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준의 금리 인하와 인플레이션 전망
미국 경제가 이상하다. 2025년 3분기 성장률이 연율 4.4퍼센트를 찍었다. 선진국 평균의 두 배가 넘는 수치다. 같은 시기 유럽은 0.2퍼센트, 일본은 오히려 마이너스 1.8퍼센트였다. 한국은 3분기에 1.3퍼센트로 반짝 회복하는 듯했으나 4분기에 다시 마이너스 0.3퍼센트로 역성장했다. 미국만 혼자 질주하고 있다.
트럼프가 케빈 워시를 연준 의장으로 지명했다. 워시는 연준의 부풀어 오른 자산(6.6조 달러)을 대폭 줄이겠다고 한다. 양적완화로 쌓아둔 국채와 모기지 증권을 정리하고, 그 여력으로 금리를 낮추겠다는 것이다. 언뜻 들으면 앞뒤가 안 맞는다. 자산을 줄이면서 금리도 내린다고?
워시의 논리는 단순하다. 인플레이션의 원인이 경기 과열이 아니라 정부가 돈을 너무 많이 찍어낸 데 있다고 본다. 연준이 위기 때마다 양적완화를 남발하면서 시장을 왜곡시켰다는 것이다. 2008년 이전 9천억 달러였던 연준 자산이 2022년에는 9조 달러까지 불어났다. 열 배다.
그런데 워시가 금리 인하를 자신하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인공지능이다. 그는 인공지능이 가져오는 생산성 향상을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물가 하락 요인(disinflationary force)이라고 부른다. 생산성이 1퍼센트 오르면 장기적으로 생활 수준이 두 배가 된다는 게 그의 계산이다.
실제로 미국 경제 성장의 92퍼센트가 인공지능 관련 투자에서 나왔다는 분석이 있다. 스타게이트 프로젝트 같은 대형 AI 인프라에 5천억 달러 이상이 투입되고 있다. 대만의 2025년 성장률이 8.6퍼센트로 치솟은 것도 결국 TSMC를 통한 AI 반도체 수출 때문이다.
한국의 상황은 묘하다. 코스피가 사상 최고치인 5200선을 돌파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AI 메모리 호황에 힘입어 지수를 끌어올렸다. 수도권 부동산 가격도 다시 꿈틀거리고 있다. 자산시장만 보면 나쁘지 않다. 그런데 실물경제는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다. KDI는 2025년 연간 성장률을 0.8퍼센트로 전망했다. 1960년 이후 성장률이 1퍼센트 미만이었던 해가 네 번뿐이다. 2025년이 다섯 번째가 될 가능성이 높다. 자산시장 활황과 실물경제 간 괴리가 심화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금융과 부동산은 온기가 돌지만 실물경제는 차갑다.

더 심각한 것은 미래 성장동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2029년까지 AI, 클라우드, 빅데이터 등 신기술 분야의 인재가 58만 명 부족하다는 전망이 있다. 국내 제조 중소중견기업의 AI 도입률은 0.1퍼센트에 그친다. 미국이 AI 인프라에 수천억 달러를 쏟아붓는 동안 한국은 4800억 원 수준이다. 규모의 차이가 너무 크다. 가계부채도 GDP의 90퍼센트에 육박하며 세계 5위다. 국제결제은행은 한국을 다음 금융위기의 촉발 가능성이 높은 국가 중 하나로 지목했다. 잠재성장률은 현재 1퍼센트대 후반이며 2040년대에는 0퍼센트 내외까지 하락할 전망이다.
돈을 찍어내는 속도와 생산성이 올라가는 속도. 이 둘의 경주가 인플레이션을 결정한다. 연준이 아무리 돈을 풀어도 그보다 빠르게 효율이 올라가면 물가는 오르지 않는다. 오히려 떨어질 수 있다. 워시가 보는 것은 이 지점이다. 인공지능이 돈 찍는 속도를 따라잡거나 앞지를 수 있다는 판단.
밀턴 프리드먼은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화폐적 현상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화폐량만큼 중요한 것이 그 화폐가 도는 경제의 생산 능력이다. 같은 양의 돈이 풀려도 생산량이 두 배로 늘면 물가는 반토막이 난다. 단순한 산수다.
문제는 인공지능의 생산성 향상이 얼마나 빠르고 얼마나 넓게 퍼지느냐다. 지금은 빅테크와 반도체에 집중되어 있다. 하버드의 제이슨 퍼먼은 이런 성장이 지속 가능하려면 다른 산업으로 확산되어야 한다고 경고한다. 골드만삭스의 데이비드 메릭은 그래도 미국이 2.5퍼센트 성장을 유지할 것으로 본다.
유럽은 2010년 이후 21퍼센트 성장했다. 미국은 같은 기간 72퍼센트 성장했다. 세 배가 넘는 차이다. 한국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규제와 경직성 때문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차이는 기술 투자의 규모와 속도에 있다. 인공지능 인프라에서 미국이 압도적으로 앞서 있고, 한국은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의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연준의 체제 전환(regime change)이라는 말이 나온다. 워시는 연준이 위기 대응 기관에서 벗어나 원래의 좁은 역할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후변화나 사회적 형평성 같은 문제에 연준이 개입하는 것은 월권이라는 것이다. 통화 정책에만 집중하고, 나머지는 의회에 맡기라고 한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말했다. 천하신기 불가위야(天下神器 不可爲也). 천하는 신묘한 그릇이라 억지로 다스릴 수 없다는 뜻이다. 연준이 시장을 좌지우지하려 할수록 왜곡이 커진다는 워시의 비판과 닿아 있다.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 억지로 하지 않으면서도 하지 못함이 없다. 시장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본연의 역할에 충실할 때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역설이다.
이 모든 개혁이 성공하려면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인공지능이 약속하는 생산성 혁명이 실제로 일어나야 한다. 연준 자산을 줄이면서 금리도 내리고 인플레이션도 잡는 마법 같은 시나리오는 오직 생산성이 뒷받침될 때만 가능하다. 돈 찍는 기계와 효율 올리는 기계의 경주. 지금까지는 효율 쪽이 앞서고 있다. 한국은 주가가 오르고 부동산이 꿈틀거린다고 해서 경제가 건강한 것이 아니다. 거울 속 모습과 실제가 다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