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능의 격차는 좁고 행동의 격차는 넓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가장 좁은 격차는 지능이다. 가장 넓게 벌어지는 것은 첫 발을 떼는 지점이다. 이것은 격언이 아니라 관찰이며, 관찰을 뒷받침하는 자료도 백 년 가까이 쌓여 있다.

1921년 스탠퍼드의 심리학자 루이스 터먼은 캘리포니아에서 지능검사 상위권 아동 1,528명을 골라내 평생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집단 평균 지능지수는 151이었다. 터먼의 가설은 단순했다. 지능이 곧 운명이라는 것. 그런데 결과는 그 가설을 조용히 무너뜨렸다. 터먼의 동료 멜리타 오든이 1968년에 이 집단 안에서 가장 성공한 남성 100명과 가장 성공하지 못한 남성 100명을 갈라 비교했을 때, 두 집단의 평균 지능지수는 거의 차이가 없었다. 차이가 난 것은 자신감, 끈기, 그리고 어린 시절 부모의 격려였다. 같은 지능을 가진 사람들이 한쪽은 교수와 과학자가 되고 한쪽은 수영장 청소부와 실패한 변호사가 되는 동안, 지능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했다.
노자는 이 문제를 훨씬 앞서 짚어두었다. 도덕경 70장의 첫 구절이다. 吾言甚易知 甚易行 天下莫能知 莫能行. 내 말은 알기도 아주 쉽고 행하기도 아주 쉬운데, 천하가 알지 못하고 행하지도 못한다. 이 구절을 처음 읽으면 노자가 자기 말이 어렵다고 투덜대는 것처럼 들리는데, 정확히 반대다. 어렵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난이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든한 개 장 가운데 노자가 가장 답답해하는 대목이 여기다. 그는 이해의 실패가 아니라 행의 실패를 보고 있었다. 알기 쉬운 것과 행해지는 것 사이에는 지능이 아닌 다른 무엇이 놓여 있다.
그 다른 무엇의 정체에 관한 가장 정밀한 연구는 앨버트 반두라의 것이다. 반두라는 1977년 심리학 논문에서 자기효능감(self-efficacy) 개념을 제시하면서, 사람이 자기 능력에 대한 믿음을 얻는 통로를 네 가지로 정리했다. 직접 해내는 경험, 남이 해내는 것을 보는 대리 경험, 말로 듣는 설득, 그리고 그 순간의 신체적 감정 상태. 이 네 가지의 순위가 중요하다. 압도적 1위는 직접 해내는 경험이다. 말로 듣는 설득은 하위권이다.
반두라는 이것을 뱀 공포증 환자들에게서 확인했다. 수십 년간 지하실과 정원을 피해 다니던 성인들을 세 집단으로 나눴다. 한 집단은 치료자가 보아뱀을 다루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고, 다른 집단은 지켜본 뒤 장갑을 낀 채 직접 만지는 단계를 하나씩 밟아 나갔다. 직접 만진 쪽이 효능감에서도 실제 접근 행동에서도 압도적이었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다음이다. 반두라는 이 효능감이 뱀과 아무 상관 없는 영역까지 옮겨간다고 기록했다. 뱀을 만진 사람이 회의에서 발언을 하기 시작한다. 뱀은 핑계였고, 진짜로 바뀐 것은 자기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감각이었다.
여기서 멘토라는 단어의 무게가 조금 달라진다. 조언을 많이 해주는 사람은 네 가지 통로 중에서 가장 약한 것을 쓰고 있다. 옆에서 먼저 움직이는 사람은 그보다 강한 통로를 쓴다. 그리고 그 사람마저도, 본인이 직접 발을 담그는 것보다는 약하다. 결국 어떤 스승도 대신 만져줄 수는 없다는 뜻이다. 다만 먼저 만지는 것을 보여줄 수는 있다. 그 차이가 생각보다 크다.
행동이 인지를 앞선다는 것은 창업 연구에서도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사라스 사라스바시는 매출 2억 달러에서 60억 달러 규모 회사를 일군 숙련 창업가 27명에게 열일곱 쪽짜리 문제집을 주고, 신제품의 시장을 찾는 결정을 내리면서 머릿속 생각을 소리 내어 말하게 했다. 결과는 경영학 교과서와 어긋났다. 이들은 목표를 먼저 정하고 수단을 찾지 않았다. 지금 손에 쥔 것에서 출발해서, 감당할 수 있는 손실의 범위를 정하고, 움직이면서 목표를 바꿨다. 조사 대상의 63퍼센트 이상이 이 방식을 75퍼센트 이상의 비중으로 사용했다. 사라스바시는 이것을 효과 논리(effectuation)라 이름 붙였고, 예측에 기대는 인과 논리(causation)와 구분했다. 뒤이은 연구에서 더 재미있는 대목이 나온다. 같은 문제를 경영대학원 학생들에게 주자, 초심자 쪽이 오히려 예측과 분석에 더 많이 기댔다. 전문가는 분석력이 부족해서 먼저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분석의 한계를 알기 때문에 먼저 움직인다.
한국에도 교과서에 실릴 만한 사례가 하나 있다. 1971년 10월, 정주영은 그리스 선주 리바노스로부터 26만 톤급 초대형 유조선 두 척을 수주했다. 그때 그가 가진 것은 울산 미포만 백사장 사진 한 장과 축척 지도, 그리고 빌려온 유조선 설계도였다. 조선소는 없었다. 부지도 아직 모래밭이었다. 배를 만들 곳이 없는 상태에서 배를 판 것이다. 기공식은 이듬해 1972년 3월이었고, 1974년 6월 28일에 조선소 준공식과 1호선 2호선 명명식이 같은 날 한자리에서 치러졌다. 조선소를 지으면서 동시에 배를 만든 것은 세계 조선 역사에 없던 일이다. 선진국이 비슷한 규모의 조선소를 짓는 데 4년에서 5년을 쓰던 시절, 현대는 2년 3개월에 끝냈다.
이 이야기가 대단한 것은 배포 때문이 아니다. 순서를 뒤집었기 때문이다. 조선소를 다 짓고 나서 수주하러 다녔다면 그 회사는 1970년대에 사라졌을 것이다. 수주가 먼저 있었기 때문에 조선소를 지을 돈이 나왔고, 지으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고쳤다. 백사장 사진을 들고 다니던 시점의 그가 조선업을 이해하고 있었을 리 없다. 이해는 도크를 파면서 생겼다.
매수 버튼을 누르기 전까지 쌓아 올린 분석은 전부 가설이다. 아무리 정교해도 가설이다. 포지션을 잡는 순간 정보의 질이 바뀐다. 같은 뉴스가 다르게 읽히고, 자기가 무엇을 못 보고 있었는지가 손익 곡선을 통해 통보된다. 이 통보는 무례하고 정확하다. 반대로 십 년째 종목을 연구만 하는 사람은 십 년치의 정보를 가진 것이 아니라 십 년치의 관념을 가진 것이다. 그 관념은 검증된 적이 없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정교해지기만 하고 정확해지지는 않는다. 머릿속에서 높아진 인지는 높아진 것이 아니라 검증을 회피한 상태로 굳은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뛰어들라는 이야기로 넘어가면 그것도 반쪽이다. 용기라는 단어는 낭만적으로 소비되기 쉬운데, 실제로 행동을 만들어내는 것은 결심의 강도가 아니라 구조다. 페터 골비처와 파스칼 시런이 2006년에 94개의 독립 연구를 모아 분석한 결과가 이 지점을 정확히 보여준다. 목표를 세우는 것과 별개로,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할지를 미리 문장으로 못 박아두는 것만으로 목표 달성률이 뚜렷하게 올라갔다. 효과 크기는 0.65였고, 특히 시작 자체를 못 하는 문제에서 효과가 컸다. 하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조건과 반응을 미리 붙여놓은 문장 하나가 사람을 움직인다. 용기라고 부르는 것의 상당 부분은 사실 이 문장을 미리 써두었느냐 아니냐의 문제다.
명리(命理)로 보면 이 구도가 익숙하다. 인성(印星)은 받아들이고 사유하고 저장하는 기운이고, 식상(食傷)은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내보내는 기운이다. 인성이 두터운 사람은 총명하다는 말을 어릴 때부터 듣는다. 이해가 빠르고 통찰이 깊다. 그런데 인성만 과하고 식상이 눌려 있으면,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는 형태가 된다. 판단은 정확한데 판단만 한다. 이런 명식을 가진 사람이 평생 하는 말이 있다. 그거 내가 예전에 생각했던 건데.
먼저 움직인 사람이 얻는 것은 결과만이 아니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에 대한 목록을 얻는다. 이 목록은 책상에서는 절대 만들어지지 않는다. 실패는 이 목록의 작성 방식이고, 수정은 목록을 줄이는 방식이다. 이 과정을 몇 번 통과한 사람과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같은 문장을 말해도 그 문장의 무게가 다르다. 듣는 사람은 그 차이를 대개 알아본다.
노자가 70장 끝에 붙인 말은 이렇다. 是以聖人被褐懷玉. 그래서 성인은 거친 베옷을 걸치고 옥을 품는다. 알아보는 사람이 드물다는 뜻으로 흔히 읽히는데, 다르게 읽을 여지도 있다. 옥은 품고 있어야 옥이고, 걸친 것은 어차피 베옷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늘 초라한 첫 동작 쪽이다.
기회를 잡는 사람과 놓치는 사람의 시야 차이가 어디서 생기는지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다만 백사장 사진을 들고 아테네로 가는 비행기를 탄 사람과, 그 계획서를 검토하고 무리라고 판단한 사람 중에서, 이후 2년간 조선업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된 쪽이 누구였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