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sdom

장자 서무귀편 교만한 원숭이 이야기, 오왕의 화살이 오늘 우리에게 말하는 것

장자 서무귀편에 나오는 원숭이 한 마리가 화살에 맞아 죽는다. 교만이 부른 죽음이다. 이 이야기는 2천 년이 넘었지만, 오늘날에도 매일 어딘가에서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 능력을 과시하는 자가 그 능력 때문에 멸망하는 구조는, 시대를 가리지 않는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간결하다. 오왕이 배를 타고 강을 유람하다 원숭이 무리가 사는 산에 올랐다. 무리는 왕을 보자 놀라 흩어져 가시덤불 속으로 숨었다. 그런데 한 마리만 달랐다. 가지 사이를 펄쩍펄쩍 뛰어다니며 자기 재주를 뽐냈다. 오왕이 활을 쏘자 그 화살을 날렵하게 낚아챘다. 재주가 좋으니까. 오왕이 좌우에 명하여 일제히 쏘게 했다. 원숭이는 죽었다. 오왕이 곁의 안불의에게 말했다. “이 원숭이는 자기 재주를 뽐내고 민첩함을 믿고서 내 앞에서 교만하게 굴다가 이렇게 죽었다. 경계하라. 네 지위를 가지고 남 앞에서 교만하게 굴지 말라.” 장자 잡편 서무귀에 실린 이 우화의 핵심은 명쾌하다. 드러냄은 곧 과녁이 된다.

도덕경 9장에 持而盈之 不如其已라 했다. 가득 채워서 들고 있느니 차라리 그만두는 것이 낫다. 노자가 말한 겸하(謙下)와 유약(柔弱)의 도리는 처세의 기술이 아니라 천지의 이치에 가깝다. 물은 아래로 흐르기에 바다가 되고, 곡이 비어 있기에 소리가 울린다. 가득 찬 것은 반드시 기울고, 드러난 것은 반드시 꺾인다. 노자는 이것을 富貴而驕 自遺其咎라 했고, 장자는 直木先伐 甘井先竭이라 했다. 곧은 나무가 먼저 베이고, 단 우물이 먼저 마른다. 능력이 있되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왜 어려운가. 사람의 본성 때문이다. 인정받고 싶고, 존재감을 증명하고 싶다. 그래서 드러낸다. 그리고 그 드러냄이 정확히 자신을 겨누는 화살이 된다.

역사에서 이 패턴은 반복된다. 항우는 당대 최강의 무장이었다. 力拔山兮氣蓋世. 산을 뽑고 세상을 덮을 기세였다. 거록 전투에서 진나라 주력군을 격파한 뒤 그의 위세는 천하를 압도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홍문연에서 유방을 놓아준 것은 자비가 아니라 교만이었다. 자신의 무력이면 언제든 다시 잡을 수 있다고 여겼다. 범증의 간언을 무시한 것도, 관중에 도읍하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팽성으로 돌아간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기 항우본기에 따르면, 그가 한 말이 걸작이다. “부귀하고서 고향에 돌아가지 않으면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 것과 같다.” 천하의 전략적 요충지보다 고향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했다. 결국 해하에서 포위되어 오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도 此天之亡我 非戰之罪也라 했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싸움의 잘못이 아니라고. 끝까지 자기 교만을 보지 못한 것이다.

이런 패턴은 비단 고대사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2007년 노키아는 세계 휴대폰 시장 점유율 40%를 차지한 절대 강자였다. 핀란드 수출의 20%, 법인세의 23%를 책임지던 나라의 심장과도 같은 기업이었다. 같은 해 애플이 아이폰을 출시했을 때, 노키아 경영진은 이를 ‘비싼 가격에 배터리도 약한 틈새 제품’이라 봤다. 내부 보고서에서는 아이폰의 UI가 혁신적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40%라는 숫자가 만들어낸 자신감이 판단을 가렸다. 2011년 새로 부임한 스티븐 엘롭이 직원들에게 보낸 메일의 제목이 상징적이다. ‘불타는 플랫폼’. 그러나 그것은 이미 수년간 타오르고 있던 불길 위에서 뒤늦게 지른 비명이었다. 노키아는 자체 운영체제 심비안과 미고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마이크로소프트 윈도폰에 올인했지만 소비자는 외면했고, 2013년 72억 달러라는 값에 휴대폰 사업부를 매각해야 했다. 2007년 1073억 달러였던 시가총액은 4년 만에 4분의 1로 쪼그라들었다.

위워크(WeWork)의 애덤 뉴먼도 같은 종류의 원숭이였다. 2019년 기업가치 470억 달러를 평가받으며 ‘세상의 의식을 높이겠다’고 선언하던 그는, 기업 공개를 위해 재무 서류를 제출하자마자 실체가 드러났다. 2018년 매출 18억 달러에 영업손실 17억 달러. 번 돈과 잃은 돈이 거의 같았다. 게다가 그는 자기 소유 건물을 회사에 임대하여 수익을 챙기고, 회사명을 바꾸면서 상표권료 600만 달러를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기업가치는 470억 달러에서 100억 달러로, 다시 상장 후 시가총액 3억 달러 수준으로 추락했고, 2023년 11월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주가는 83센트. 처음의 99.96%가 증발한 것이다. 뉴먼은 그 와중에 소프트뱅크로부터 17억 달러의 퇴직 보상을 받고 떠났다. 그 돈으로 새 사업 ‘Flow’를 시작했는데, 어디서 많이 본 패턴이다.

이런 거대한 몰락 이야기만이 교만의 전부는 아니다. 일상에서도 그 원숭이는 살아 있다. 회의실에서 자기 공로를 은근히 과시하는 사람, 모임에서 아이 자랑과 집값 이야기를 빼놓지 않는 사람, 소셜미디어에 정성껏 포장한 일상을 올리는 사람. 이것들이 모두 장자가 말한 ‘재주 뽐내기’의 현대판이라면 지나친 말일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구조가 같으니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드러냄을 만들고, 드러냄이 누군가의 시선을 끌고, 그 시선이 화살이 된다. 소셜미디어 시대에 이 구조는 더욱 가속화된다. 과시의 무대가 넓어진 만큼,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도 사방이 된 것이다.

도덕경 76장에서 노자는 人之生也柔弱 其死也堅強이라 했다.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으면 딱딱하고 강하다. 부드러움이 삶이고, 딱딱함이 죽음이다. 유약(柔弱)이란 나약함이 아니다. 물이 바위를 뚫는 것처럼, 드러내지 않으면서 스며드는 것이다. 利萬物而不爭. 만물을 이롭게 하되 다투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이 왜 그토록 어려운가 하면, 사람에게는 자기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는 근원적인 조급함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작은 성공을 거둔 직후가 가장 위험하다. 화살 한 대를 잡아챈 원숭이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다른 원숭이들은 가시덤불 속에 숨어 살아남았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숨는 것만이 답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세상에는 나서야 할 때도 있고, 자기 역량을 보여야 하는 순간도 있다. 다만 그 경계가 어디인지,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가시덤불 속인지 오왕 앞의 나뭇가지 위인지, 그것을 분별하는 것이 결국 한 사람의 역량이기도 하다. 장자가 이 이야기를 서무귀편에 넣은 것은, 서무귀가 위나라 무후에게 “당신의 정신과 육체를 위로하러 왔다”고 말하는 맥락 속에서다. 위로라는 것이 달콤한 말이 아니라, 진실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는 뜻이다. 2천 년 전 원숭이 한 마리의 죽음이 오늘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아마도 우리 각자의 안에 그 원숭이가 살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댓글에 인색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