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oist cultivation

타인을 마음에 두라

불교와 도교 모두 보시(布施)를 이야기한다. 타인에게 베푸는 것, 나누는 것. 어떤 스님은 말했다. “현대인은 너무 자기에게만 집중한다. 타인을 보지 않는다.” 이 말은 맞는 것처럼 들린다. 실제로 거리를 걸으며 사람들을 관찰해보면 대부분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 옆 사람이 넘어져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는 걸까?

서울의 한 직장인은 하루 평균 3시간을 SNS에 쓴다. 남들이 무엇을 먹었는지, 어디를 갔는지, 무엇을 샀는지 본다. 그리고 자신도 올린다. 어떤 사진이 좋아요를 많이 받을지 계산하며. 이것이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인가? 아니면 타인의 시선에 집중하는 것인가?

회사에서 누군가는 밤늦게까지 일한다. 승진을 위해서. 동료보다 앞서기 위해서. 인정받기 위해서. 이것이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인가? 아니면 경쟁이라는 구조 속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욕망에 집중하는 것인가?

언어는 때로 진실을 가린다. “자기에게 집중한다”는 표현 속에는 두 가지 다른 상태가 섞여 있다. 하나는 진정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 다른 하나는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 이 둘은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나는 지금 무엇을 느끼는가, 나는 진정 무엇을 원하는가, 내 안의 소리는 무엇을 말하는가”를 묻는 것이다. 후자는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이 가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인정받을 수 있을까”에 매달리는 것이다.

2023년 한국심리학회의 연구에 따르면,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사람들의 약 80%가 “타인과의 비교에서 오는 불안”을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그들은 자신에게 집중한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계산하느라 소진된 것이다.

진정으로 자신에게 집중한다는 것은 오히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 안의 고요한 목소리는 무엇을 말하는지. 이것을 듣는 것. 이것은 이기심이 아니다. 이것은 자기 인식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타인을 돕겠다고 나선다. 자기 삶도 중심을 잡지 못한 채 남의 짐을 지려 한다. 이것은 건물의 기초가 무너진 상태에서 2층을 올리려는 것과 같다.

도덕경(道德經) 33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지인자지 자지자명(知人者智 自知者明).” 남을 아는 것은 지혜롭지만, 자신을 아는 것은 밝은 것이다. 자신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타인을 제대로 볼 수 있겠는가.

보시에 대한 가르침 중 삼륜청정(三輪淸淨)이라는 개념이 있다. 주는 자, 받는 자, 주는 물건 이 세 가지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 “내가 베풀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보시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역설이 있다. 만약 내가 준다는 생각이 없다면, 보시라는 행위 자체가 성립하는가? 주는 이가 누구이고, 왜 주는 것인가?

“내가 베풀었다”는 생각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 안에 우월감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줄 수 있는 사람, 너는 받아야 하는 사람. 이 구도는 평등하지 않다. 그래서 진정한 보시는 주었다는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그렇다면 질문이 생긴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무엇을 주는가? 내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어디로 향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돌보는 것을 이기적이라 생각한다. 내 감정을 살피고, 내 필요를 채우고, 내 경계를 지키는 것을. 그래서 늘 참는다. 늘 양보한다. 늘 희생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텅 비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빈 우물에서는 물을 길어 올릴 수 없다. 스스로 채워지지 않은 사람은 타인에게 줄 것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나눔이 아니라 소진이다.

항공기 안전 수칙을 생각해보자. 기내 압력이 떨어지면 산소마스크가 내려온다. 그때 안내 방송은 이렇게 말한다. “먼저 본인의 마스크를 착용한 후, 옆 사람을 도와주십시오.” 왜일까? 자신이 먼저 호흡할 수 있어야 타인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도교의 수행에서는 내단(內丹)을 이야기한다. 내면의 단약, 즉 자기 내면을 수련하는 것. 이것이 먼저다. 자신의 기운이 충만해야 타인과 나눌 수 있다. 자신이 안정되어야 타인을 안정시킬 수 있다.

진정한 보시는 자신을 알고 나서 시작된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가졌는지, 내가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이것을 아는 것. 그리고 그것이 분명해질 때, 주는 행위는 더 이상 의도적이지 않다.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나무를 보자. 나무는 “나는 산소를 만들어서 주고 있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 본성에 따라 광합성을 할 뿐이다. 그 과정에서 산소가 나온다. 새들이 깃들 수 있는 가지를 만든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그늘을 준다. 하지만 나무는 자신이 무언가를 베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진정한 보시는 이와 같다. 자신이 온전할 때, 자신을 알 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 억지로 짜내는 것이 아니라, 충만함이 넘쳐 흐르는 것.

그래서 타인을 마음에 두기 전에, 먼저 자신을 마음에 두어야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욕망에 사로잡힌 자아가 아니라, 고요한 중심에 있는 본래의 자신을.

그것이 세워질 때, 비로소 타인을 온전히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때 일어나는 나눔은 계산이 아니다. 의무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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