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tune

자유의지는 있는가 – 뇌과학 최신 연구와 명리학이 만나는 지점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를 묻는다면, 답은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부분적이고, 자기를 아는 사람에게만 실질적이다. 이것이 뇌과학과 명리학(命理學)이 의외로 같은 지점에서 만나는 결론이다.

1983년 벤자민 리벳(Benjamin Libet)이 발표한 실험은 자유의지 논쟁에 불을 붙였다. 피험자에게 손목을 구부리고 싶을 때 구부리라고 했다. 그리고 움직임 직전의 뇌 활동을 뇌전도(EEG)로 측정했다. 결과는 이랬다. 운동과 관련된 뇌 영역에서 준비전위(Readiness Potential, RP)라는 신호가 발생한다. 이 신호는 사람이 의식적으로 손을 움직이기로 결정했다고 느끼는 순간보다 평균 약 350밀리초 먼저 나타났다. 움직임 자체보다는 평균 635밀리초 먼저였다. 의식적 의도는 움직임보다 겨우 200밀리초 전에 등장했다. 뇌가 먼저 결정하고, 의식은 뒤따라오며 “내가 결정했다”고 믿는다. 이것이 리벳 해석의 핵심이었다. 자유의지는 착각일지 모른다는 이야기다.

이후 40년 동안 이 실험은 복제되고 확장되었다. 2008년 순(Soon)과 헤인즈(Haynes) 연구팀은 기능성자기공명영상(fMRI)으로 피험자의 선택을 최대 10초 전에 예측했다. 2013년 후속 연구에서는 수학 연산의 선택(더하기와 빼기 중 하나)도 4초 전에 예측했다. 이 결과들은 철학자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만약 뇌가 나보다 먼저 결정한다면, 내가 결정했다는 감각은 사후적 환상이 아닌가. 이 입장을 강하게 주장한 것이 샘 해리스, 대니얼 데넷 일부의 논지, 그리고 수많은 대중 과학서였다.

그런데 2012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아론 셔거(Aaron Schurger)가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낸 논문은 준비전위의 해석 자체를 흔들었다. 그에 따르면 RP는 결정을 향해 가는 뇌의 목적 지향적 신호가 아니라, 뇌에서 늘 일어나고 있는 무작위적 배경 변동이 어느 순간 문턱값을 넘은 결과일 수 있다. 비유하자면, 파도가 계속 치는데 가끔 유난히 높은 파도가 생기는 것을 보고 “저 파도가 모래성을 무너뜨리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RP는 결정 이전의 신호가 아니라, 결정이 일어난 순간을 소급해서 설명하는 통계적 가공물에 가깝다.

결정적인 반전은 2019년에 나왔다. 우리 마오즈(Uri Maoz) 연구팀이 eLife 학술지에 발표한 실험은 단순했다. 리벳의 실험에서 피험자가 내리는 결정은 손목을 지금 구부릴까 말까 같은 사소한 결정이었다. 결과가 아무에게도 중요하지 않은 결정, 이유 없이 하는 결정, 즉 임의적(arbitrary) 결정이다. 마오즈는 여기에 판돈이 걸린 실질적 결정을 비교군으로 넣었다. 피험자들은 두 비영리단체 중 어디에 천 달러를 기부할지 골라야 했다. 고른 쪽에 천 달러가 실제로 기부되고, 고르지 않은 쪽에는 한 푼도 가지 않는다. 반면 임의적 조건에서는 양쪽에 각각 오백 달러씩 나뉘어 기부되었고, 피험자는 그냥 아무 버튼이나 눌렀다.

결과는 놀라웠다. 임의적 결정에서는 예상대로 뚜렷한 준비전위가 나타났다. 그런데 숙고된(deliberate) 결정, 진짜로 판돈이 걸린 그 결정에서는 준비전위가 거의 사라졌다. 통계적으로 말하면 임의 결정의 증거 강도는 임의적 결정이 50000배 이상 강했고, 숙고 결정에서는 0에 가까웠다. 마오즈는 이렇게 정리했다. 리벳이 처음부터 숙고된 결정을 연구했다면, 자유의지가 환상이라는 수십 년의 논쟁 자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 지점에서 뇌과학의 이야기와 명리학의 이야기가 겹쳐진다.

사람을 오래 본 경험으로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상당 부분 운대로 산다. 명리학적으로 표현하면 원국(原局)의 기본 세팅과 그 위를 흐르는 대운(大運)의 결이 그 사람의 선택을 사전에 규정한다. 무엇에 끌리는지, 어떤 자리에서 화가 나는지, 어떤 조건에서 욕심이 올라오는지, 사람을 고를 때 어떤 유형을 반복해서 고르는지. 이것들은 대개 본인의 의식적 결정 이전에 배치되어 있다. 사주는 점이 아니라 그 사전 배치의 설명서에 가깝다. 그래서 사주는 들어맞는다. 사람은 자기가 매번 새로 결정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같은 회로를 반복해서 돌린다.

이것이 리벳이 관찰한 임의적 결정의 영역과 닮아 있다. 왜 이 가게에 들어갔는지, 왜 저 사람에게 화가 났는지, 왜 이 종목을 샀는지. 본인은 이유를 댄다. 그런데 그 이유는 뇌의 자동 반응이 끝난 뒤에 의식이 만들어내는 사후적 설명인 경우가 많다. 투자 시장에서 이것을 오래 지켜본 사람은 안다. 본인은 냉정한 분석 끝에 매수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 직전의 감정 상태, 뉴스 헤드라인의 각인, 주변의 잡담이 이미 결정을 끝내놓은 경우가 허다하다. 이후의 분석은 자기 결정을 정당화하는 작업이다. 사주에 드러난 성향이 장이 열릴 때마다 반복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는 없는가. 이것이 핵심 물음이다.

마오즈의 실험은 다른 결론을 시사한다. 판돈이 실제로 걸린 결정, 당사자가 충분히 숙고해서 내리는 결정에서는 준비전위가 사라지거나 크게 약해진다. 이 영역에서는 뇌의 자동 회로가 결정을 먼저 끝내놓지 않는다. 적어도 같은 방식으로는 끝내놓지 않는다. 이것이 뇌과학이 지금 도달한 잠정적 결론의 한 축이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숙고된 결정은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순간, 사람은 숙고하지 않는다. 자동으로 반응한다. 아침에 눈을 뜨고, 휴대폰을 확인하고, 커피를 마시고, 회사로 가고, 동료에게 인사하고, 메일에 답하고, 점심을 먹는다. 이 흐름 속에서 숙고가 끼어들 자리는 거의 없다. 숙고는 특별한 조건을 요구한다. 그 조건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것이 자기에 대한 앎이다.

자기를 모르면, 자기가 지금 자동 반응을 하고 있는지 숙고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화가 난 상태에서 내린 결정을 충분히 생각한 결정이라고 믿고, 사주에 박혀 있는 반복 패턴을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여긴다. 이 상태에서는 자유의지가 있어도 쓸 수 없다. 쓸 자리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덕경(道德經) 71장에 이런 구절이 있다. 知不知 上 不知知 病.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최상이고, 모르면서도 안다고 하는 것이 병이다. 노자가 이 말을 왜 했는가. 앎의 시작이 아니라 앎의 한계를 아는 것이 진짜 앎이라는 뜻이다. 자기가 지금 이 결정을 진짜로 숙고해서 내리고 있는지, 아니면 습관의 관성으로 내리고 있는지, 그 구분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대부분은 관성인 줄 모르고 관성을 쓴다. 이것이 노자가 말한 병(病)이다.

자기를 안다는 것은 자기 사주의 결을 안다는 것이고, 자기 대운이 지금 어느 방향으로 흐르는지 안다는 것이고, 어떤 조건에서 자기가 허술해지는지 안다는 것이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자동 반응이 시작되는 순간을 감지한다. 감지하는 순간, 잠깐의 틈이 생긴다. 그 틈이 자유의지가 작동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리벳 본인도 말년에 이것을 비슷하게 말했다. 뇌가 먼저 결정을 시작할지는 몰라도, 의식은 마지막 순간에 그 결정을 거부할 수 있다. 영어로는 자유거부(Free Won’t)라고 표현했다. 준비전위가 올라오기 시작한 뒤에도 150에서 200밀리초 정도의 거부 가능 구간이 남아 있다는 해석이다.

이 150밀리초가 명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자기 원국을 정확히 아는 사람만 사용할 수 있는 창(窓)이다. 자기가 식신(食神) 과잉의 순간에 쓸데없이 말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는 찰나. 겁재(劫財)의 충동이 올라와 남과 경쟁 구도를 만들려 한다는 것을 감지하는 찰나. 편관(偏官)의 부담을 회피하려고 합리화를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보는 찰나. 그 찰나에서 다른 선택이 가능해진다. 그 이전에는 이미 결정이 끝나 있었다.

그래서 상당수의 사람은 자유의지를 실제로 사용해본 적이 없이 생애를 마친다. 매번 선택했다고 믿지만, 사후적으로 선택의 서사를 편집했을 뿐이다. 사주가 그대로 펼쳐진다. 원국의 결이 대운과 만나 그대로 드러난다. 뇌과학자의 표현으로 하면 자기운전 자동차에 탄 승객인데 자기가 운전하고 있다고 믿는 상태다. 마오즈 본인이 쓴 비유다.

자기를 안다는 것은 그 승객 좌석에서 일어나 운전대를 쥘 수 있게 되는 조건이다. 운전대를 쥐었다고 해서 차가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가지는 않는다. 관성이 있고, 도로의 경사가 있고, 탑승한 승객들의 무게가 있다. 그러나 적어도 커브에서 브레이크를 밟을지 가속할지는 본인이 고를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자유의지가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이다.

자유의지가 있느냐 없느냐는 일반론으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닐지 모른다. 자기를 아는 만큼만 있다고 답하는 편이 사실에 가깝다. 뇌과학은 이 답에 가까워지고 있고, 명리학은 오래전부터 이 답을 다른 언어로 말해왔다. 각자에게 남는 물음은 하나다. 오늘 내가 내린 결정들 가운데 진짜로 내가 내린 것은 몇 개인가.

댓글에 인색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