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sdom

선량함이 지나치면 재앙을 부른다 – 도덕경의 경계, 병리적 이타주의, 그릇의 크기

선량함에도 독이 있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는 것은 아름다운 의도이지만, 그 의도가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경계 없는 선량함은 자기 자신을 갉아먹고, 도우려 했던 상대마저 망가뜨린다. 착한 사람이 왜 손해를 보는지 궁금하다면, 선량함의 방향이 아니라 선량함의 구조를 들여다봐야 한다.

도덕경(道德經) 5장에 이런 구절이 있다. 天地不仁 以萬物為芻狗.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다.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다룬다. 이 구절은 얼핏 냉혹하게 들린다. 그런데 노자가 말하려는 것은 잔인함이 아니다. 하늘과 땅은 특별히 누구를 편애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해가 뜨면 선한 사람에게도 뜨고 악한 사람에게도 뜬다. 비가 오면 좋은 밭에도 오고 나쁜 밭에도 온다. 자연은 선악을 가리지 않고 작동한다. 그런데 사람은 자연과 다르다. 사람은 선악을 가리려 한다. 가리되, 기준이 흔들린다. 상대가 나쁜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별하지 못한 채 무조건 베푸는 것은 선량함이 아니라 분별력의 부재다.

바바라 오클리(Barbara Oakley)라는 공학 교수가 2012년에 옥스퍼드대학교 출판부에서 편집한 책이 있다. 병리적 이타주의(Pathological Altruism)라는 제목의 학술서인데, 31편의 논문이 실려 있다. 오클리의 정의에 따르면 병리적 이타주의란 타인의 안녕을 증진하려는 시도가 예상치 못한 해를 끼치는 행동이다. 이타적 의도가 자기 보존이나 현실적 결과 판단을 압도할 때, 도우려는 행위가 오히려 의존을 키우고, 상대의 나쁜 습관을 방치하며, 선의의 탈을 쓴 채 상황을 악화시킨다. 오클리는 이 현상이 공동의존(Codependency)에서 자살 테러까지, 놀랍도록 넓은 범위에 걸쳐 있다고 지적했다. 다른 사람을 돕겠다는 선한 의도가 어떻게 해악으로 이어지는지를, 심리학, 신경과학, 진화생물학, 사회학의 관점에서 분석한 최초의 종합 학술서였다.

이것을 일상의 언어로 풀면 이렇다. 술 마시는 친구에게 매번 택시비를 대주는 것은 친절이 아니라 술을 더 마시게 만드는 조건이다. 빚을 갚지 않는 가족에게 계속 돈을 빌려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신호다. 남의 일에 나서서 대신 해결해주는 것은 도움이 아니라 상대가 스스로 해결할 기회를 빼앗는 것이다. 한 되의 쌀은 은혜가 되지만 한 말의 쌀은 원수가 된다는 말이 있다. 升米恩 斗米仇. 작은 도움은 고마움을 낳지만, 과한 도움은 당연함을 낳고, 당연함은 결국 원망이 된다.

2020년 Frontiers in Psychology에 게재된 연구가 있다. 컬럼비아대학교의 스콧 배리 카우프만(Scott Barry Kaufman)과 그라츠대학교의 에마누엘 야욱(Emanuel Jauk)이 진행한 것으로, 건강한 이기심(Healthy Selfishness)과 병리적 이타주의(Pathological Altruism)라는 두 가지 역설적 구성 개념을 측정하는 척도를 개발했다. 두 차례의 연구(1차 370명, 2차 891명)를 통해 나온 결과가 흥미롭다. 건강한 이기심 점수가 높은 사람일수록 심리적 안녕감이 높았고, 진정한 친사회적 성향도 강했다. 반면 병리적 이타주의 점수가 높은 사람은 우울, 사회적 두려움, 취약한 자기애(Vulnerable Narcissism)와 강한 연관을 보였다. 연구팀은 병리적 이타주의의 핵심에 거절에 대한 두려움과 통제 상실에 대한 불안이 있다고 분석했다. 겉으로는 남을 위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버림받지 않으려는 절박함이 작동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 연구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건강한 이기심이 이기심의 반대편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건강한 이기심은 자기 욕구에 적절한 경계를 세우면서 동시에 타인에게도 건강하게 도움을 주는 능력이었다. 자기를 돌보는 사람이 오히려 남도 잘 돌본다는 것은 역설이 아니라 구조다. 그릇이 온전해야 물을 담을 수 있다. 깨진 그릇으로 남에게 물을 떠주려 하면 물은 바닥에 흐르고 그릇만 더 깨진다.

내가 제자들에게 늘 이야기하는 것이 우선 나에게 집중해라. 남을 도우려 하지 말고, 그게 이기적으로 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분별력이 없을때는 , 즉 지혜가 부족할때는 선행을 할 능력이 없기에 그렇다.

장자(莊子) 산목편(山木篇)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장자가 산속을 걷다가 가지가 무성한 큰 나무를 보았다. 나무꾼이 그 나무 옆에서 쉬면서도 베지 않았다. 이유를 물으니 쓸 데가 없다고 했다. 장자가 말했다. 이 나무는 재목으로 쓸모가 없기 때문에 제 수명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산을 내려와 옛 친구의 집에 묵었는데, 주인이 기뻐하며 하인에게 거위를 잡으라 했다. 하인이 물었다. 한 마리는 울고 한 마리는 울지 못합니다. 어느 것을 잡을까요. 주인이 답했다. 울지 못하는 놈을 잡아라. 다음날 제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어제 산속의 나무는 쓸모없어서 살았고, 주인집 거위는 쓸모없어서 죽었습니다. 선생님은 어디에 처하시겠습니까. 장자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사이에 처하겠다.

이 이야기에서 장자가 말하려는 것은 처세의 기술이 아니다. 극단에 서지 말라는 것이다. 쓸모가 너무 많으면 잘려나가고, 쓸모가 전혀 없으면 버려진다. 선량함도 마찬가지다. 지나치게 선량하면 이용당하고, 전혀 선량하지 않으면 사람이 떠난다. 사이에 서는 것이 가장 어렵다. 도울 때와 물러설 때를 구분하는 것, 그것이 분별이고, 분별이 있는 선량함만이 오래간다.

25년 넘게 시장에서 관찰한 것이 하나 있다. 남에게 좋은 조건을 만들어주는 데 습관적으로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 거래에서 자기 몫을 줄여서라도 상대에게 양보하는 사람. 처음에는 평판이 좋다. 두 번째도 좋다. 그런데 세 번째부터 상대의 기대치가 올라간다. 양보가 당연한 것이 되고, 한 번이라도 양보하지 않으면 불만이 나온다. 시장에서 이런 사람은 대개 두 가지 결말 중 하나를 맞는다. 에너지가 고갈되어 무너지거나, 어느 순간 폭발하듯 관계를 끊는다. 어느 쪽이든 지속 가능하지 않다. 투자에서도 마찬가지다. 남의 판단을 존중한다며 자기 원칙을 구부리는 순간, 원칙이라는 것 자체가 무너진다. 한 번 구부러진 원칙은 다시 펴지지 않는다.

명리학(命理學)에서 인성(印星)이라는 것이 있다. 정인(正印)과 편인(偏印)을 합쳐서 인성이라 부르는데, 인성은 나를 낳아주고 보호해주는 기운이다. 어머니의 기운, 보살핌의 기운, 베풂의 기운. 인성이 적당히 있으면 사람이 따뜻하고 포용력이 있다. 그런데 인성이 과하면 문제가 생긴다. 지나친 보살핌은 상대의 자생력을 빼앗는다. 과보호가 아이를 무능하게 만드는 것과 같은 원리다. 사주에 인성이 과한 사람은 남의 일을 자기 일처럼 떠안는 경향이 있다. 거절을 못 하고, 부탁을 거절하면 죄책감을 느끼고, 자기보다 남의 사정을 먼저 헤아린다. 마음은 선하지만 구조가 취약하다. 카우프만과 야욱의 연구에서 병리적 이타주의 점수가 높은 사람들이 보인 특성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인성이 과할 때 명리학적으로 필요한 것은 식상(食傷)이나 재성(財星)의 역할이다. 식상은 자기 안에서 밖으로 뻗어나가는 에너지고, 재성은 현실적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에너지다. 인성이 넘칠 때 식상이 빠져주면, 베푸는 에너지가 자기 표현이나 창작으로 전환된다. 재성이 인성을 제어하면, 현실 감각이 생기면서 감정적 베풂에 브레이크가 걸린다. 어떤 기운이든 과하면 독이 된다. 선량함이라는 기운도 예외가 아니다.

남의 일에 함부로 끼어드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것이 있다. 불공평해 보이는 상황에 나서고 싶은 충동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25년 넘게 사람들의 사주를 보면서 관찰한 것 하나가 있다. 어떤 사람에게 닥치는 고난은 그 사람의 기운이 풀려나가는 과정인 경우가 적지 않다. 사주의 흐름이 꼬여 있을 때, 고난을 통해 꼬인 것이 풀리는 것이다. 그 과정에 제3자가 끼어들면 풀리던 것이 다시 엉킨다. 도교에서 말하는 인과(因果)의 흐름에 함부로 간섭하면, 그 인과의 일부를 자기가 떠안게 된다. 남의 짐을 대신 져주는 것이 미덕인 줄 알았는데, 그 짐이 자기 어깨를 부러뜨릴 수도 있다.

선량함이 재앙이 되는 경로는 단순하다. 경계가 없으면 에너지가 새고, 에너지가 새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판단력이 흐려지면 누구를 도와야 하고 누구를 멀리해야 하는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선한 사람에게 선하고 악한 사람에게는 악에 맞서는 것이 진짜 선량함이라는 말은 도덕경에서 직접 나오는 말은 아니지만, 도덕경 5장의 天地不仁이 가리키는 방향과 다르지 않다. 자연은 편애하지 않되,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것에는 보상하고 거스르는 것에는 가차 없다.

결국 문제는 선량함 자체가 아니라 선량함의 구조다. 경계가 있는 선량함은 오래가고, 경계가 없는 선량함은 자기를 태운다. 어디까지가 도움이고 어디서부터가 간섭인지, 그 경계는 아마 각자의 그릇 크기에 따라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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