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sdom

진심을 받지 못하는 사람, 진심이 관계를 상하게 하는 이유

사람은 자기 안에 없는 것을 받지 못한다. 진심 어린 지적이 상대에게 닿지 않는 이유는 그 사람이 나쁘거나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그 지적이 그 사람의 인식 바깥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자기 인식의 경계 너머에서 날아온 말은 아무리 정확해도 정보가 아니라 공격으로 접수된다. 이것이 진심이 자주 관계를 상하게 하는 구조다.

미국심리학회(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가 2022년에 발표한 논문을 보면 재미있는 대목이 있다. 니콜 아비에스베르(Nicole Abi-Esber)와 줄리아나 슈뢰더(Juliana Schroeder) 등이 성격 및 사회심리학 저널(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에 실은 연구인데, 사람들은 남이 자기 피드백을 원하는 정도를 실제보다 훨씬 낮게 본다는 결론이다. 실험 하나는 이렇다. 설문에 참여한 사람에게 실험 진행자가 얼굴에 초콜릿이나 립스틱 자국을 묻힌 채 나타났다. 155명 가운데 그 사실을 말해 준 사람은 4명, 2.6퍼센트였다. 다섯 개 실험 전체에서 사람들은 자기 피드백이 상대에게 얼마나 쓸모 있을지를 꾸준히 낮게 잡았고, 피드백이 무거울수록 그 격차는 더 벌어졌다. 연구자들의 결론은 사람들이 피드백을 더 많이 해야 한다는 쪽이다.

그런데 이 연구를 뒤집어 읽으면 다른 그림이 보인다. 얼굴의 얼룩처럼 눈에 보이고 바로 고칠 수 있는 것은 누구나 듣고 싶어 한다. 문제는 그 사람의 성격, 판단력, 일하는 방식처럼 그 사람 자체에 붙어 있는 것에 대한 평가다. 얼룩은 닦으면 없어지지만 성격은 닦아지지 않는다. 고칠 수 없는 것에 대한 진심은 정보가 아니라 선고가 된다. 사람들이 피드백을 아끼는 것은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이 차이를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문제를 가장 극단까지 밀어붙인 조직이 있다. 세계 최대 헤지펀드 브리지워터(Bridgewater Associates)를 세운 레이 달리오(Ray Dalio)는 극단적 투명성(Radical Transparency)이라는 원칙을 회사 전체에 적용했다. 회의는 녹화되고, 누구든 누구에게든 그 자리에서 평가를 내리며, 그 평가는 실시간으로 점수화된다. 달리오는 자기 원칙이 옳다고 확신했고 실제로 그 회사는 수십 년간 돈을 벌었다. 그런데 달리오 본인이 인정한 숫자가 있다. 입사자의 약 25퍼센트가 18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떠난다. 달리오는 이것을 걸러내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맞는 말일 수 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완벽하게 정직한 평가를 제도로 만들어도, 그것을 받아낼 수 있는 사람은 네 명 중 셋이 채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런 문화를 알고 스스로 지원한 사람들 가운데서 그렇다.

역사에서는 더 무거운 사례가 있다. 명나라 가정제(嘉靖帝) 시절의 해서(海瑞)는 1566년에 황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황제가 도교 수련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세금은 무겁고, 관리는 썩었으며, 백성이 황제를 원망한 지 오래라는 내용이었다. 하나도 틀린 말이 없었다. 해서는 상소를 올리기 전에 자기 관을 사 두고 가족과 작별했다. 황제는 상소를 읽고 격노해 그를 옥에 가두었다. 해서가 살아남은 것은 그의 진심이 받아들여져서가 아니라, 그해 말에 황제가 죽었기 때문이다. 정확한 말을 했다는 것과 그 말이 닿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사건이다.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 편은 이 문제를 이천 년 전에 정리해 두었다. 안회(顔回)가 폭군이 다스리는 위나라로 가서 바로잡겠다고 하자 공자가 말린다. 그 대목에 이런 구절이 있다. 強以仁義繩墨之言術暴人之前者,是以人惡有其美也,命之曰菑人。菑人者,人必反菑之。 사나운 사람 앞에서 옳은 말을 억지로 들이대는 것은 상대의 못남을 빌려 자기의 잘남을 드러내는 짓이고, 이런 사람을 재앙을 주는 사람이라 부르며, 남에게 재앙을 준 사람은 반드시 재앙을 되돌려받는다는 뜻이다. 장자는 진심이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다. 진심이 상대에게 어떻게 보이는가를 말한다. 아무리 순수한 의도라도 상대의 눈에는 자기 결점 위에 올라선 남의 우월감으로 비친다는 것이다. 같은 편에 名也者,相軋也;知也者,爭之器也라는 말도 있다. 이름은 서로를 밀어내는 것이고 앎은 다툼의 도구라는 뜻이다. 내가 더 잘 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상대에게는 무기로 보인다.

여기서 하나 짚어 둘 것이 있다. 이 글이 말하는 것은 진심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진심을 표현하는 순간, 그것이 상대의 인식 안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먼저 보라는 것이다. 자리가 나보다 낮고 형편이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는 쉽게 한마디 하는 사람이, 자리가 나보다 높고 형편이 나보다 나은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자기를 평가하면 목에 가시가 걸린 듯 며칠을 앓는다. 이 비대칭을 스스로 느껴 본 사람이라면, 자기의 진심이 상대에게 어떤 온도로 도착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명리(命理)에서 보면 이 문제는 상관(傷官)의 문제다. 상관은 보이는 것을 그대로 말하는 기운이다. 총명하고 날카롭고 틀린 것을 못 참는다. 그런데 상관이 관(官)을 상하게 한다는 이름을 달고 있는 이유가 있다. 옳은 말이 위계와 관계를 깎아내리기 때문이다. 고전이 상관을 다룰 때 늘 인수(印綬)나 재(財)로 다스리라고 하는 것은, 그 날카로움을 없애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갈 길을 만들어 주라는 뜻이다. 인수는 상대를 이해하는 힘이고 재는 그 말이 결과로 이어지게 하는 힘이다. 이해 없이 나가는 상관은 그저 칼이다.

그렇다면 진심 대신 무엇을 하는가. 원문의 뼈대는 단순하다. 평가하지 않고, 지적하지 않고, 자기 일을 조용히 하고, 먼저 돕는다. 누군가의 일이 안 될 때 필요한 것은 그 사람이 왜 못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아니라, 그 일이 되게 하는 손이다. 이것이 도덕경(道德經)이 말하는 현덕(玄德)에 가깝다. 生而不有,爲而不恃,長而不宰. 낳아 주되 가지지 않고, 해 주되 기대지 않고, 자라게 하되 주재하지 않는다. 도움을 받은 사람이 반드시 갚는 것은 아니다. 열에 여섯이 잊고 셋이 기억하고 하나가 갚을 수도 있다. 그래도 그 하나가 남는다. 진심 어린 지적은 열에 하나도 남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진심은 지금 이 순간에 대한 나의 판단일 뿐이다. 그것이 상대의 미래까지 규정하지는 못한다. 지금 서툰 사람이 십 년 뒤에 어디에 서 있을지, 지금 정확한 판단을 내린 내가 십 년 뒤에 어디에 서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해서의 상소는 옳았고 황제는 그해 죽었다. 그런데 그 뒤 명나라가 나아졌는가는 또 다른 문제다. 옳은 말 한마디가 사람의 길을 바꾸는 경우보다, 옆에서 말없이 거들어 준 손 하나가 길을 바꾸는 경우가 얼마나 더 많은지, 각자 자기 삶에서 한번 세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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