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sdom

이해받지 못할 권리, 미움받을 권리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고 생각한다.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어떤 직업을 가질지, 누구와 시간을 보낼지. 물론 이것조차 모르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 선택들이 정말 자신에게서 나온 것인지 불분명하다는 사실이다.

한국 사회에는 보이지 않는 시간표가 존재한다. 대학은 20대에 졸업해야 하고, 취업은 20대 중후반에 해야 하며, 결혼은 30대 초반이 적당하다는 암묵적 합의. 물론 어학연수 이런것을 하는 사람들, 스펙 쌓기가 보편화 되면, 이 시간표도 변화하지만, 어쨌든, 남들이 하면 다 따라간다. 그리고 이 시간표에서 벗어나면 사람들은 불안해한다. 본인이 불안한 것인지, 주변이 불안해하는 것을 보고 불안해지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2019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한국 청년의 약 60%가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원하지 않는 선택을 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중 상당수가 자신의 선택이 타인의 기대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의무교육이라는 제도를 보자. 모든 아이는 같은 나이에 같은 교실에 앉아 같은 내용을 배운다. 누군가는 수학에 재능이 있고, 누군가는 그림에 재능이 있지만, 시스템은 모두에게 동일한 것을 요구한다. 평가 기준도 하나다. 이 과정을 거치며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학습한다. 나는 다른 사람과 같아야 한다고.

직장 생활도 마찬가지다. 회사는 “우리 회사 사람은 이래야 한다”는 문화를 만든다. 옷차림, 말투, 업무 처리 방식까지. 처음에는 어색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진다. 좋은 회사는 회사내에 공통으로 쓰는 자기만의 언어가 존재한다. 그렇게 십수년, 이삼십년을 다니다 보면, 본인이 회사를 떠나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고 깨닫는다. 내가 회사에 맞춰진 것인지, 회사가 나를 변화시킨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을.

심리학에서는 이를 동조(conformity) 현상으로 설명한다. 솔로몬 애쉬(Solomon Asch)의 1951년 실험은 유명하다. 명백히 다른 길이의 선을 보여주고 어느 것이 같은지 물었을 때, 주변 사람들이 틀린 답을 말하면 실험 참가자의 약 75%가 적어도 한 번은 집단의 틀린 답을 따라 말했다. 자신의 눈보다 집단의 판단을 신뢰한 것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유사성-매력 효과(similarity-attraction effect)다.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선호한다. 같은 취향, 같은 가치관, 같은 생각. 다름은 불편하다. 이해하려면 에너지가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타인을 자신과 비슷하게 만들려 한다. 조언이라는 이름으로,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네가 이렇게 하면 어떻게 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

이 말 속에는 진짜 걱정도 있지만, 동시에 요구도 있다. 너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어야 한다는.

문제는 이 과정이 너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아무도 강제하지 않는다. 그저 주변을 보고 배운다. 다들 이렇게 사니까 나도 이렇게 해야겠지. 다들 이걸 좋아하니까 나도 좋아해야겠지. 그렇게 천천히, 조용히, 자신을 잃어간다.

70대 노인을 대상으로 한 호주의 한 연구에서 가장 많이 나온 후회가 있었다. “다른 사람이 기대하는 삶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진실한 삶을 살 용기를 내지 못한 것.” 인생의 끝에서야 사람들은 깨닫는다. 내가 진짜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내가 진짜 내린 결정이 몇 개나 되는지.

직장을 선택할 때, 정말 내가 하고 싶어서 선택했나? 아니면 안정적이라고, 부모님이 좋아하실 것 같아서, 친구들이 부러워할 것 같아서?

결혼을 결심할 때, 정말 이 사람과 함께하고 싶어서였나? 아니면 나이가 되어서, 주변에서 재촉해서, 혼자 있으면 이상하게 볼 것 같아서?

취미를 선택할 때조차, 정말 내가 좋아해서인가? 아니면 요즘 유행이라서, SNS에 올리면 좋아 보일 것 같아서?

도교에서 말하는 수행(修行)의 본질은 자기 회복이다. 잃어버린 본성(本性)을 되찾는 것. 장자(莊子)는 “천하가 모두 옳다 해도 스스로를 더하지 않고, 천하가 모두 그르다 해도 스스로를 덜지 않는다”고 했다. 수행이란 타인의 평가와 무관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반대로 산다. 타인이 옳다 하면 기뻐하고, 타인이 그르다 하면 흔들린다. 타인의 이해를 구하고, 타인의 인정을 원한다. 그러다 정작 자신은 사라진다.

수행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고독하다. 다른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길을 가야 할 때가 온다. 주변이 모두 오른쪽으로 갈 때 왼쪽으로 가야 할 수도 있다. 그때 사람들은 묻는다. “왜 그렇게 해? 다들 이렇게 하는데?”

이해받지 못한다고 멈출 것인가. 미움을 받는다고 포기할 것인가.

타인의 미움이나 이해 부족은 내 과제(課題)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과제다. 내 과제는 내가 가야 할 길을 가는 것이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든, 그것으로 내 선택이 바뀐다면, 그건 내 삶을 존중하는 태도가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진정한 자기다움은 타인에게 불편함을 준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에게 정직하지 못했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누군가 용기 내어 자기 길을 가면,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묻게 된다. “나는 왜 못했을까?”

그 질문이 불편해서 사람들은 공격한다. 비난한다.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당신의 문제가 아니다.

당신에게는 이해받지 못할 권리가 있다. 미움받을 권리가 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길을 갈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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