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sdom

하루 백 개의 질문이 사라지는 데 2년이면 충분하다

하루에 백 개씩 질문하던 아이가, 학교에 들어간 지 2년이 지나면 하루에 한 개도 묻지 않게 된다. 하버드대학교 아동심리학자 폴 해리스(Paul Harris)의 연구에 따르면, 두 살에서 다섯 살 사이의 아이들은 약 4만 개의 질문을 쏟아낸다. 하루 평균 백 개에 가까운 수다. 궁금한 것이 숨 쉬듯 나오는 시기다. 그런데 정규 교육이 시작되면 이 흐름이 꺾인다. 윌리엄스 칼리지의 발달심리학자 수전 엥겔(Susan Engel)이 미국 교외 지역 초등학교 교실을 직접 관찰한 결과, 교실 안에서 아이들의 호기심 표현 빈도는 놀라울 정도로 낮았다. 중학교에 이르면 아이들은 사실상 질문을 멈춘다.

이것은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1968년, 조지 랜드(George Land)라는 연구자가 NASA에서 우주 과학자와 엔지니어를 선발하기 위해 개발한 창의력 검사를 아이들에게 적용했다. 헤드스타트(Head Start) 프로그램에 참여한 1,600명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종단연구였다. 결과는 이랬다. 다섯 살 때 창의적 천재 수준으로 분류된 아이는 98%였다. 같은 아이들을 열 살에 다시 검사하니 30%로 떨어졌다. 열다섯 살에는 12%. 성인이 되면 2%만 남았다. 랜드는 이 하락의 원인을 교육 시스템의 구조에서 찾았다. 학교는 확산적 사고(Divergent Thinking)와 수렴적 사고(Convergent Thinking)를 동시에 요구하는데, 이 두 가지는 서로 충돌한다.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야 하는 뇌와 정답을 골라야 하는 뇌가 같은 순간에 작동하면, 결국 정답 쪽이 이긴다.

이 데이터를 보강하는 후속 연구가 2011년에 나왔다. 윌리엄앤메리대학교의 김경희(Kyung Hee Kim) 교수가 1966년부터 2008년까지 약 27만 명의 미국 아동과 성인을 대상으로 실시된 토런스 창의적 사고력 검사(Torrance Tests of Creative Thinking) 점수를 분석했다. 결과는 1990년 이후 모든 연령대에서 창의력 점수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었다. 가장 큰 폭의 하락은 창의적 정교화(Creative Elaboration) 영역에서 나타났는데, 1984년과 2008년 사이에 1 표준편차 이상 떨어졌다. 이것은 2008년 아이들의 85% 이상이 1984년 평균 아이보다 낮은 점수를 받았다는 뜻이다. 아이큐는 계속 올라가는데 창의력은 계속 내려가는, 기묘한 엇갈림이 벌어지고 있었다.

수전 엥겔의 교실 관찰 기록에는 한 교사의 말이 남아 있다. 질문하는 아이에게 그 교사가 이렇게 답했다. “지금은 질문할 시간이 아니에요. 지금은 배우는 시간이에요.” 배움과 질문이 분리된 교실. 이 한 문장이 현대 교육의 구조적 문제를 압축한다. 아이는 궁금해서 묻는 것인데, 교실은 궁금함을 처리할 시간을 배정하지 않는다. 교사에게 주어진 시간은 정해진 교과 과정을 소화하는 데 쓰여야 하고, 아이의 엉뚱한 질문은 그 과정을 방해하는 소음으로 분류된다. 교사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시스템이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은 서양 교육의 이야기다. 서양은 그래도 토론과 자유로운 질문을 교육의 가치로 내세운다.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그렇다. 그런 서양에서조차 교실이 호기심을 짓누르는데, 한국과 중국의 교육은 어떤가.

한국의 교육 시스템은 출발점부터 다르다. 호기심을 허용하되 시간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호기심 자체가 평가 체계 안에 들어갈 자리가 없다. 수능이라는 단일 시험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구조에서, 교실의 모든 에너지는 정답을 빠르고 정확하게 고르는 훈련에 집중된다. 질문은 시간 낭비다. 아이가 “왜요?”라고 물으면, 그건 교과서 몇 페이지에 나와 있다는 답이 돌아온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가오카오(高考)라는 입시 제도 아래에서 교실은 주입과 반복의 공간이 된다. 에드위크(EdWeek)의 2016년 분석에 따르면, 중국 교육 전문가들조차 자국의 시험 중심 교육이 학생들의 창의적 사고력을 체계적으로 억압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데이터가 하나 있다. 2022년 OECD가 실시한 PISA 창의적 사고력 평가(Creative Thinking Assessment)에서 싱가포르가 41점으로 세계 1위를 차지했고, 한국이 38점으로 캐나다와 공동 2위였다. 표면적으로는 동아시아 교육이 창의력에서도 강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점수가 말해주지 않는 것이 있다. PISA의 창의적 사고력 검사는 시험의 형태로 출제된다. 시험을 잘 보는 훈련을 받은 학생이, 창의력을 측정하는 시험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시험이라는 형식 안에서의 창의력과, 아무도 시험을 보고 있지 않을 때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탐구하는 능력은 다른 것이다. PISA에서 측정할 수 없는 것, 아이가 혼자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아무도 묻지 않은 질문을 떠올리는 그 순간의 빈도. 그것을 측정하는 시험은 아직 없다.

도덕경(道德經) 20장에 이런 구절이 있다. 絕學無憂.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다. 이 문장은 자주 오해된다. 무식하면 편하다는 뜻이 아니다. 노자가 말하는 學은 당시의 제도화된 교육, 예법과 규범과 분류와 등급을 가르치는 체계를 가리킨다. 그것을 끊으면 근심이 없다는 말은, 정답을 외우는 데 에너지를 쏟는 한 본래의 앎에 도달할 수 없다는 뜻에 가깝다. 2,500년 전 노자가 가리킨 것과 오늘날 교육학자들이 데이터로 증명하고 있는 것 사이의 거리가 생각보다 멀지 않다.

아이는 원래 묻는 존재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은 생존을 위한 본능이고, 그것이 언어를 타고 질문의 형태로 쏟아지는 것은 인간이라는 종의 가장 자연스러운 작동 방식이다. 하루 백 개의 질문은 결함이 아니라 설계 사양이다. 그런데 학교라는 시스템에 들어가는 순간, 이 사양이 버그로 취급된다. 서양은 이것을 시간 부족으로 처리하고, 동아시아는 이것을 체계적으로 제거한다. 방법은 다르지만 결과는 같다. 묻는 아이가 대답하는 기계가 된다.

조지 랜드의 연구에서 98%였던 창의적 천재가 성인이 되면 2%로 줄어든다. 96%의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그 아이들의 호기심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묻지 않도록 훈련된 것이다.

인공지능이 모든 답을 제공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답이 무한해지는 세상에서 가치가 올라가는 것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 시스템은 여전히 답을 빨리 고르는 사람을 우등생이라 부른다. 정규 교육 12년이 끝난 뒤에도 “왜?”라고 묻는 습관이 살아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 숫자가 조지 랜드의 2%와 우연히 겹치는 것인지, 아니면 같은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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