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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오카오(대학입시)가 바꾼 인재 기준, 시험지로 도착한 시대의 변화

중국의 대학 입시 까오카오(高考)가 2026년 6월 끝났다. 화제는 난이도였지만, 정작 눈여겨볼 것은 난이도가 아니다. 한 국가가 인재를 골라내는 기준 자체를 바꾸고 있다는 신호다. 가장 성실하게, 가장 말 잘 듣고, 가장 많은 문제를 풀어 온 학생을 윗자리에 올려 주던 시험이, 처음 보는 상황 속에서 스스로 문제를 찾아 푸는 학생을 가려내는 시험으로 옮겨 갔다.

올해 시험의 성격은 출제 기관의 설명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중국 교육부 시험원은 올해 문제가 실제 상황을 그대로 던져 놓고 독립적 사고능력, 정보 처리능력, 논리 추론능력, 창의 능력을 측정하도록 설계됐다고 밝혔다. 이과 종합 27번은 몰리브덴 광석에서 고순도 산화물을 제련하는 실제 산업 공정을 자료로 주고, 그 안에서 정보를 추출해 물질이 변환되는 경로를 분석하고 원리에 따라 추론하게 했다. 34번은 젖소 품종 개량을 배경으로 유전공학과 세포공학 지식을 동원해 실험을 설계하게 했다. 물리는 공을 가지고 노는 일상 장면에서 에너지 보존을 묻고, 역사는 문헌 기록과 고고학 자료를 서로 대조해 검증하게 하며 기계적인 사료 나열을 피했다. 수학은 계산량을 줄이는 대신 그 자리에서 길을 찾는 능력을 보도록, 덜 계산하고 더 생각하라는 방향으로 출제됐다. 전국 1권 수학은 역대 가장 어려웠다는 말이 나올 만큼 낯선 구조로 채워졌다.

문제는, 죽어라 외운 학생이 문제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절망을 처음 겪었다는 데 있다. 측정하려는 것이 머릿속에 지식이 들어 있느냐가 아니라, 그 지식을 처음 보는 상황에 옮겨 쓸 수 있느냐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인지심리학에서는 오래전부터 표층 학습(surface learning)과 심층 학습(deep learning)을 구분해 왔다. 표면적 특징만 외운 학생은 문제가 조금만 달라져도 성적이 절벽처럼 떨어지고, 원리를 이해한 학생만이 낯선 상황으로 지식을 옮기는 전이(transfer)에 성공한다. 올해 시험은 바로 그 전이 능력을 정조준했다. 같은 양을 외워도 누구는 풀고 누구는 문제 앞에서 멈춘다.

이것이 한 번의 출제 사고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증거는 시험지 밖에 있다. 중국 교육부가 2025년 4월 발표한 자료를 보면, 한 해 동안 대학 학부 전공이 1,839개 신설되고 1,428개가 폐지됐으며 2,220개가 신입생 모집을 멈췄다. 504개 대학이 폐지에 참여했고, 한 대학이 서른 개 넘게 없앤 경우도 있었다. 최근 5년간 사라진 전공을 합치면 5,000개를 넘는다. 무엇이 잘려 나갔는지가 핵심이다. 폐지 1위는 정보관리·정보시스템, 그다음이 마케팅, 정보·계산과학, 네트워크공학, 제품디자인이었다. 암기와 표준화된 실행이 중심이고 정답이 비교적 분명한 전공들이다. 반대로 새로 만들어진 자리는 공학 계열이 절반을 넘었고, 인공지능 전공이 단연 1위, 디지털 경제와 스마트 건설이 뒤를 이었다. 인공지능 교육, 탄소중립 공학처럼 이전 목록에 아예 없던 전공도 들어왔다.

두 흐름을 겹쳐 놓으면 그림이 또렷해진다. 잘려 나간 쪽은 인공지능이 비교적 쉽게 대체하는 영역, 곧 인간의 비교우위가 옅어진 영역이다. 시험이 측정 대상을 지식의 보유에서 깊은 이해와 응용으로 옮긴 것과, 국가가 전공 목록을 표준답 있는 분야에서 탐색이 필요한 분야로 다시 깎은 것은 같은 손에서 나온 두 동작이다. 과거의 입시는 평범한 아이라도 엉덩이가 무거우면, 즉 성실하게 많이 풀면 좋은 성적을 약속했다. 그 미덕이 이제 가장 먼저 도태되는 자리에 놓였다. 성실함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성실함만으로 충분하던 시대가 지나가는 중이다.

이 움직임은 중국만의 것이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22년 처음으로 만 15세 학생의 창의적 사고(creative thinking)를 64개 나라와 지역에서 측정했고, 그 결과를 2024년 6월에 내놨다. 정답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인 개방형 과제로 14만 명 넘는 학생을 평가한 국제 시험이다. 세계경제포럼이 해마다 내는 미래 직업 보고서도 분석적 사고와 창의적 사고를 가장 중요한 역량의 앞자리에 올려 둔다. 재는 잣대 자체가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느냐로 옮겨 가는 중이다.

그렇다면 한국 학생은 그 창의적 사고에서 몇 등을 했을까. 결과는 의외로 분명하다. 한국은 60점 만점에 평균 38점으로 OECD 평균인 33점을 웃돌았고, OECD 회원국 중에서는 1위에서 3위 사이, 전체 64개 나라와 지역 중에서는 2위에서 4위 사이였다. 표본 오차 탓에 정확한 등수 대신 범위로 매기지만, 가장 앞선 집계로는 OECD 1위, 그리고 싱가포르(41점)에 이은 전체 2위였다. 상위 성취 수준에 든 학생 비율도 46퍼센트에 달했다. 머릿속에 든 지식이 아니라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는 능력에서, 한국 학생은 이미 세계 최상위에 있었다. 흥미로운 단서가 두 가지 더 있다. 하나는 한국 학생의 창의적 사고 자아효능감(self-efficacy)이 OECD 평균보다 낮았다는 점이다. 실제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인데 스스로 창의적이라 믿는 정도는 평균 아래였다. 다른 하나는 부모의 직업과 교육, 자산 같은 사회경제적 배경이 창의적 사고 점수에 미치는 영향이 6.4퍼센트로, OECD 평균 11.6퍼센트의 절반 가까이에 그쳤다는 점이다. 배경에 따른 창의력 격차가 다른 나라보다 작다는 뜻이다.

이 두 단서를 나란히 놓으면 한국의 선택은 더 묘해진다. 학생들은 이미 창의적 사고 능력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가지고 있고, 그 능력의 분포는 배경에 비교적 덜 휘둘린다. 그런데 2028년 통합형 수능은 과목의 벽은 허물면서도 깊이를 재는 논·서술형은 끝내 넣지 않기로 했다. 가장 큰 이유로 거론된 것이 공정이었다. 여기서 공정이라는 말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한 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공정에는 서로 다른 두 개념이 섞여 있다. 하나는 절차의 공정이다. 모두에게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고, 정답이 분명해 채점에 시비가 없으며, 누구도 결과를 두고 항의할 수 없는 상태. 객관식 시험이 이 공정을 극대화한다. 다른 하나는 변별로서의 공정이다. 시험의 본래 임무는 실력의 차이를 정확히 드러내는 것이고, 진짜 차이를 가려내지 못하는 시험은 그 자체로 공정하지 않다는 관점이다. 두 개념은 같은 단어를 쓰면서 정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대하는 것이라 했다. 능력이 다른 사람을 똑같이 취급하는 것 역시 또 하나의 불공정일 수 있다는 뜻이다. 분별하지 않는 것이 곧 공정인가, 아니면 분별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공정의 반대편인가. 이 물음은 생각보다 오래되었다.

한 가지는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가장 정교하게 다듬은 존 롤스조차, 공정을 우수한 사람을 끌어내리는 하향평준화로 보지 않았다. 롤스의 정의는 기회의 공정한 평등을 보장하되, 불평등은 그것이 가장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도 이득이 될 때에만 허용된다고 말한다. 잘하는 사람을 묶어 두라는 원리가 아니라, 출발선을 고르게 한 뒤 그 위에서 차이를 인정하라는 원리다. 한국에서 공정이 핵심어가 된 지난 몇 해, 마이클 샌델의 책 공정하다는 착각(원제 능력주의의 폭정)이 범접하기 어려운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이 단어의 무게를 보여 준다. 다만 샌델이 겨눈 것은 능력주의가 스스로 공정하다고 믿는 착각이었지, 실력을 변별하지 말라는 주장은 아니었다. 한국의 공정 논쟁은 실은 두 불안 사이에서 진동한다. 하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배경 때문에 안 된다는 불안이고, 다른 하나는 변별하지 않아 진짜 실력이 묻힌다는 불안이다. 같은 단어가 정반대의 정책을 정당화한다.

논·서술형을 둘러싼 망설임에도 그 두 불안이 함께 들어 있다. 글로 풀어 쓰게 하는 시험은 깊은 이해를 잴 수 있지만, 채점자의 주관이 끼어들고 글쓰기를 따로 사교육으로 다듬은 학생이 유리해져 배경의 격차를 다시 키울 수 있다. 객관식은 그 격차를 줄이는 대신 깊이를 거의 재지 못한다. 공정을 배경의 영향을 줄이는 것으로 보면 객관식이 안전하고, 공정을 실력의 정확한 변별로 보면 객관식은 회피다. 세계 최고 수준의 창의적 사고 능력을 가진 학생들을, 그 능력을 거의 묻지 않는 시험으로 줄 세우기로 한 선택은 그래서 단순한 보수성도 단순한 평준화도 아니다. 어느 공정을 택할 것인가를 두고 한 사회가 아직 답을 정하지 못했다는 표시에 가깝다. 우수한 사람이 평균으로 끌려 내려오는 것을 공정이라 부를 때, 그 공정은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포기하는가. 분별을 내려놓은 자리에서 길러지는 것은 평등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

장자에는 쓸모없어 보이던 나무가 베이지 않아 천수를 누리는 이야기가 있다. 같은 책에는 울지 못해 쓸모없다는 이유로 먼저 잡히는 거위 이야기도 나란히 나온다. 한 시대가 쓸모라 부르던 것이 다음 시대에는 가장 먼저 잘려 나가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무엇이 쓸모이고 무엇이 도태인지는 시대가 정하고, 시대는 시험지의 난이도라는 조용한 얼굴을 하고 그 기준을 바꾼다. 올해 까오카오 앞에서 절망한 학생들이 겪은 것은 어쩌면 한 시대의 기준이 다른 기준으로 교체되는 순간의 마찰이었는지도 모른다.

변화는 늘 이렇게, 한 장의 시험지로 도착한다. 지금 그 시험을 준비하는 세대가 사회에 나올 무렵, 어느 나라가 어느 쪽으로 휘었는지가 비로소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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