 사람이 자기 미래의 감정을 예측하는 데 놀랄 만큼 서툴다는 것을 보였다. 그는 이 영역을 정서 예측(affective forecasting)이라 부르고, 거기서 반복되는 오차를 충격 편향(impact bias)이라 이름 붙였다.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 자신에게 줄 감정의 강도와 지속 시간을 일관되게 과대평가한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마찬가지다. 그러니 이것만 이루면 행복할 것이라는 예측은 시작부터 빗나간 계산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즐거움을 누리는 일이 보상이 아니라 능력이라는 데 있다. 누리는 법은 연습을 통해 길러진다. 평생 일만 하며 현재를 음미하는 훈련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은, 시간과 돈이 동시에 생긴 은퇴 첫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일하지 않을 때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 모르는 사람에게 비워진 시간은 자유가 아니라 막막함이다. 쾌락은 받는 상이 아니라 다룰 줄 알아야 하는 기술이고, 그 기술은 나이가 들었다고 저절로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

셋째, 아무도 당신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당신이 돈을 버는 동안 가족이 시간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는 자라 어느새 같이 놀아주지 않아도 되는 나이가 되고, 부모는 늙어 어느 해부터는 전화를 받지 못하고, 배우자도 혼자 보내는 시간에 익숙해진다. 함께였어야 할 그 시기는 한 번 지나가면 같은 값으로 되살 수 없다. 자산은 회복할 수 있지만 이 거래만은 환불이 없다.

노자는 도덕경 2장에서 이 구조를 이미 짚었다. 天下皆知美之為美 斯惡已, 천하가 모두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아는 순간 거기에 추함이 생긴다고 했다. 이어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形 高下相傾,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낳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이루며, 길고 짧음은 서로를 드러내고, 높고 낮음은 서로 기댄다고 적었다. 빛과 어둠은 따로 떨어진 두 물건이 아니라 한 사건의 양면이다. 밝은 쪽만 떼어 가지려는 시도가 어그러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얻음이라는 면만 오려내고 잃음이라는 면을 버리는 일은, 종이의 한쪽 면만 남기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위험 없이 높은 수익을 주는 자산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모든 수익에는 그만한 위험이 붙어 있고, 위험을 덜어내는 헤지에는 반드시 비용이 따른다. 자본을 한 곳에 넣으면 같은 돈을 다른 곳에 넣을 수 없다. 이것이 기회비용(opportunity cost)이다. 한 자리를 택한다는 것은 동시에 택하지 않은 모든 자리를 포기한다는 뜻이다. 수익이라는 빛만 거두고 손실이라는 어둠은 피하겠다는 태도는, 시장에서 가장 먼저 비싼 수업료를 내는 초심자의 환상이다. 같은 이치가 사주에도 보인다. 모든 기운이 고르게 다 강한 명식은 없다. 한 오행이 지나치게 왕성하면 다른 자리는 비기 마련이고, 그래서 명리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은 한쪽으로 치우쳐 메마른 편고(偏枯)가 아니라 기운이 균형을 이룬 중화(中和)다. 강함을 한곳에 몰아 받는 자리는, 다른 어딘가를 이미 내어준 자리다.

그러니 무언가를 포기한 사람이 손에 쥔 것을 부러워할 이유가 없다. 그는 당신이 지금 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고 그것을 얻었다. 가족과의 시간을 택한 사람은 자본의 곡선을 포기했고, 자본의 곡선을 택한 사람은 그 시간을 포기했다. 각자 자기가 고른 빛 뒤에 자기 몫의 어둠을 데리고 있다. 그 어둠은 보이지 않을 뿐 사라진 것이 아니다. 둘 다 가지려는 마음이 곧 빛만 보고 어둠을 피하려는 마음이며,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한쪽을 늘리려면 다른 한쪽은 내어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나중으로 미뤄둔 그것은, 시간이 지난 뒤에도 같은 값으로 살 수 있는 것인가. 값을 치를 사람은 그때까지 같은 자리에 남아 있어 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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