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sdom

정해진 운명 : 바꿀수 있는가?

중국 송나라 때 이야기다. 청해의 소수민족 수장 농찰이 송에 투항해 조회덕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군왕에 봉해졌다. 그가 죽고 손자가 작위를 물려받아 성도에서 병마금할 직책을 맡았다.

이 조금할은 오랑캐 출신이라 야성을 버리지 못했다. 관아에 살지 않고 대자사라는 큰 절을 점거해 자기 집처럼 썼다. 승려들은 불편해했고, 그는 또 온갖 횡포를 부려 성도가 시끄러웠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싫어했다.

유독 합주 조어산에서 온 지칙이라는 승려만 개의치 않고 그와 잘 지냈다. 왜 그 고승이 조금할의 무례를 참는지 아무도 몰랐다.

어느 날 점술가가 왔다. 털끝만큼도 틀리지 않는다고 소문난 자였다. 그가 말했다. 조금할은 9월, 생일이 지나면 죽는다고.

조금할이 계산해보니 지금이 2월이다. 9월까지 반년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급히 지칙을 찾아가 뻔뻔하게 말했다.

“대사, 들었겠지만 내가 올해 죽는답니다. 스님은 방외의 고인이시니 생사를 하나로 보시지 않습니까. 저 대신 죽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제가 안 죽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지칙이 웃었다. “어려울 것 없습니다. 빈승이 바로 그것 때문에 왔습니다. 다만 한 가지 청이 있으니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청입니까? 할 수 있으면 하지요.”

“군왕께서 성도에 오셔서 절을 점거하시니 불상은 돌보는 이 없어 낡아가고, 정상적인 법회도 열 수 없습니다. 절을 승려들에게 돌려주신다면, 빈승이 어찌 한 목숨을 아끼겠습니까.”

조금할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쉽지, 그리 하겠소.” 그날로 그는 절에서 나왔다.

7일 후 지칙은 대중을 모아 이 일의 전말을 밝히고 조용히 입적했다. 조금할이 직접 다비를 치렀다. 과연 가을이 되어도 그는 무사했다.

이듬해 사천에 조정견이라는 새 제치사가 부임했다. 조금할은 자신이 귀족 자제라 여겨 가마를 타고 대청까지 올라가 참견했고, 태도도 거만했다.

조정견은 신임 관리였다. 마침 본보기 삼을 건방진 놈을 찾던 참이었다. 이 꼴을 보고 즉시 안색이 변했다. “너 같은 작은 금할이 어찌 촉의 수장에게 함부로 구느냐? 군법을 모르느냐?” 당장 잡아 옥에 가뒀다.

조금할이 성도에서 횡포를 부린 지 오래였다. 잡혔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이들이 그의 죄상을 고발했다. 군적 비리만 4백여 건이었다.

조정견은 군법을 엄히 시행하고 부패를 척결하려던 참이었다. 이런 큰 물고기가 걸렸으니 철저히 다스렸다. 조금할과 그의 두 아들은 모두 옥중에서 죽었다.

이때가 이듬해 봄이었다. 지칙이 죽은 지 꼭 1년이 지났다. 그리고 원래 죽기로 예정된 때로부터는 겨우 5개월이 더 지났을 뿐이었다.

이 이야기가 전하는 바가 있다.

대신 죽는 것으로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조금할이 절을 돌려준 것은 분명 선행이었다. 그 공덕으로 5개월을 더 살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정해진 운명은 결국 찾아왔다.

사람들은 개운(開運)을 말할 때 흔히 외부적 방법을 찾는다. 그게 쉬워 보이니까, 옷 색깔을 바꿔 입고, 방위를 바꾸고, 무당에게 굿을 하고, 레이키를 하는 분도 있다. 조금할처럼 아예 다른 사람이 대신 죽어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방법론이 아니다.

조금할은 5개월을 벌었지만 그 5개월 동안 무엇을 했는가. 여전히 오만했고, 여전히 상대를 업신여겼으며, 여전히 자신이 귀족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으로 살았다. 절을 내어준 것은 목숨을 건지려는 거래였지, 진심으로 자신을 돌아본 결과가 아니었다.

그의 인지 수준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운명이란 결국 그 사람의 선택들이 쌓여 만들어진다. 성격이 선택을 만들고, 선택이 습관을 만들고, 습관이 운명을 만든다. 아무리 외부에서 개입해도 그 사람의 인지 구조가 그대로라면, 같은 선택을 반복하고, 같은 결과로 수렴한다.

조금할에게 필요했던 것은 대신 죽어줄 승려가 아니었다. 왜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하는지 돌아보는 것이었다. 왜 관아에 살지 않고 절을 점거해야 했는지, 왜 횡포를 부려야 속이 시원했는지, 왜 새 상관 앞에서 거만하게 굴어야 했는지.

그가 그것을 봤다면, 아마 5개월이 아니라 더 오래 살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설령 똑같이 죽었더라도 적어도 성도 사람들이 경축하며 고발하는 죽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2025년에 살아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운이 나쁘다고 말한다. 타이밍이 안 맞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풍수를 보고, 이름을 바꾸고, 좋은 날을 받아 이사한다. 그것으로 무언가가 바뀌기를 기대한다.

이런것은 작은 것은 개선이 가능할 수 있지만, 큰 것은 바뀌지 않는다. 바뀔 수 없다.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는 한, 같은 기회를 같은 방식으로 놓치기 때문이다. 같은 성격으로 같은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같은 판단력으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런 개운법들은 다 사고와 판단에 영향을 주려는 것이 근본이라는 것이다. 도교의 법사를 하고 사고 방식이 변했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그래서 운명이 변화하는 것이다. 혹은 술법을 하고 나서, 전생의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고, 그것이 현생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서야 정신이 들어서, 내가 뭘하려고 또 태어났구나를 알게 되고, 변화를 추구하게 된다. 이런 정도의 충격이 없다면,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다. 관성대로 살고, 그게 습이라고 불리고, 그게 바로 운명인 것. 수없이 반복되는 운명, 전생에 나라를 팔아 먹은게 아니라, 그냥 그 굴레와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에 반복되는 불운을 경험하고, 더 낮은 자리로 윤회를 반복할때 마다 내려가는 것이다.

진짜 개운은 자기 인지의 한계를 직면하는 데서 시작된다.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왜 저 사람과 부딪혔는지, 왜 그 기회를 잡지 못했는지. 그것을 정직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과정은 고통스럽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고통을 피하려고 외부에서 답을 찾는다. 그리고 그 답이 이뤄지지 않으면, 부적이 문제고, 선택한 방향이 문제고, 고친 이름이 문제라고 믿는 편이 훨씬 쉽다. 그리고 더 나은 존재, 더 잘 보는 사람 등을 찾아서, 테스트를 한다. 스스로 변화하는 것은 어려우니까. 그 스스로 변화하는 것을 “수행”이라고 하는 것이다.

조금할도 그랬다. 자신의 오만함이 문제라는 것을 인정하는 대신, 승려에게 대신 죽어달라고 했다. 절을 돌려주는 것이 자신을 바꾸는 것보다 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5개월밖에 못 벌었다.

지칙이 왜 그를 도왔는지 이야기에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그 승려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사람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래도 중생이니까 할 수 있는 데까지 해주었을 뿐이다.

조금할이 만약 그 5개월 동안 진심으로 자신을 돌아봤다면 어땠을까. 새 제치사 앞에서 겸손하게 예를 갖췄다면. 그동안의 횡포를 사과하고 피해자들에게 보상했다면. 그래서 사람들이 고발장 대신 탄원서를 올렸다면.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결국 정해진 대로 죽었다.

댓글에 인색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