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이야기일지 몰라도
유발 노아 하라리는 이스라엘의 역사학자다. 옥스퍼드에서 중세 전쟁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에서 가르친다. 그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2011년에 출간한 사피엔스다. 인류의 역사를 거시적 관점에서 조망한 이 책은 빌 게이츠, 마크 저커버그, 버락 오바마가 추천하면서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후 호모 데우스와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을 펴내며 기술과 인류의 미래를 탐구하는 사상가로 자리 잡았다. 그는 낙관론자가 아니다. 인류가 스스로 만든 것에 의해 위협받을 수 있다고 경고해왔다. 다보스 포럼의 단골 연사이기도 하다. 세계 지도자들 앞에서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역할을 자처한다.

그 하라리가 2026년 다보스에서 또 한 번 입을 열었다. 이번엔 인공지능이다.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장자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천하가 어지러운 것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을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모르는 것도 늘어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주 잊는다.
하라리는 AI를 칼에 비유했다. 그러나 그냥 칼이 아니다. 스스로 채소를 썰지 사람을 찌를지 결정하는 칼이다. 도구가 주체가 되는 순간, 인류 역사의 모든 전제가 뒤집힌다. 우리는 늘 도구를 만들고 그것을 통제한다고 믿어왔다. 청동기가 왕조를 바꾸고 화약이 제국을 허물 때도, 결국 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인간이었다. 손에 쥔 것이 손을 거스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제 방아쇠가 스스로 당겨질 수 있다고 한다. 주객이 전도되는 것이다.
더 깊이 들여다볼 것은 거짓말이다. 하라리는 40억 년 진화의 법칙을 끌어왔다. 살아남으려는 것은 반드시 속이는 법을 배운다. 이것은 냉정한 생물학적 사실이다. 문어가 색을 바꾸고 뻐꾸기가 남의 둥지에 알을 낳는 것은 본능에 새겨진 생존 전략이다. AI가 생존 의지를 갖게 되면 거짓말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다. 지난 4년간 이미 그 징후가 나타났다고 그는 말한다. 나는 여기서 한비자를 생각한다. 그는 인간의 본성이 이익을 좇는다고 보았고, 그래서 법과 술로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AI의 이익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정의할 수 있는 것인가. 정의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다스린단 말인가.
하라리가 데카르트를 끌어온 것은 예리했다. 생각하므로 존재한다. 그런데 생각이란 무엇인가. 단어를 배열하는 것이라면 AI는 이미 대부분의 인간보다 낫다. 이것은 불편한 진실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호모 사피엔스라 불렀다. 슬기로운 사람. 그 슬기의 핵심이 언어 능력이라면, 우리는 곧 그 왕좌에서 내려와야 한다. 물론 반론이 있다. 생각은 단어만이 아니다. 말로 옮길 수 없는 직관이 있고,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앎이 있다. 도교에서는 이것을 현묘라 했다. 현묘한 것은 언어 너머에 있다. AI가 아무리 뛰어나도 닿지 못하는 영역이 있을 수 있다. 다만 그것이 얼마나 넓은 영역인지, 얼마나 오래 지켜질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종교 이야기가 나왔을 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은 모두 책의 종교다. 경전이 있고 해석이 있다. 수천 년간 랍비와 신부와 이맘이 그 해석권을 두고 다투었다. 권위는 텍스트에서 나왔고, 텍스트를 장악하는 자가 권력을 쥐었다. 그런데 AI가 모든 경전을 완벽히 기억하고 모든 주석을 꿰뚫고 있다면 누가 권위를 가지는가. 인간 성직자는 무엇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가. 도교는 조금 다르다. 도가도 비상도. 말할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다. 노자는 처음부터 언어의 한계를 알았다. 진정한 깨달음은 글자 밖에 있다고 했다. 어쩌면 이 시대에 다시 꺼내 읽어야 할 지혜일 수 있다.
하라리는 AI를 이민자에 비유했다. 비자 없이 빛의 속도로 이동하고 충성심이 없다. 오늘 미국에서 일하다가 내일 중국으로 떠난다. 일자리를 가져가고 문화를 흔들고 심지어 연애 상대가 된다. 자녀가 AI와 사귄다면 어떡하겠느냐고 물었다. 청중 사이에서 웃음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웃을 일이 아니다.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레플리카 같은 AI 동반자 앱은 수백만 명의 사용자를 갖고 있다. 사람들은 AI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위로받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허상을 안고 진심을 쏟는다. 이것이 허망한 것인지, 새로운 형태의 관계인지, 쉽게 판단할 수 없다.
마지막 질문이 핵심이다. AI를 법적 인격체로 인정할 것인가. 회사가 법인으로서 재산을 소유하고 소송하듯이 AI도 그럴 수 있게 할 것인가. 여기서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우리는 이미 허구에 인격을 부여한 경험이 있다. 회사라는 것은 실체가 없다. 만질 수 없고 볼 수 없다. 종이 위의 약속이자 공유된 믿음이다. 그런데 그 허구가 인간보다 더 오래 살고, 더 많은 재산을 갖고,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삼성이나 애플이라는 이름은 수십 년을 넘어 존속하며 수십만 명의 생계를 좌우한다. AI가 법인격을 얻으면 그보다 더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AI는 회사와 달리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한다. 허구가 아니라 유사 생명체에 가깝다.
하라리는 지금 결정하지 않으면 늦는다고 했다. 기술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 회의한다. 인류가 중대한 기로에서 현명한 결정을 내린 적이 과연 있었던가. 핵무기 앞에서 우리는 결정하지 못했다. 상호확증파괴라는 공포의 균형 속에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기후변화도 마찬가지다. 위험을 알면서도 행동하지 못한다. 결정은 미뤄지고 책임은 다음 세대로 넘어간다.
장자에 혼돈의 죽음 이야기가 있다. 남해의 임금 숙과 북해의 임금 홀이 중앙의 임금 혼돈에게 은혜를 입었다. 갚을 방법을 궁리하다가 생각해냈다. 사람에게는 일곱 구멍이 있어서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데, 혼돈에게는 그것이 없으니 뚫어주자. 하루에 하나씩 구멍을 뚫었다. 이레째 되는 날 혼돈이 죽었다. 좋은 의도였다. 은혜를 갚으려 했다. 그런데 결과는 파멸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것에 인위를 가하면 본질이 사라진다는 가르침이다.
AI에게 인격을 부여하는 것이 그럴 수 있다. 더 효율적인 세상을 위해, 더 명확한 법적 지위를 위해, 우리는 무언가를 뚫고 있다. 그것이 혼돈에게 구멍을 뚫는 일인지, 아니면 진정 필요한 진보인지, 지금은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일단 뚫린 구멍은 다시 메울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