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조감의 정체 – 정보 과부하 시대의 도덕경 12장 다시 읽기
초조감은 외부에서 오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정보를 너무 많이 받아들인 사람의 내부에서 자라난다. 요즘 쓰레드를 열면 그 풍경이 한눈에 보인다. 어제는 코덱스가 좋다고 하고, 오늘은 클로드 코드라 하고, 내일은 또 다른 이름을 들고 나타날 것이다. 누구는 공짜 토큰 한도를 두고 분개하고, 누구는 대기업이 한 번의 업데이트로 자기 사업을 날렸다고 한탄한다. 바깥에서 보면 모두가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가만히 보면 다들 같은 자리에서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있다. 정보를 모으는 동작이다.

문제는 이런 글들을 읽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그 에너지에 끌려 들어간다는 데 있다. 글에는 단어만 담기는 것이 아니라 쓴 사람의 상태가 함께 담긴다. 초조한 사람의 글을 오래 읽으면 어느새 가슴 한가운데가 답답해지고, 그 답답함을 해소할 길을 찾으려고 다시 새로운 글을 클릭하게 된다. 도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도구를 따라가는 사람들의 감정을 따라가는 것이다.
노팅엄 대학교의 마쉬, 페레즈 바예호스, 스펜스가 2024년 학술지 세이지 오픈에 게재한 연구는 이 풍경에 대한 정량적 그림을 제공한다. 디지털 환경에서 일하는 142명을 분석한 결과, 정보 과부하(Information Overload)와 정보를 놓칠지 모른다는 두려움(Information FoMO)이 결합하면 번아웃과 정신건강 악화의 직접적인 위험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두 변수가 서로를 키운다는 데 있다. 정보가 너무 많아서 다 따라잡지 못한다고 느낄수록,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불안이 커지고, 그 불안 때문에 다시 더 많은 정보를 찾는다. 빠져나갈 수 없는 회로다. 같은 연구진이 이듬해 프런티어스 인 오거니제이셔널 사이콜로지에 발표한 후속 연구는 이 회로가 단지 양의 문제가 아니라 강도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메시지의 양, 응용 프로그램의 수, 채널의 다양성이 동시에 작동하면서 노동의 강도 자체를 끌어올린다.
도덕경 12장에서 노자가 한 말이 떠오른다. 오색령인목맹 오음령인이롱 오미령인구상 치빙전렵령인심발광 난득지화령인행방(五色令人目盲 五音令人耳聾 五味令人口爽 馳騁畋獵令人心發狂 難得之貨令人行妨). 다섯 가지 색이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다섯 가지 소리가 사람의 귀를 먹게 하며, 다섯 가지 맛이 사람의 입맛을 잃게 한다. 말 달리며 사냥하는 일이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만들고, 얻기 어려운 재화가 사람의 행동을 어지럽힌다. 노자가 살던 시대에 다섯 가지 색이라고 하면 지금 기준으로는 빈약한 자극이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을 감각을 망치는 원인이라고 했다. 자극이 풍부해서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쪽이 멈추지 않아서다. 멈추지 못하면 어떤 자극도 결국 마비를 일으킨다.
문제는 자극의 종류가 아니라 멈추지 못하는 마음이다. 도교에서 이를 다루는 방식은 단순하다. 외부의 흐름을 막을 수 없으면, 받아들이는 통로를 좁히는 쪽으로 간다. 노자가 같은 12장에서 시이성인 위복불위목 고거피취차(是以聖人 爲腹不爲目 故去彼取此)라고 한 것이 그 뜻이다. 성인은 배를 위하지 눈을 위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배는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실제 필요를 가리키고, 눈은 바깥에서 끊임없이 들어오는 자극을 가리킨다.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는 내 위가 알지, 광고가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익혀야 하는지는 내 일이 알려주지, 쓰레드가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이 구도에서 보면, 인공지능 도구를 따라 매주 갈아타는 사람들의 행동은 일을 잘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일을 잘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감정을 잠시 가라앉히기 위한 것이다. 새 도구를 손에 쥐는 순간 잠깐 안심이 되고, 그 안심이 사라지기 전에 또 다른 도구를 찾는다. 공짜 토큰을 위해서 , 각종 기기를 사고 그걸 돌리는 사람도 비슷한 구조를 갖는다. 토큰 자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토큰이 비싸서 내가 무언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그런 감각을 메우려는 동작이다. 실제로 그렇게 만든 토큰의 상당 부분은 어떤 결과물도 만들지 못한 채 만료된다. 강의팔이들은 더 위험하다, 사람들의 불안감 초조감을 자극하는 존재들이고, 그들은 불안감을 자신의 이익으로 바꾸지만, 배운다고 무엇이 바뀌지는 않으니까…
본질을 보려면 일단 이 회로 바깥으로 한 발 물러나야 한다. 도교에서 정(靜)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멈춤이 약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장자가 말한 심재(心齋)는 마음을 굶기는 일인데, 정보를 끊고 며칠을 지내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단순한 비유가 아님을 안다. 처음 며칠은 손이 자꾸 화면으로 간다. 일주일쯤 지나면, 그동안 자기가 찾던 것이 정보가 아니라 정보를 찾는 동안의 흥분이었음이 드러난다. 그 흥분을 위해 매일 같은 글을 다른 제목으로 읽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시대에 정보를 완전히 끊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 다만 받아들이는 쪽이 항상 활성화되어 있을 필요는 없다. 하루 중 일정 구간만 정보를 받고, 나머지 시간은 받은 정보를 자기 일에 적용하는 데 쓸 수 있다. 도구를 매주 바꾸는 대신, 한 도구를 충분히 다뤄볼 시간을 주는 것도 가능하다. 단순히 효율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자기가 자기 시간의 주인인지, 아니면 흐름에 끌려가는 객체인지가 여기서 갈린다.
쓰레드에 올라온 글을 다시 떠올려본다. 코덱스를 쓰다가 클로드 코드로 옮기고, 다시 다른 무언가로 옮긴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가 일 년 후에 어떤 모습일지는 알기 어렵지만, 한 가지는 짐작이 간다. 일 년 후에도 그는 또 다른 도구를 두고 같은 글을 쓰고 있을 것이다. 한편, 그 사이에 한 도구를 진득하게 익힌 사람은 글을 쓸 시간이 없다. 그 차이가 결국은 결과를 가른다.
남의 초조감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일종의 기술이다. 그 기술의 핵심은 분별이 아니라 거리다. 이 글이 어떤 상태에서 쓰였는지, 그것을 잠시 멈춰서 느껴보는 일. 그 한 박자가 본인의 판단력을 지키는 마지막 방어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