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정의하지 말라 – 라벨이 판단력을 잠식하는구조
자기를 정의하는 순간, 판단이 멈춘다. 나는 보수다, 나는 진보다, 나는 어떤 부류의 사람이다. 이렇게 선언하는 순간 일어나는 일은 정체성의 확립이 아니라 인지의 축소다. 심리학과 사회과학이 수십 년간 축적해온 연구 결과는 일관된다. 사람은 자기가 속했다고 믿는 집단의 논리를 지키기 위해 사실관계를 왜곡하고, 수학 문제도 틀리게 풀며, 정책의 내용이 아니라 누가 지지하느냐에 따라 찬반을 바꾼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본인은 자기가 객관적이라고 확신한다.
뉴스 기사의 댓글란을 보면 패턴이 보인다. 같은 사안을 놓고 나는 우파인데, 나는 좌파인데로 시작하는 댓글들이 줄줄이 달린다. 이 선언 뒤에 오는 의견은 놀라울 정도로 예측 가능하다. 자기가 속한 진영의 논리를 거의 그대로 반복한다. 본인은 독립적으로 사고한 결과라고 믿지만, 실제로는 소속의 라벨이 결론을 먼저 정해놓고 논리가 뒤따라간 것이다.
더 교묘한 형태도 있다. 나는 보수지만, 이건 아니라고 생각해. 나는 진보지만,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진영 논리에서 벗어났다고 느낀다. 자기편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으니까 객관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장의 구조를 보면, 출발점은 여전히 라벨이다. 나는 보수지만이라는 전제가 먼저 깔리고, 그 위에서 예외적 판단을 하는 형식이다. 라벨을 벗은 것이 아니라 라벨을 입은 채로 한 발짝 비켜선 것이다. 기본 좌표는 그대로 두고 좌표 안에서 미세 조정을 한 것에 가깝다. 진짜 라벨 없이 판단하는 사람은 나는 보수지만이라는 전제 자체가 필요 없다. 그냥 이 정책은 이런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말하면 된다. 굳이 자기 소속을 밝히고 시작하는 것 자체가, 그 소속이 여전히 판단의 기준점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것을 과학적으로 확인한 실험이 있다. 예일 대학의 제프리 코언(Geoffrey Cohen)이 2003년에 수행한 연구다. 실험 참가자들에게 복지 정책안을 보여줬다. 하나는 관대한 안이고, 하나는 엄격한 안이었다. 정당 정보 없이 보여주면 진보 성향 참가자들은 관대한 안을 선호했고 보수 성향은 엄격한 안을 선호했다. 여기까지는 예상대로다. 그런데 정당 라벨을 붙이는 순간 결과가 완전히 뒤집어졌다. 민주당이 엄격한 안을 지지한다고 알려주면, 진보 참가자들은 엄격한 안을 지지했다. 공화당이 관대한 안을 지지한다고 알려주면, 보수 참가자들은 관대한 안을 지지했다. 정책의 실질적 내용은 판단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오직 내 편이 어느 쪽이냐만이 결론을 결정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사후 인터뷰에서 참가자들이 자기 판단의 근거로 정당이 아니라 정책 내용과 개인 철학을 들었다는 점이다. 자기가 진영 논리에 끌려갔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댄 카한(Dan Kahan)이 예일대에서 2013년에 수행한 동기화된 수리력(Motivated Numeracy) 연구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1,111명의 참가자에게 통계 데이터를 해석하는 문제를 줬다. 하나는 피부 크림의 효과에 관한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총기 규제의 효과에 관한 문제였다. 수학적 구조는 동일했다. 숫자만 같고 맥락만 달랐다. 피부 크림 문제에서는 수리 능력이 높은 사람이 정답률도 높았다. 당연한 결과다. 그런데 총기 규제 문제로 바꾸는 순간, 수학 실력과 정답률의 상관관계가 무너졌다. 수리 능력이 뛰어난 진보 성향 참가자는 데이터가 총기 규제의 효과를 보여줄 때는 거의 완벽하게 풀었지만, 데이터가 반대 결론을 가리킬 때는 정답률이 급락했다. 보수 성향 참가자는 정확히 반대 패턴을 보였다. 수학을 잘하는 사람이 정치가 끼어들면 수학을 못하게 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수학 능력을 정답을 찾는 데가 아니라 자기 진영의 결론을 합리화하는 데 사용한다. 머리가 좋을수록 합리화를 더 정교하게 할 뿐이다.
이 현상의 구조를 뉴욕대학의 제이 밴 바벨(Jay Van Bavel)은 2018년에 당파적 뇌(The Partisan Brain)라는 모델로 정리했다. 그의 핵심 논점은 이렇다. 사람들이 정치적 의견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 정책이 자기 일상에 실질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 아니다. 그 의견이 자기 정체성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정체성을 위협하는 정보는 자기 존재를 위협하는 정보와 같은 방식으로 처리된다. 뇌는 사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방어하는 것이다. 이것을 정체성 보호적 인지(Identity Protective Cognition)라고 부른다. 나는 보수라고 선언한 사람에게 보수 정책의 허점을 보여주는 데이터는 정보가 아니라 위협이다. 뇌가 그것을 위협으로 분류하는 순간, 객관적 판단은 작동을 멈춘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그렇다면 자기 편향을 자각하면 되지 않느냐. 내가 편향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 편향을 교정할 수 있지 않겠느냐. 이론적으로는 맞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에밀리 프로닌(Emily Pronin)이 프린스턴 대학에서 2002년에 수행한 편향 사각지대(Bias Blind Spot) 연구가 이것을 보여준다. 참가자들에게 여덟 가지 인지 편향을 설명한 뒤, 자기가 이 편향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평가하게 했다. 결과는 일관됐다. 사람들은 타인이 이 편향에 빠져 있다는 것은 인정하면서, 자기 자신은 덜 취약하다고 평가했다. 편향에 대해 아는 것과 자기가 편향되어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다. 2024년 브라질에서 수행된 직접 재현 연구에서도 이 결과는 그대로 반복되었다. 사람은 자기가 남보다 덜 편향되어 있다고 믿는 데 있어서 놀라울 정도로 일관적이다.
정리하면 이런 구조다. 첫째, 자기를 어떤 범주로 분류하면 그 범주가 결론을 먼저 결정한다. 둘째, 머리가 좋을수록 그 결론을 합리화하는 능력이 올라간다. 셋째, 자기가 편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도 자기만은 예외라고 믿는다. 이 세 가지가 동시에 작동하면, 자기를 정의한 사람은 거의 빠져나올 수 없는 인지적 감옥에 갇힌다. 그리고 그 감옥이 감옥인 줄 모른다.
사회심리학자 헨리 타지펠(Henri Tajfel)은 1970년대에 최소 집단 패러다임(Minimal Group Paradigm)이라는 실험을 설계했다. 참가자들을 아무런 의미 없는 기준으로 두 집단으로 나눴다. 클레와 칸딘스키 중 어느 화가의 그림을 선호하느냐, 혹은 동전 던지기 결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무작위로 나눈 집단에서도 사람들은 자기 집단에 더 많은 자원을 배분하고, 상대 집단을 덜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아무런 이해관계도, 역사도, 갈등도 없는 집단이다. 그냥 같은 편이라는 라벨 하나가 붙었을 뿐인데, 편가르기가 시작된다. 이것이 인간 인지의 기본 작동 방식이라면, 나는 보수다, 나는 진보다라는 훨씬 강력한 라벨을 스스로 붙였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예측하기 어렵지 않다.
장자 제물론(齊物論)에 이런 대목이 있다. 物固有所然 物固有所可. 사물에는 본래 그러한 바가 있고, 본래 괜찮은 바가 있다. 어떤 것이든 그런 면이 있고, 어떤 것이든 괜찮은 면이 있다. 장자는 시비(是非)라는 것이 절대적이지 않다고 본다. 彼亦一是非 此亦一是非. 저편에도 하나의 옳고 그름이 있고, 이편에도 하나의 옳고 그름이 있다. 장자가 보기에, 시비란 서 있는 자리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 우주에 고정된 좌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가 서 있는 자리의 시비를 절대적인 것으로 착각한다. 자기편의 시비가 곧 진리라고 믿는다. 장자는 이것을 도추(道樞)라는 개념으로 풀어낸다. 시비의 중심축에 서면, 양쪽을 다 볼 수 있다. 한쪽에 서면 한쪽밖에 보이지 않는다.
2,300년 전에 장자가 관찰한 것을 현대 심리학은 실험실에서 재확인한 셈이다. 자기를 어떤 편으로 고정시키면, 그 편의 시비가 곧 자기의 시비가 된다. 반대편의 논리는 위협이 되고, 자기편의 논리는 진리가 된다. 수학 문제도 틀리게 풀고, 정책의 내용은 무시하면서, 자기는 객관적이라고 확신한다. 장자의 표현을 빌리면, 한쪽 끝에 매달려서 전체를 보지 못하는 상태다.
물론 이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타지펠의 실험이 보여주듯, 집단에 소속되려는 충동은 인간의 기본 설정에 가깝다. 우리 편과 저쪽 편을 나누는 것은 생존에 유리했던 진화적 유산이다. 문제는 이 유산이 현대의 복잡한 정치적, 사회적 판단에도 그대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부족 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달한 신경 회로가, 뉴스 기사를 읽고 정책을 평가하는 데까지 관여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다라는 선언은 편하다. 세상이 단순해지기 때문이다. 복잡한 사안마다 일일이 판단할 필요 없이, 자기 진영의 결론을 가져다 쓰면 된다. 인지적 에너지가 절약된다. 그런데 절약된 것은 에너지만이 아니다. 판단력도 같이 절약된다. 자기 진영의 렌즈를 통해서만 세상을 보면, 렌즈 밖의 것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판단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시야가 좁아지는 과정은 본인에게는 시야가 명확해지는 과정으로 체험된다. 잡음이 사라지고 핵심만 남았다고 느낀다. 실제로는 핵심이 아니라 한쪽 면만 남은 것인데.
카한의 연구에서 가장 불편한 발견은 이것이다. 똑똑한 사람이 편향에서 더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편향을 더 정교하게 작동시킨다는 것. 교육 수준이 높고 수리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자기 진영에 유리한 방향으로 데이터를 해석하는 능력이 올라간다. 지능이 편향의 해독제가 아니라 편향의 무기가 된다. 이것은 나는 많이 배웠으니까 객관적이다라는 믿음 자체가 하나의 편향일 수 있다는 뜻이다.
비슷한 구조가 하나 더 있다. 나는 공정한 사람이야, 나는 객관적인 사람이야라고 스스로를 정의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실제 행동을 보면, 그 선언과 전혀 맞지 않는 경우가 놀라울 정도로 많다. 특정 집단에는 관대하고 다른 집단에는 가혹하다. 자기와 가까운 사람의 실수는 맥락을 읽어주고, 자기와 먼 사람의 실수는 본질로 단정한다. 프로닌의 연구가 보여주듯, 자기가 공정하다는 믿음은 편향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편향을 감시하는 눈을 끈다. 나는 이미 공정한 사람이니까 내 판단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공정하다는 정체성이 공정한 행동을 대체해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도덕적 자격 효과(Moral Licensing)와도 연결된다. 2010년 노스웨스턴 대학의 모닌과 밀러의 연구에 따르면, 자기가 편견 없는 사람이라는 증거를 먼저 확보한 참가자들은 이후에 오히려 더 차별적인 선택을 했다. 공정하다는 자기 이미지가 실제 공정함의 방패가 아니라 면죄부로 작동한 것이다. 라벨이 행동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라벨이 행동을 면제한다.
장자는 제물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大道不稱 大辯不言. 큰 도는 이름 붙이지 않고, 큰 변론은 말하지 않는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전체가 잘린다. 말로 규정하는 순간 규정 밖의 것이 사라진다. 나를 정의하는 것도 같은 구조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이런 사람이 아닌 부분이 잘려나간다. 남은 것은 전체가 아니라 조각이다. 그 조각을 전체라고 착각하는 것이 편향이고, 그 착각을 깨기 어려운 이유는 조각이 선명할수록 전체를 보고 있다는 확신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자기를 정의하지 않는 것은 신념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특정 사안에 대해 입장이 없다는 뜻도 아니다. 입장은 있되, 그 입장이 나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 정책에 대해서는 찬성하지만, 저 정책에 대해서는 반대할 수 있다. 어떤 사안에서는 보수적 관점이 타당하고, 다른 사안에서는 진보적 관점이 타당할 수 있다. 이런 유연성은 소속이 없는 사람에게서만 가능하다. 자기를 어느 편으로 고정한 사람은, 모든 사안에서 자기편의 결론을 따라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을 받는다. 그 압력의 대부분은 자기 안에서 온다.
시장에서 오래 살아남은 사람들은 알고 있다. 강세론자나 약세론자로 자기를 고정하면, 시장이 바뀌었을 때 따라가지 못한다. 시장은 때로 올라가고 때로 내려간다. 그때그때 상황을 읽고 대응하는 것이 생존의 기본인데, 나는 강세론자라고 정의한 순간 하락 신호를 무시하게 된다. 나는 약세론자라고 정의한 순간 상승 신호를 무시하게 된다. 시장과 정치는 구조가 같다. 라벨을 붙이면 신호가 왜곡된다.
장자가 말한 도추, 시비의 중심축에 선다는 것은 양비론이 아니다. 양쪽 다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양쪽을 다 볼 수 있는 자리에 선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는 이쪽의 타당한 부분도 보이고 저쪽의 타당한 부분도 보인다. 이쪽의 허점도 보이고 저쪽의 허점도 보인다. 그래야 정확한 판단이 가능하다. 한쪽에 서면 한쪽밖에 보이지 않는다.
나를 정의하지 말라는 것은 결국 이런 이야기다. 라벨은 편리하지만, 그 편리함의 대가는 판단력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