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편이 본 말의 비밀, 마음은 말에서 가장 먼저 샌다
심상편(心相篇)이 사람의 마음을 읽으려고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자주 지목하는 것은 말이다. 표정도 자세도 아니고 말이다. 사람의 마음은 말에서 가장 빨리 샌다는 것이 심상편의 관찰이다. 천 년 전 도교 학자 진단이 남긴 이 글은 첫 문단부터 말을 짚고, 글 전체에서 말로 거듭 돌아온다.

첫 문단의 구절은 이렇다. 語言多反復 應知心腹無依. 말이 자주 뒤집히는 사람은 곁에 둘 만한 진심이 없다. 그 뒤로도 심상편은 말을 놓지 않는다. 輕口出違言 壽元短折. 가볍게, 마음에 없는 말, 이치에 어긋나는 말을 내뱉는 것이 수명을 깎는다고까지 한다. 처세의 경고치고는 과한 표현인데, 심상편이 말을 그만큼 무겁게 본다는 뜻이기도 하다.
말이 마음의 누수 지점이 되는 이유는 단순하다. 표정은 꾸밀 수 있고 자세는 가다듬을 수 있다. 그러나 말은 분량이 많고 속도가 빠르다. 사람이 하루에 수천 마디를 하는 동안 그 모든 마디를 검열할 수는 없다. 검열을 빠져나간 마디에서 마음이 샌다. 그래서 심상편은 한 마디의 명문장이 아니라 말의 전체적인 결을 본다.
심상편의 관찰 중 가장 날카로운 대목 하나는 큰소리치는 사람에 관한 것이다. 開口說輕生 臨大節決然規避. 입만 열면 목숨을 가볍게 여긴다 말하는 사람은, 정작 큰 고비,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반드시 피한다. 바로 옆 구절도 결이 같다. 逢人稱知己 即深交究竟平常. 만나는 사람마다 지기라 부르는 사람은, 그가 말하는 깊은 사귐이라는 것이 실은 평범하다. 말이 클수록 실물은 작다는 것이다. 선언의 크기와 실행의 크기는 자주 반비례한다.
조직이든 시장이든, 회의에서 가장 비장하게 책임을 말하는 사람과 실제로 곤란한 국면에서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같은 경우는 의외로 드물다. 여기에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 큰 말은 일종의 선납이다. 말로 먼저 값을 치렀다고 느끼면, 행동으로 다시 치를 동기가 줄어든다. 비장한 선언을 끝낸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한 차례 계산이 끝나 있다. 심상편이 큰소리를 경계하는 것은 그것이 거짓이어서가 아니라, 거짓이 아닐 때조차 행동을 미리 소진시키기 때문이다.
심상편은 말의 양과 말의 결을 함께 본다. 喜怒不擇輕重 一事無成. 기쁨과 노여움을 가벼움과 무거움 가리지 않고 다 쏟아내는 사람은 한 가지 일도 이루지 못한다. 笑罵不審是非 知交斷絕.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농담처럼 사람을 깎는 사람은 가까운 벗이 끊어진다. 반대편에는 이런 사람이 있다. 聰明子語言木訥優容. 똑똑한 사람은 오히려 말이 어눌하고 너그럽다. 여기서 어눌함은 능력의 부족이 아니다. 말을 한 번 거른 시간의 흔적이다.
도덕경 5장에 多言數窮 不如守中이라는 구절이 있다.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히니, 가운데를 지키는 것만 못하다. 흔히 말을 줄이라는 처세훈으로 읽히지만, 심상편의 자리에서 다시 보면 결이 다르다. 말을 줄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말이 적은 상태가 마음이 가운데에 있다는 신호라는 것이다. 守中, 곧 중심을 지키는 마음은 밖으로 말이 적게 샌다. 말수는 원인이 아니라 증상이다. 그래서 억지로 말수를 줄여 봐야 마음이 가운데에 없으면 다른 틈으로 샌다.
다만 심상편이 침묵을 떠받드는 것은 아니다. 글 안에는 披肝露膽 決為英傑之人이라는 구절도 있다. 간과 쓸개를 다 드러내 보이는 솔직한 사람이 영걸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말의 양이 아니라 말과 마음의 거리다. 마음에 있는 것을 그대로 말하는 사람은 말이 많아도 새지 않는다. 마음에 없는 것을 말하는 사람은 한 마디만 해도 샌다. 심상편이 보는 것은 입의 부지런함이 아니라 그 거리다.
심상편은 말을 마음의 창이 아니라 마음의 누수로 본다. 창은 일부러 열어 보여 주는 것이고, 누수는 막으려 해도 새는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의 말을 오래 듣다 보면, 그가 보여 주려고 한 것보다 막으려다 못 막은 것이 더 많이 들린다. 지금 누군가의 말을 듣고 있다면, 당신이 듣고 있는 것은 그가 연 창인가, 막지 못한 틈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