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을 떠나는 것이 탐이다 – 도교와 신경과학이 말하는 현재의 힘
지금 이 순간을 떠나는 것, 그것이 탐(貪)이다.

1분 1초도 허투루 쓰면 뒤처진다고 믿는 시대다. 사람들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할 일 목록에 쫓기고, 이미 지나간 과거의 선택을 곱씹는다. 정작 유일하게 손에 쥘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게 놔둔다. 도교의 관점에서 보면, 지금을 떠나는 그 순간 이미 탐(貪)의 기운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탐착, 과거에 대한 집착. 이 두 가지가 사람을 지금으로부터 끊임없이 끌어낸다. 현재의 노력을 미래의 편안함을 위한 제물로 바치고, 과거의 후회를 현재로 끌어와 갚으려 한다. 노자(老子)는 道德經 제44장에서 知足不辱 知止不殆라 했다. 족함을 알면 치욕이 없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이것은 2,500년 전의 말이지만, 2025년 현재 신경과학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Frontiers in Psychology에 2024년 발표된 MBSR(Mindfulness-Based Stress Reduction) 장기 효과 연구에 따르면, 현재 순간에 주의를 기울이는 호흡 관찰 훈련을 받은 참가자들이 3년이 지난 후에도 내면의 평안함을 유지했다. 현재에 닻을 내린 사람들의 뇌에서는 전두엽 피질(Prefrontal Cortex) 활성이 높아지고 편도체(Amygdala) 반응이 줄어든다는 보고도 있다. 노자가 말한 지족(知足)의 상태가 신경학적으로도 확인되는 셈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르는 것을 게으름이나 현실 안주로 착각한다는 점이다. 밥을 먹으면서 일을 생각하고, 일을 하면서 약속을 떠올리고, 약속 자리에서 다음 일정을 궁리한다. 뜨거운 국을 떠놓고 다음 그릇의 맛을 걱정하는 격이다. 장자(莊子)는 庖丁解牛의 이야기에서 이미 이것을 보여줬다. 백정 포정이 소를 잡을 때 19년간 칼날이 무뎌지지 않은 이유는 기술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매 순간 칼이 지나가는 그곳에만 온전히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신(神)으로 대했다고 한 것은 눈이 아닌 정신으로, 과거의 경험이나 미래의 결과가 아닌 지금 이 뼈와 살의 결 사이에만 존재했다는 뜻이다.
도교에서 말하는 무위(無爲)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인위적으로 미래를 끌어오거나 과거를 붙들지 않는 것이다. 道德經 제16장의 歸根曰靜 靜曰復命이 이것을 말한다.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고요함이라 하고, 고요함을 본성으로의 회복이라 한다. 뿌리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지금 여기,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그 자리다.
투자를 오래 한 사람은 이것을 체감적으로 안다. 시장에서 가장 큰 손실을 만드는 것은 판단의 실수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가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탐착이다. 떨어질 때 과거의 고점을 붙들고, 오를 때 미래의 더 높은 가격을 탐한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워런 버핏(Warren Buffett)이 공포의 한복판에서 골드만삭스에 50억 달러를 투자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의 공포나 미래의 불확실성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가치를 읽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남들이 탐욕스러울 때 두려워하고, 남들이 두려워할 때 탐욕스러워하라. 이 말의 실체는 결국 지금에 머물 수 있는 사람만이 가능한 판단이라는 것이다.
장자는 達生편에서 매미를 잡는 꼽추 노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노인은 장대 끝에 매미를 올리듯 정확하게 잡았는데, 그 비결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천지 사이의 만물 가운데 오직 매미의 날개만 알 뿐이었다고. 온 세상이 사라지고 매미의 날개 하나만 남을 때까지 집중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에 닻을 내린 상태다. 과거를 반추하지 않고, 미래를 계산하지 않고, 오직 이 순간의 매미 날개 하나에 존재하는 것.
도교의 수양서인 太平經에는 守一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하나를 지킨다는 것은 마음을 하나로 모아 흩어지지 않게 한다는 뜻인데, 그 하나란 결국 지금 이 순간이다. 마음이 과거로 가면 회한이 되고, 미래로 가면 불안이 된다. 어느 쪽이든 지금을 떠나는 순간 탐(貪)의 영역에 들어선다. 더 나은 과거를 탐하든, 더 좋은 미래를 탐하든, 그 본질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결핍감이다.
2025년 1월 Frontiers in Psychology에 발표된 대학생 대상 마음챙김 연구에서도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8주간 현재 순간 집중 훈련을 받은 그룹은 스트레스, 불안, 우울 지표가 모두 낮아졌을 뿐 아니라 삶의 만족도와 사회적 지지 체감도가 동시에 올라갔다. 현재에 머무는 훈련이 정서적 안정만이 아니라 관계의 질까지 바꿨다는 것이다. 도덕경이 말하는 致虛極 守靜篤, 즉 비움을 지극히 하고 고요함을 돈독히 지키는 것이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측정 가능한 변화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지금에 머무르라는 말이 미래를 준비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노자는 도덕경 제64장에서 其安易持 其未兆易謀라 했다. 안정되어 있을 때 유지하기 쉽고, 조짐이 나타나기 전에 대비하기 쉽다. 이것은 미래를 대비하되 지금의 안정 속에서 하라는 뜻이다. 미래에 대한 대비와 미래에 대한 탐착은 다르다. 전자는 지금에 뿌리를 둔 채 가지를 뻗는 것이고, 후자는 뿌리를 뽑아 미래로 던지는 것이다.
한나라 초기, 문제(文帝)는 무위지치(無爲之治)로 국가를 다스렸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에 인위적인 개혁을 강요하는 대신 백성이 스스로 회복하도록 놔뒀다. 세금을 낮추고, 간섭을 줄이고, 지금 이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것만 했다. 그 결과가 문경지치(文景之治)라는 태평성대다. 미래의 거창한 청사진을 그리는 대신 지금의 현실에 충실했을 때 오히려 더 큰 미래가 열린 것이다.
설거지를 할 때 물이 손끝을 스치는 감촉, 걸을 때 바람이 머리카락을 건드리는 느낌, 일할 때 생각이 서로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불꽃. 이런 것들이 지금이라는 닻의 실체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불안의 거품은 조용히 사라진다. 道德經 제33장에 知足者富라는 구절이 있다. 족함을 아는 사람이 부유하다. 이것이 재물의 부유함만을 가리키는 말인지, 아니면 그보다 더 근원적인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는 각자의 몫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이 순간, 눈이 글자를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알아차림이 이미 지금에 닻을 내린 것이다. 문제는 이것을 알고 나서도 다시 미래의 할 일 목록으로, 과거의 후회 서랍으로 마음이 달려간다는 데 있다. 장자는 그것을 心齋, 마음의 재계라고 했다. 마음을 비우는 것은 한 번의 깨달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반복해야 하는 수련이라는 뜻이다.
탐(貪)이라는 글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지금(今) 위에 조개(貝), 즉 재물이 올라앉아 있는 모양이다. 지금 이 순간 위에 무언가를 더 얹으려는 마음. 그것이 탐의 구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