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sdom

돈과 정부: 신뢰의 역설

돈이라는 것은 참 묘한 존재다. 손에 쥐고 있을 때는 내 것 같지만,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 소유권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깨닫게 된다.

1933년 미국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은 행정명령 6102호를 발동했다. 대공황의 수렁에서 경제를 살리겠다는 명목이었다. 모든 시민이 보유한 금을 온스당 20.67달러에 정부에 팔도록 강제했다. 거부하면 10년 징역이나 1만 달러 벌금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금을 다 거둬들인 직후, 정부는 금 가격을 35달러로 재평가했다. 국민들의 자산 가치 41%가 하룻밤 사이에 정부 금고로 옮겨간 셈이다. 1946년 일본은 더 노골적이었다. 패전 후 막대한 국채를 갚을 방법이 없던 정부는 전 국민의 예금을 봉쇄해버렸다. 통장에서 돈을 뺄 수 없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9개월 뒤, 부동산과 예금에 25%에서 최고 90%까지 재산세를 부과했다. 수십 년간 모은 돈이 몇 달치 월급으로 쪼그라들었다는 당시 증언이 남아 있다. 오늘날 일본 노인들이 은행을 불신하고 현금을 집에 보관하려는 습성은 이 역사에서 비롯되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1953년 한국전쟁 직후 화폐개혁을 단행하면서 전체 예금의 24%를 동결했다. 1962년 박정희 군사정부는 퇴장자금을 끌어내겠다며 더 강력한 예금 봉쇄 조치를 취했다. 현금과 예금을 동결하고 누진율에 따라 봉쇄계정으로 묶어버렸다. 시중 유동성이 고갈되어 중소기업들이 연쇄 도산하자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백기를 들었지만, 국민 재산에 손을 댈 수 있다는 선례는 남았다. 중국의 경우는 규모가 다르다. 1949년 공산당 집권 이후 토지와 산업 전체를 국유화했다. 100만에서 200만 명에 달하는 지주들의 땅을 몰수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베이징에서만 8만 5천 명이 쫓겨나고, 3만 3천여 가구의 재산이 몰수되었다. 상하이에서는 자본가 10만 가구가 털렸다. 지주라는 딱지가 붙으면 재산은 물론 목숨까지 잃었다. 오늘날에도 중국에서 토지의 영구 소유권은 인정되지 않는다. 70년 사용권을 살 뿐이다. 그 70년이 끝난 후 임대료를 얼마나 받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2013년 사이프러스에서는 EU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10만 유로 초과 예금의 47.5%를 강제로 깎아버렸다. 은행에 돈을 맡겨둔 것만으로 절반 가까이를 잃은 것이다. 2016년 인도에서는 모디 총리가 갑자기 500루피와 1000루피 지폐의 통용을 금지시켰다. 검은 돈을 뿌리 뽑겠다는 명분이었지만, 새 지폐가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벌어진 이 조치로 현금을 구하지 못해 전 재산을 날린 사람들이 속출했다. 일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베네수엘라에서는 차베스와 마두로 정권 아래 산업과 토지가 국유화되었고, 400억 달러 규모의 국가 자산이 실종되었다. 짐바브웨에서는 무가베 정권이 백인 농장주 토지를 몰수했고, 뒤이은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시민들의 저축은 휴지 조각이 되었다. 아르헨티나는 2008년 사적 퇴직연금 계좌를 국유화해버렸다. 안전을 위한 조치라는 설명이었다.

이 사례들을 늘어놓는 것은 정부를 불신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정부가 악하다거나 음모를 꾸민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다만 한 가지 사실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정부는 정의가 아니다. 정부는 선도 아니다. 정부는 그저 정부일 뿐이다. 특정한 시점에 특정한 사람들이 운영하는 거대한 기구다. 그 기구는 때로 국민을 보호하고, 때로 국민의 재산을 가져간다. 상황에 따라, 필요에 따라, 그리고 그 시점의 권력자들의 판단에 따라.

도덕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아서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 이것은 하늘이 악하다는 뜻이 아니다. 하늘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그저 하늘일 뿐이다. 정부도, 시장도, 금융 시스템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당신의 편이 아니다. 그렇다고 당신의 적도 아니다. 그저 그것들일 뿐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들에 선악의 옷을 입힌다는 데 있다. 민주주의는 선하다, 시장경제는 효율적이다, 법치주의는 공정하다. 이런 믿음들이 위험한 것은 거짓이어서가 아니다. 부분적으로는 사실이기도 하다. 위험한 것은 그 믿음이 절대적 신뢰로 굳어질 때다. 절대적 신뢰는 사유를 멈추게 한다. 사유가 멈추면 대비도 멈춘다.

사실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종교도 그렇고, 전문가도 그렇고, 언론도 그렇다. 심지어 가족이나 친구도 마찬가지다. 세상 그 어떤 것도 절대적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것은 냉소가 아니다. 오히려 성숙한 인식이다. 노자가 말한 성인불인(聖人不仁)의 경지다. 성인은 어질지 않다. 특정 대상에 치우친 애정을 두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만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미국 전 연준 의장 재닛 옐런은 최근 정부 부채 증가가 중앙은행의 대응 능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 국가 부채는 38.4조 달러에 달하며 트럼프 행정부 첫 해에만 2.25조 달러가 늘었다. JPMorgan은 미국 부채를 시한폭탄에 비유했고, 의회 예산국은 부채 이자 비용 증가가 저소득층에 더 큰 타격을 줄 것이라 전망했다. 여론조사에서 82%의 유권자가 부채 문제를 심각하게 본다고 답했지만, 해결책은 요원하다. 이 경고들이 현실이 될지 아닐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역사가 보여주는 패턴은 있다. 위기가 오면 정부는 국민의 재산에 손을 댄다. 금을 압수하든, 예금을 봉쇄하든, 세금을 급격히 올리든, 화폐 가치를 떨어뜨리든. 명목은 늘 그럴듯하다. 경제 안정, 부정부패 척결, 국가 재건. 그러나 결과는 대체로 비슷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금을 사라는 것도 아니고, 비트코인을 사라는 것도 아니고, 해외로 도피하라는 것도 아니다. 그런 구체적인 조언은 또 다른 형태의 맹신을 낳을 뿐이다. 금이 안전하다는 믿음, 암호화폐가 탈중앙화되어 있다는 믿음, 특정 국가가 더 안전하다는 믿음. 이것들도 결국 같은 함정이다.

진짜 필요한 것은 자신의 지혜를 높이는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역사를 공부하고, 경제를 공부하고, 권력의 작동 방식을 공부하는 것이다. 남의 말을 듣되 맹신하지 않는 것이다. 정부의 선전도, 금융회사의 광고도, 전문가의 조언도, 심지어 이 글도 마찬가지다. 모든 정보는 검증의 대상이지 신앙의 대상이 아니다.

장자는 말했다. 지인무기 신인무공 성인무명(至人無己 神人無功 聖人無名). 지극한 사람은 자기가 없고, 신묘한 사람은 공적이 없고, 성인은 이름이 없다. 자기가 없다는 것은 고정된 자아, 고정된 믿음, 고정된 관점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상이 변하면 함께 변한다. 상황이 바뀌면 대응도 바뀐다. 어제의 안전자산이 오늘의 위험자산이 될 수 있다. 어제의 믿음직한 제도가 오늘의 수탈 도구가 될 수 있다.

결국 자신을 구원하는 것은 자신뿐이다. 어떤 제도도, 어떤 국가도, 어떤 이념도 당신을 대신해서 당신의 삶을 지켜주지 않는다. 그것들은 도구일 뿐이다. 도구는 잘 쓰면 유용하고, 맹신하면 위험하다. 2013년 사이프러스의 은행에 돈을 맡긴 사람도, 1946년 일본에서 성실하게 저축한 사람도, 1933년 미국에서 금을 모은 사람도, 문화대혁명 시기 중국에서 재산을 가지고 있던 사람도 아마 비슷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은행은 안전하다, 정부는 지켜줄 것이다, 법은 내 편이다.

세상에 절대적 안전이란 없다. 다만 깨어 있는 자에게는 대비할 시간이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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