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업력 : 대물림되는 고통의 회로와 그것을 끊는 법
가족 업력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 운명이나 팔자를 떠올린다. 집안이 원래 그렇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안 풀린다, 이런 식의 체념이다. 그런데 이 말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운명도 팔자도 아니다. 그것은 세대를 걸쳐 자동으로 작동하는 하나의 시스템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설치되어 있는 일종의 프로그램인데, 아무도 설치한 기억이 없고, 아무도 동의한 적이 없다.

도덕경(道德經)에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이라 했다. 하나의 흐름이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는다. 가족의 기(氣) 역시 이 원리를 따른다. 조부모 세대의 풀리지 않은 감정 하나가 부모 세대에서 둘로 갈라지고, 그것이 자녀 세대에서 셋, 넷으로 불어난다. 집안의 고통은 줄어드는 법이 없다. 누군가 의식적으로 끊지 않으면 갈수록 복잡해질 뿐이다.
이것이 단순한 철학적 비유만은 아니다. 마운트 시나이 의대의 신경과학자 레이첼 예후다(Rachel Yehuda) 박사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와 그 자녀들을 수십 년간 추적 연구했다. 그 결과는 꽤 충격적이었다. 수용소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2세대, 즉 생존자의 자녀들에게서 PTSD와 관련된 스트레스 유전자 FKBP5의 메틸화(Methylation) 패턴이 유의미하게 변화해 있었다. 부모가 겪은 극심한 스트레스가 후성유전학적(Epigenetic) 경로를 통해 자녀의 생물학적 기질 자체를 바꿔놓은 것이다. 특히 어머니가 PTSD를 가진 경우, 자녀의 코르티솔(Cortisol) 수치가 낮고 글루코코르티코이드 수용체 감수성이 높아져 있었다. 쉽게 말하면, 직접 겪지도 않은 고통에 대해 몸이 이미 반응할 준비를 하고 태어난다는 이야기다.
예후다 박사는 9/11 테러 당시 임신 중이던 여성들의 자녀에게서도 유사한 패턴을 확인했다. 세계무역센터 붕괴를 목격한 임산부의 아이들은 코르티솔 대사에서 일반 대조군과 다른 양상을 보였다. 고통은 기억만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세포 수준에서 각인된다.
명리학(命理學)적 관점에서 보면 이 현상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팔자(八字)라는 것 자체가 이미 부모와 조상의 기(氣)적 맥락 위에 태어나는 것이다. 년주(年柱)는 조부모의 기운을 담고, 월주(月柱)는 부모의 기운을 담는다. 사주 원국에 인성(印星)이 과도하게 몰려 있으면서 편인(偏印)이 강한 구조를 가진 사람들 중에 유독 가족 내 감정적 속박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인성은 나를 낳아준 기운인데, 그것이 과도하면 보호가 아니라 억압이 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통제다.
재성(財星)이 약하면서 겁재(劫財)나 양인(羊刃)이 강한 구조에서는 돈을 둘러싼 가족 간 갈등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함께 파이를 키우지 못하고, 있는 것을 서로 빼앗으려는 패턴이다. 이것은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다. 그 가문의 재물에 대한 기(氣)적 패턴 자체가 결핍과 다툼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가족 안에서 반복되는 패턴들을 정리하면 대략 이렇다.
감정 패턴의 경우,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더 억울한지 경쟁한다. 싸움의 목적이 화해가 아니라 자기가 맞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있다. 장자(莊子)의 齊物論에서 말한 是非之彰也, 道之所以虧也, 시비가 드러날수록 도는 그만큼 이지러진다는 구절이 이런 가족 안에서 매일 벌어진다.
관계 패턴을 보면, 경계를 세우면 배신이 되고, 독립하면 버림이 된다. 가족끼리 한 몸처럼 엉키지 않으면 적이 된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공생 관계다. 기생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돈에 대한 패턴은 뿌리가 깊다. 근본적으로 결핍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 그래서 미친 듯이 쓰면서 빈자리를 채우거나, 서로 한 푼이라도 더 가지려고 물어뜯는다.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내겠다는 발상 자체가 불가능하다.
인지 패턴도 있다. 바깥세상은 위험하고, 남은 모두 믿을 수 없다. 동시에 안으로는 모든 가족 구성원의 감정과 인생에 대해 네가 책임져야 한다는 압력이 가해진다. 이것은 이중구속(Double Bind)이다. 밖으로 나가면 위험하고, 안에 있으면 짓눌린다.
가장 교묘한 것은 미완결된 고통의 전이다. 조부모 세대가 풀지 못한 한(恨), 처리하지 못한 원망, 삼키고만 있던 설움이 감정적 빚이 되어 다음 세대로 넘어간다. 내가 이만큼 고생했으니 너도 알아야 한다. 내가 놓지 못한 분노를 네가 이어서 품어라. 이것을 당하는 쪽은 자기가 왜 이렇게 무거운지도 모른다. 태어나기 전부터 짊어진 짐이니까.
도교에서는 이것을 승부(承負)라 한다. 태평경(太平經)에 나오는 개념인데, 선대의 행위가 후대에 영향을 미치는 원리를 말한다. 先人有過失, 負之於後生. 앞 사람의 잘못이 뒷사람에게 넘어간다. 이것은 저주가 아니다. 기(氣)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따르는 물길 같은 것이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풀리지 않은 감정은 세대를 타고 아래로 흐른다.
이런 가족은 사실상 자가 발전하는 소모 장치다. 외부의 적이 필요 없다. 문을 닫아걸고 서로를 소모시키는 것만으로 한 세대가 충분히 마모된다. 그리고 그 마모된 자리 위에 다음 세대가 태어난다.
여기서 핵심은, 이 패턴을 인식하는 것이 누군가를 탓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부모도 피해자였고, 조부모도 피해자였다. 가해자를 찾아봐야 끝이 없다. 중요한 것은 한 가지다. 이것이 나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 이것이 나의 운명이 아니라는 것. 이것은 단지 오래되었을 뿐인, 교체 가능한 프로그램이라는 것.
부모의 불안과 통제는 그들의 과제다. 조부모가 풀지 못한 원한은 그들의 미완결 사건이다. 가족 안의 다툼과 소모는 패턴이 자동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프로그램을 바꾸는 것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가족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그들의 대본대로 연기하지 않으면 된다. 남이 다 그렇게 살았으니 나도 그래야 한다는 전제를 내려놓는 것이다.
이것을 실행하는 사람들 앞에는 보통 하나의 목소리가 찾아온다. 가족이 다 힘든데, 나만 잘 되면 그게 배신 아닌가. 다들 불행한데, 내가 행복할 자격이 있나. 이 목소리야말로 그 오래된 프로그램의 마지막 방어선이다. 시스템이 자기 보존을 위해 보내는 신호다.
도덕경 제76장에 人之生也柔弱, 其死也堅強이라 했다.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죽으면 딱딱해진다. 가족의 오래된 패턴은 이미 딱딱하게 굳은 것이다. 거기서 빠져나와 다시 유연해지는 것은 도망이 아니다. 그것이 오히려 살아 있는 쪽이다.
대물림된 고통의 회로를 자기 대에서 끊는 것. 다음 세대에게 같은 짐을 넘기지 않는 것.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각자가 판단할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