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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을 본 생물은 다 멸종했다 호프만의 적합도 우위 정리와 도덕경 14장

우리가 보는 세계는 진짜가 아니다. 캘리포니아 대학 어바인(UC Irvine) 인지과학과 명예교수 도널드 호프만(Donald Hoffman)이 2010년대부터 정식 논문과 단행본으로 제시한 결론이다. 진화는 진실을 보여주는 감각을 키우지 않았다. 생존에 유리한 환각을 키웠다. 진실을 본 생물들은 거의 다 도태되었다.

호프만은 동료들과 함께 진화 게임 이론(Evolutionary Game Theory)과 베이지안 결정 이론(Bayesian Decision Theory)을 동원해 한 가지 정리를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적합도 우위 정리(Fitness-Beats-Truth Theorem), 줄여서 FBT 정리다. 어떤 환경이 주어지든, 객관적 실재를 정확히 지각하려는 전략은 적합도(fitness)에 맞춰 단순화된 지각 전략에 거의 항상 진다. 진실을 추구하는 관찰자와, 진실은 무시하고 생존 보상에만 반응하는 관찰자를 같은 환경에 풀어놓고 시뮬레이션하면, 후자가 전자를 멸종시킨다. 호프만의 표현 그대로다. 진상을 보려는 종은 진상을 보지 않으려는 종에게 일관되게 패배한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호프만이 말하는 비실재성은 시각이 가끔 착시를 일으킨다는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시간, 공간, 물체, 색깔 자체가 객관 세계의 속성이 아니라 종(種) 고유의 사용자 인터페이스라는 주장이다. 컴퓨터 바탕화면의 파란 사각형 아이콘이 그 안의 파일과 닮은 점이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다. 아이콘은 파일을 정확히 묘사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파일을 효율적으로 다루기 위해 존재한다. 우리의 지각도 그렇다. 진실을 보여주려고 진화하지 않았다. 빠르게 행동을 결정하게 하려고 진화했다.

이 주장이 단순한 철학적 사변이 아닌 이유는 검증 가능한 자연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호주 서부 동가라(Dongara) 지역에 서식하는 보석풍뎅이(Julodimorpha bakewelli) 사례가 가장 자주 인용된다. 수컷은 암컷의 광택 있고 갈색이며 표면이 점점이 패인 날개 덮개를 단서로 짝을 찾는다. 1980년대 무렵 이 지역에 사람들이 다니기 시작하면서 갈색의 광택 나는 맥주병이 길에 버려졌다. 광택, 갈색, 점점이 패인 표면. 수컷 풍뎅이의 인터페이스 안에서 맥주병은 압도적으로 우월한 암컷이었다. 더 크고, 더 반짝였다. 수컷들은 진짜 암컷을 무시하고 맥주병에 매달려 죽을 때까지 교미를 시도했다. 개미들은 그 옆에서 풍뎅이를 산 채로 먹었다. 종이 멸종 직전까지 갔다. 진상을 추적하지 않고 단순한 단서로 적합도를 추적하던 인터페이스가, 환경이 바뀌자마자 종을 위협한 것이다. 호프만의 표현으로는, 인터페이스가 작동하던 생태적 적소가 사라지는 순간 그 인터페이스는 곧 죽음이 된다.

인간이 이 풍뎅이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다는 증거는 없다. 우리가 보는 색이라는 것 자체가 그렇다. 인간 눈의 광수용체는 가시광선 영역, 파장 약 400나노미터에서 700나노미터 사이만 감지한다. 전자기파 스펙트럼 전체에서 보면 극도로 좁은 띠다. 이 좁은 창문 너머에 있는 자외선, 적외선, 전파, X선은 우리 의식 안에서 그냥 없는 것으로 처리된다. 벌은 자외선을 본다. 벌이 보는 꽃의 무늬와 인간이 보는 꽃의 무늬는 다르다. 어느 쪽이 진짜 꽃인지 묻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둘 다 인터페이스다. 시간 감각도 마찬가지다. 시간을 길게 늘려 보는 종이 있고, 짧게 압축해 보는 종이 있다. 파리는 인간보다 시간 해상도가 약 4배 높다고 알려져 있다. 같은 1초가 파리에게는 4초처럼 펼쳐진다. 무엇이 진짜 1초인가.

호프만이 더 멀리 나간 지점은 따로 있다. 그는 현대 물리학이 시공간을 더 이상 근본적인 실체로 보지 않는다는 점을 끌어들인다. 양자장 이론과 일반 상대성 이론을 결합하려는 최근의 시도들에서, 시공간은 더 깊은 어떤 구조에서 창발하는 부산물이라는 견해가 점차 주류가 되고 있다. 시공간이 근본이 아니라면, 시공간 안에서 우리가 보는 모든 물체도 근본이 아니다. 호프만의 표현으로는 시공간은 끝났다. 우리의 일상적 실재 감각이 그 안에 잠겨 있는 인터페이스 위의 풍경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물론 반론도 있다. 어바인의 동료 학자들과 다른 학교의 인지과학자들은 호프만이 진화론과 지각 이론을 너무 강하게 일반화했다고 지적한다. 적어도 부분적인 진실 추적은 적합도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다수설에 가깝다. 다만 호프만이 깨뜨린 것은 다른 차원의 자만이다. 우리가 본 것이 곧 세계라고 믿는 소박한 실재론(Naive Realism)에 대한 가정이다. 그 가정은 더 이상 학문적으로 안전하지 않다.

여기서 도덕경 14장이 묘하게 겹친다.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夷)라 하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 것을 희(希)라 하고,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것을 미(微)라 한다. 노자는 이어서 이 셋은 따져 묻는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此三者 不可致詰. 그리고 이 셋을 합쳐서 하나라 부른다. 그 하나의 모습을 노자는 형상 없는 형상, 사물 없는 형상, 흐릿함이라고 표현했다. 是謂無狀之狀 無物之象 是謂惚恍.

도(道)는 감각으로 잡히지 않는다는 이 진술은 신비주의적 수사가 아니라 인식론적 진술로 읽힌다. 인간의 시각, 청각, 촉각이라는 세 개의 인터페이스 너머에 본질이 있고, 그 본질은 세 인터페이스 어디에도 잡히지 않는다는 것. 잡혔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인터페이스 위의 아이콘이지 본질이 아니다. 호프만이 진화 게임 이론으로 도달한 결론과 노자가 2,500년 전에 적어둔 문장이 같은 자리를 가리킨다.

흥미로운 건 노자가 그다음에 이어 붙인 말이다. 執古之道 以御今之有. 옛 도(道)를 잡고 지금의 있음을 다스린다. 본질에 직접 도달할 수는 없지만, 본질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은 채로 현재의 인터페이스를 운용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진상에 도달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자기가 본 것이 진상이 아님을 아는 채로 살아간다는 태도다. 진상을 본 생물이 다 멸종했다는 사실은, 인간이 진상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투자 시장에서도 같은 구조가 반복된다. 차트 위의 패턴은 시장의 인터페이스다. 차트는 시장이 아니다. 그러나 시장에 직접 접근하는 길이 없으므로 차트를 본다. 그 차트를 시장 자체로 착각하는 순간 보석풍뎅이가 맥주병에 매달리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1998년 LTCM이 그랬고, 2008년의 다수 헤지펀드가 그랬다. 정교한 모델은 그 자체로 시장의 인터페이스이며, 모델이 잘 작동한다는 사실이 모델이 진실이라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환경이 모델의 가정 바깥으로 이동하는 순간, 잘 작동하던 인터페이스가 갑자기 죽음이 된다.

명리학에서 사주(四柱)라는 도구를 다루는 자세도 비슷한 자리에 놓여 있다. 사주는 한 사람의 명(命)과 운(運)을 진실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이 아니다. 60갑자라는 인터페이스 위에 어떤 신호가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지를 읽는 일이다. 그 인터페이스가 본질에 닿아 있다고 보는 것과, 그 인터페이스 자체를 본질이라고 보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후자로 가는 순간 사주는 미신이 된다. 전자로 머무는 순간 사주는 본질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된다. 노자가 말한 흐릿함을 잊지 않은 채로 인터페이스를 다루는 일이다.

호프만의 결론은 어찌 보면 잔인하다. 인간이 자랑하는 모든 인지적 성취가 본질에는 닿지 않았을 가능성, 닿을 수 없게 진화했을 가능성. 그가 자주 인용되는 인터뷰에서 한 말이 있다. 정말 중요한 일은 자기 생각을 믿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자기가 본 것을 진상이라고 우기지 않는 일.

진상을 본 생물은 다 멸종했다는 명제를 거꾸로 읽으면 이런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어떤 진상을 보지 못함으로써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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