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동성이라는 능력 뇌의 기본값과 명리학이 가리키는 AI 시대의 주체성
사람의 뇌는 원래 피동적이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신경과학의 결론이다. 마틴 셀리그먼과 스티븐 마이어가 1967년에 개에게 피할 수 없는 전기 충격을 주고 무기력해지는 현상을 발견한 이후 반세기 동안, 심리학은 피동성이 학습된 것이라고 믿어왔다. 두 사람은 2016년 Psychological Review에 발표한 논문에서 자신들의 50년 전 해석을 공식적으로 뒤집었다. 피동성은 학습되는 것이 아니라 뇌의 기본 반응이라는 것. 지속적인 스트레스 앞에서 등쪽솔기핵의 세로토닌 활동이 도피 행동을 억제하는데, 이것이 포유류 뇌의 디폴트다. 학습이 필요한 쪽은 오히려 반대 방향이다. 내가 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경험이 누적되어야 전전두엽이 등쪽솔기핵의 피동 반응을 억제하기 시작한다. 주동성은 자연 상태가 아니라 쌓아 올린 회로다.

이 뒤집힌 결론이 왜 중요한가. 가만히 두면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직장에 불만이 있어도 바꾸지 않고, 관계에 문제가 있어도 덮고 지나가고, 건강이 나빠져도 병원에 가지 않는 것이 게으름이나 의지박약이 아니라 디폴트 반응이다. 무언가를 하려면 매번 이 기본값을 밀어내야 하고, 그 밀어냄이 반복되어 회로로 굳어져야 비로소 주동적인 사람이 된다. 문제는 이 회로가 어떻게 만들어지느냐다. 알버트 반두라의 자기효능감 이론이 반세기 동안 이 자리를 지켜왔다. 작은 성공, 내가 해냈다는 감각, 결과가 내 행동에서 나왔다는 확인이 쌓여야 한다는 것.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이 덧붙는다. 행위의 결과가 내 것이어야 한다는 감각이다. 학계에서는 이것을 주체감(Sense of Agency)이라 부른다. 남이 시켜서 한 일, 남이 깔아놓은 길을 따라간 일, 시스템이 정해준 선택지 안에서 고른 일은 이 감각을 거의 만들어내지 않는다. 행동은 있었지만 내가 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바로 이 지점을 건드린다. 2026년 3월 Nature Scientific Reports에 실린 연구가 있다. 총 539명을 대상으로 직군별 글쓰기 과제를 수행하게 한 실험인데, 세 조건을 비교했다. 인공지능 없이 혼자 쓰는 집단, 인공지능이 쓴 것을 복사해서 쓰는 수동적 집단, 자기가 먼저 초안을 쓰고 인공지능으로 다듬는 능동적 협업 집단. 수동적으로 인공지능을 사용한 집단은 자기효능감, 작업에 대한 소유감, 의미감이 모두 떨어졌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들의 초기 만족도가 가장 높았다는 것이다. 즐거웠다. 편했다. 그런데 다시 혼자 일해야 하는 상황이 오자 그 이익은 뒤집혔다. 반대로 자기가 먼저 쓰고 인공지능으로 다듬은 집단은 혼자 일한 집단과 거의 같은 심리적 연결을 유지했다. 도구가 같아도 쓰는 방식이 사람을 다르게 만든다는 뜻이다. 편함의 대가로 무언가가 조용히 빠져나간다. 그것이 주체감이다.
이 흐름을 명리학의 틀로 보면 그림이 더 선명해진다. 명리학(命理學)에서 사람의 주동성은 특정한 십신(十神)에서 나온다. 칠살(七殺), 상관(傷官), 겁재(劫財)가 대표적이다. 이 셋은 전통 명리학에서 흉신(凶神)으로 분류되어 왔다. 칠살은 일간(日干)을 직접 공격하는 관성이고, 상관은 정관(正官)을 깨뜨리는 기운이며, 겁재는 재물을 빼앗는 성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흉한 이름들을 뒤집어 보면 주동성의 구조가 드러난다. 칠살은 규범이 누르기 전에 먼저 돌파하려는 힘이다. 상관은 주어진 질서를 의심하고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내려는 기운이다. 겁재는 남의 것을 빼앗는다는 부정적 해석 이면에,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오지 않는다는 직감으로 먼저 움직이는 성질이다. 반면 같은 계열의 정관, 정인(正印), 정재(正財)는 주어진 틀 안에서 성실하게 자기 역할을 다하는 기질이다.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하며 조직에 잘 맞는다. 조선시대 500년이 이런 사람들을 이상형으로 삼았다. 흉신을 가진 사람은 시대와 불화했다. 체제가 만든 길을 따르지 않고 자기 길을 내려 했기 때문이다.
산업화 시대에도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기업 피라미드 안에서 정해진 업무를 정해진 방식으로 수행하는 능력이 생존의 조건이었고, 길을 새로 내려는 사람은 여전히 위험인물로 분류되었다. 칠살, 상관, 겁재가 잘 흐르는 사주를 타고난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는 창업가가 되고 어떤 이는 예술가가 되었지만, 대다수는 조직 안에서 불편한 사람으로 살거나 자기 기운을 쓰지 못한 채 나이를 먹었다. 사주가 주동적이어도 시대가 받아주지 않으면 그 기운은 갇힌다.
지금은 사정이 뒤집혔다. 길을 따라가는 일은 기계의 몫이 되어가고 있다. 규격화된 절차, 정해진 템플릿 안에서 반복되는 작업, 매뉴얼대로 수행하는 서비스는 인공지능과 자동화가 사람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한다. 사람의 몫으로 남는 것은 아직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내는 일, 길이 필요 없는 방식을 고안하는 일, 기존 질서가 놓친 틈을 발견하는 일이다. 틀 안에서 잘하는 능력의 값이 급격히 떨어지고, 틀 자체를 만들어내는 능력의 값이 희소해져서 올라간다. 그러니까 명리학의 용어를 빌리면, 오백 년 동안 흉신이라 불리던 것들이 이 시대에는 희소한 자원이 된 것이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다. 칠살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규칙을 먼저 의심할 줄 알아야 한다. 상관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주어진 방식에 만족하지 않는 감각이 필요하다. 겁재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남이 움직이기 전에 먼저 움직이는 직감이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가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주동성의 실제 내용이다.
그런데 여기서 두 번째 문제가 생긴다. 사주가 주동적인 기질을 주어도, 자기효능감과 주체감의 회로가 훈련되지 않으면 그 기운은 불안이나 분노나 방황으로 새어 나간다. 반대로 피동적인 구조를 타고난 사람도 통제 경험을 쌓고 주체감을 훈련하면 회로를 바꿀 수 있다. 셀리그먼과 마이어가 2016년 논문에서 가장 강조한 것이 이 지점이다. 피동성이 디폴트인 것은 사실이지만 영구적이지는 않다. 전전두엽은 훈련되는 기관이다. 길이 없는 곳에 한 번 길을 내본 사람은, 다음번에 길이 없는 곳에 섰을 때 그냥 서 있지 않는다. 그것이 몸에 새겨진다.
인공지능이 체계적으로 해체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훈련의 기회다. 검색은 기억할 이유를 없애고, 추천은 선택할 이유를 없애고, 생성은 만들어낼 이유를 없앤다. Journal of the Association for Consumer Research에 실린 2024년 논문은 이것을 주체성 이전(agency transference)이라 불렀다. 매개자에게 주체성을 넘기는 것. 넘기면 편하다. 편한데 그 편함의 대가는 자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주동적 기질을 타고난 사람에게는 이 이전이 한층 치명적이다. 타고난 기운을 쓰지 않는 것에 익숙해지면, 그 기운은 녹이 슨다. 흉신이라 불리던 에너지가 시대와 맞아떨어지는 드문 시기에, 정작 본인은 그 기운을 쓸 기회를 알고리즘에 넘겨주고 있는 것이다.
도덕경(道德經) 25장에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이라는 구절이 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여기서 자연은 산천초목이 아니라 스스로 그러함(自然)이다. 도가 도인 이유는 바깥에서 원인을 찾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가 자기의 원인이 되는 상태. 이것이 노자가 도에 부여한 최고의 성질이다. 역으로 말하면, 바깥의 지시를 기다리고 바깥의 알고리즘에 자기 행위의 근거를 맡기는 존재는 도에서 가장 멀다. 주동성의 명리학적 구조와 노자의 이 구절은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것을 가리킨다. 자기 행위의 근원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 그것이 칠살과 상관과 겁재가 그리는 인간상의 원형이고, 도법자연의 도인(道人)이 향하는 방향이다.
시대가 바뀌면 도구가 바뀐다. 그러나 도구를 쓰는 사람의 결은 잘 바뀌지 않는다. 누가 도구의 주인이 되고 누가 도구에 끌려가는지는, 결국 그 사람이 바깥에서 원인을 찾는 존재인지 자기 안에서 원인을 만드는 존재인지에 달려 있다. 오백 년 동안 흉신이라 불리던 기운들이 지금 희소한 자원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