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지 않는 사람과 거래하는 비용, 팡동라이가 200억을 버린 이유
맞지 않는 사람과 억지로 거래를 이어가는 비용은 손익계산서에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대부분은 그 비용을 지불하면서도 지불하는 줄 모른다. 2026년 8월, 중국 허난성 쉬창(許昌)에서 그 계산서를 공개적으로 꺼내 보인 사람이 있다.

팡동라이(胖東來)의 창업자 위둥라이(于東來)다. 그는 8월 7일 라이브 방송에서 쉬창 생활광장점을 올해 12월에 닫는다고 발표했다. 2002년에 문을 열어 스물네 해를 채운 점포다. 연 매출이 20억 위안, 연 이익이 1억 위안을 넘는다. 이익만 우리 돈으로 200억 원 안팎이다. 유통업을 해본 사람이라면 이 숫자가 어떤 의미인지 안다. 매장 하나가 이 정도를 벌어들이면, 그 매장은 회사의 자산이 아니라 회사의 심장에 가깝다.
닫는 이유는 매출도 아니고 상권도 아니었다. 8월 9일 그가 직접 올린 글에 따르면, 2015년 무렵 이 사업을 맡은 직원이 회사 규정대로 임대차 계약을 하나로 묶어 체결하지 않았다. 생활광장은 여러 소유주가 얽힌 건물이고, 계약이 흩어지자 그 틈으로 일부 점포의 임대료가 공정한 수준을 한참 벗어나 올라갔다. 이미 서명이 끝난 계약이라 되돌릴 수도 없고, 그대로 두자니 볼 때마다 마음이 걸렸다. 그는 이것을 오랫동안 풀지 못한 매듭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믿음과 즐거움은 언제나 첫 번째다. 행복과 즐거움이 모든 것의 전제다.
이런 문장은 대개 회사 벽에 붙어 있다. 200억을 포기하면서 하는 경우는 드물다.
더 오래된 이야기가 하나 있다. 같은 글에서 그는 신샹(新鄉) 점포를 접었던 일을 처음으로 자세히 밝혔다. 임대 계약이 끝나자 건물 쪽이 연 임대료를 800여만 위안에서 2400만 위안으로 올려달라고 했다. 세 배다. 그 점포는 해마다 6천만에서 7천만 위안을 벌고 있었다. 산술로만 보면 임대료를 다 받아줘도 이익이 남는다. 위둥라이는 흥정도 하지 않았다. 그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바로 포기했다고 썼다.
건물주의 계산은 정교했다. 매장을 옮기려면 부지를 다시 찾아야 하고, 인테리어를 다시 해야 하고, 설비를 옮겨야 하고, 손님을 처음부터 다시 모아야 한다. 그 비용과 시간이 인상분보다 크다. 그러니 화가 나도 결국 받아들일 것이다. 대부분의 상인이 실제로 그렇게 한다. 그 계산에서 빠진 항목은 딱 하나였다. 참는 사람의 기분이다.
그 뒤의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 마지막 영업일에는 시민들이 몰려나와 매장을 채웠고, 지역 관계자들까지 나서서 만류했다. 위둥라이는 신샹을 떠나겠다는 결정은 거두었지만 그 건물로는 돌아가지 않았다. 이듬해 2억 위안 가까운 돈을 들여 다른 부지를 사서 새로 열었다. 원래 건물에는 여러 사업자가 들어왔다 나갔고, 한때 붐볐던 그 자리는 조용해졌다. 건물주는 사람들이 자기 건물을 보러 오는 줄 알았던 것이다.
이 이야기가 낯설지 않은 이유는, 결이 같은 말을 다른 자리에서 이미 들었기 때문이다. 워런 버핏은 1989년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서한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나쁜 사람과 좋은 거래를 성사시킨 적이 한 번도 없다. 같은 편지에서 그는 사업 전망이 아무리 좋아도 존경할 만한 자질이 없는 경영자와는 손잡고 싶지 않다고 덧붙였다. 사업이 좋으면 사람은 참을 수 있다는 통념을 정확히 뒤집는 문장이다. 그는 다른 자리에서 계약서 이야기도 했다. 나쁜 사람을 상대로 빈틈없는 계약서를 쓸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 싸움은 상대가 이긴다는 것이다. 소송을 즐기는 쪽은 언제나 그쪽이기 때문이다.
찰리 멍거는 더 짧게 말했다. 2023년 주주총회에서 그는 속이려 드는 사람, 거짓말하는 사람,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조심하라고 하면서, 그런 사람은 인생에서 빨리 치워버리라고 했다. 그의 투자 원칙 목록에도 인격이 의심스러운 사람과는 거래하지 말라는 항목이 들어 있다. 수익률과 자본배분 이야기 사이에 사람 이야기가 아무렇지 않게 섞여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윤리 강령이 아니라 손실 회피 규칙이었다.
문제는 이 규칙이 왜 그렇게 지키기 어려운가에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눈앞의 이익은 숫자로 보이고, 마음의 소모는 숫자로 보이지 않는다. 회계에는 후자를 적을 계정과목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이는 쪽만 계산하고, 보이지 않는 쪽은 없는 셈 친다. 없는 셈 친다고 사라지지는 않는다. 다만 나중에, 다른 이름으로 청구된다. 잠이 오지 않는다거나,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이 싫어진다거나, 오래 붙잡고 있던 일에서 갑자기 손을 놓고 싶어진다거나 하는 식이다.
이 보이지 않는 항목을 숫자로 잡아본 연구가 있다. 2022년 1월 MIT 슬론 매니지먼트 리뷰에 실린 도널드 설과 찰스 설, 벤 즈웨이그의 분석이다. 3400만 건의 직원 이력과 140만 건이 넘는 글래스도어 후기를 붙여, 170개가 넘는 조직문화 항목 가운데 무엇이 퇴사를 가장 잘 예측하는지를 봤다. 1위는 보수가 아니었다. 유해한 문화였고, 그 예측력은 보수의 10.4배였다. 보수는 16위였다. 사람들은 돈이 모자라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견디기 어려워서 떠난다는 이야기다. 회사가 지불한 돈은 장부에 남지만, 사람이 지불한 것은 어디에도 남지 않는다. 남는 것은 빈자리뿐이다.
조직에서 그렇다면 한 사람의 인생에서도 그렇다. 규모만 다를 뿐 구조는 같다.
도덕경(道德經) 74장에 이 구조를 다르게 말한 대목이 있다. 앞뒤 맥락을 조금 설명해야 한다. 옛 나라에는 사람의 목숨을 거두는 일을 맡은 관리가 따로 있었다. 사살자(司殺者)라고 불렀다. 형을 집행하는 자리이고, 그 자리에 앉은 사람만 그 일을 한다. 노자는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자가 그 일을 대신 하려 드는 상황을 두고 말한다. 夫代大匠斲者,希有不傷其手矣. 큰 목수를 대신해 나무를 깎는 자 가운데 제 손을 다치지 않는 이는 드물다.
대장(大匠)은 평생 자귀를 잡아온 사람이다. 나무를 보면 결이 어디로 흐르는지, 어디에 옹이가 박혀 있는지, 어느 각도로 내리쳐야 날이 튀지 않는지를 눈이 아니라 손이 먼저 안다. 그 손을 얻는 데 삼십 년이 걸린다.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이 자귀를 들면 어떻게 되는가. 나무는 갈라지지 않고 날은 튄다. 잘리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자기 손이다.
맞지 않는 사람을 붙들고 고치려 드는 일, 구원하려 드는 일, 참아주며 맞춰주는 일이 대체로 그렇다. 그건 내가 앉은 자리가 아니다. 그 사람을 바꿀 수 있는 자리에는 대개 아무도 앉아 있지 않거나, 앉아 있다면 시간과 그 사람 자신뿐이다. 노자는 하지 말라고 금지하지 않는다. 그저 손이 성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관찰만 하고 넘어간다. 도덕경의 어법이 대체로 그렇다. 금지가 아니라 통계에 가깝다.
사람들이 맞지 않는 상대와 계속 엮이는 이유에 이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섞여 있다. 나는 저런 인간하고도 해낼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옹졸하지 않다, 나는 참을 줄 아는 사람이다. 오래 시장에 있으면서 본 바로는, 이 증명서를 발급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다만 그 증명서를 어디에 제출하는지 물어보면 답이 잘 나오지 않는다. 제출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반박할 수 있다. 팡동라이는 2025년 매출이 235억 위안을 넘었고 빚이 없는 회사다. 여유가 있으니 그런 결정을 하는 것이지, 매달 임대료를 걱정하는 자영업자에게 같은 선택지가 있느냐고. 맞는 말이다. 다만 순서를 반대로 놓고 볼 수도 있다. 여유가 생겨서 사람을 고를 수 있게 된 것인지, 사람을 고르다 보니 여유가 생긴 것인지는 밖에서 판정하기 어렵다. 위둥라이는 2015년에도 같은 선택을 했다.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작은 회사였다.
위둥라이는 이번 폐점을 발표하면서 손익을 따지지 않았다. 자기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만 했다. 편치 않다는 것은 숫자가 아니다. 장부의 한쪽 칸에는 200억이 적히고, 그 옆 칸에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는다. 그 빈 칸에 각자 무엇을 적어 넣는가에 따라 계산은 완전히 달라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