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sdom

과외를 두고 부부가 갈리는 진짜 이유

자녀 교육을 두고 부부가 갈리는 지점은 성별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생활을 해봤느냐 아니냐의 문제다. 조직이나 시장 안에서 오래 굴러본 사람은 마지막 순위를 결정하는 것이 성적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목격한다. 그 목격이 없으면 세상은 여전히 하나의 커다란 시험장으로 보인다.

2025년 우리나라 초중고 사교육비 총액은 27조 5천억 원이었다. 참여율은 75.7퍼센트, 사교육을 받는 고등학생 한 명에게 들어간 돈은 월평균 79만 3천 원이다. 웬만한 가계에서 이 정도 규모의 지출은 집을 사고 파는 일 다음가는 결정이다. 그리고 이 결정은 대개 부부 중 한 사람이 끌고 간다. 다른 한 사람은 못마땅한 얼굴로 통장 잔고만 본다. 사람들은 이 구도를 아버지와 어머니의 차이라고 부른다. 이름을 잘못 붙인 것이다.

바깥에서 밥을 벌어본 사람은 몇 가지 장면을 반복해서 본다. 임원 승진 심사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두 사람의 학교와 학점을 비교하는 경우는 없다. 사고가 터졌을 때 누구를 부르는지, 조건이 나쁜 협상 자리에 누구를 앉히는지, 사람이 흩어지려 할 때 누가 붙잡는지를 본다. 나는 조직 안에서도 시장 안에서도 오래 있어봤는데, 학벌이 좋은 사람이 초반에 유리한 것은 사실이었다. 다만 그 유리함은 대개 3년에서 5년 사이에 소진되었다. 그 이후로는 다른 것이 사람을 갈랐다. 문제가 생겼을 때 도망가지 않는가, 압박이 걸린 상태에서 판단이 흐려지지 않는가, 사람들이 이 사람 밑에서 일하고 싶어하는가.

다만 반대편의 기억도 사실이라는 점은 짚어야 한다. 한 세대 전만 해도 학벌은 승진을 실제로 결정했다. 같은 학교를 나온 선배가 후배를 끌어올렸고, 인사 자료에 출신 학교가 붙어 있었으며, 어느 계열의 사람이 어느 자리에 간다는 것이 사내에서 공공연했다. 그것을 겪은 사람이 자식에게 학교를 강조하는 것은 미신이 아니라 경험이다. 문제는 그 경험이 성립하는 조건이 따로 있었다는 것이다.

능력이 아닌 기준으로 사람을 올리는 조직은 매번 두 번째로 좋은 사람을 앉히게 된다. 게리 베커(Gary Becker)가 1957년에 정리한 차별의 경제학이 이 이야기다. 사람을 능력 외의 잣대로 거르는 기업은 그 대가로 성과를 조금씩 잃고, 경쟁이 느슨한 시장에서는 그 손실을 감당할 수 있지만 경쟁이 치열해지면 감당하지 못한다. 학연은 도덕의 문제이기 전에 비용의 문제다. 시장이 조용할 때는 낼 수 있는 비용이고, 시장이 사나워지면 못 낸다.

그래서 흐름은 한 방향으로 흘렀다. 삼성은 1995년 하반기 공채부터 지원 자격에서 학력과 국적, 성별, 나이, 연고를 모두 지웠다. 30년이 지난 2026년 6월에는 SK하이닉스가 신입 수시채용에서 4년제 학사 이상이라는 문구 자체를 없앴다. 인심이 좋아져서가 아니다. 반도체 인력 확보전이 그런 여유를 남겨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벌로 사람을 거르던 회사들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도 되던 시절이 사라진 것이다.

바깥 경험이 없으면 이 변화를 볼 기회 자체가 없다. 이것은 애정의 문제도 아니고 머리의 문제도 아니다. 정보의 문제다. 학교는 닫힌 계다. 같은 나이의 아이들이 같은 시험을 보고 하나의 줄로 세워진다. 등수라는 숫자가 있고, 그 숫자를 올리는 방법이 명시되어 있으며, 노력과 결과 사이의 시차가 짧다. 이렇게 잘 설계된 게임을 오래 관찰한 사람에게는 그 게임의 규칙이 세상의 규칙으로 보인다. 사람은 자기가 마지막으로 관찰한 경쟁의 구조를 세계의 모형으로 삼는다. 마지막으로 본 경쟁이 입시라면 세계의 모형도 입시가 된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닫힌 계에 계속 속해 있을 수 있다. 학부모 모임이 그렇다. 일주일에 만나는 열 명이 전부 같은 학년 아이를 키우고, 나누는 이야기의 팔 할이 어느 학원이 잘 가르치고 이번 시험이 어땠는가라면, 성적은 자연스럽게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된다. 다른 변수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올 통로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자리에서는 정보의 질도 문제지만 정보의 편중이 더 문제다. 같은 종류의 소식이 열 번 반복되면 그것은 중요한 소식이 된다. 사회생활을 안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단일 변수만 다루는 사회에 속해 있어서 그렇다.

이 함정은 방향을 가리지 않는다. 회사를 다니는 쪽도 자기 회사가 여전히 학벌로 굴러가는 곳이라면 똑같이 한쪽만 보게 된다. 결국 문제는 직장이 있느냐가 아니라 여러 종류의 판을 봤느냐다.

측정되는 것만 보이면 측정되는 것을 최적화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지극히 합리적인 행동이다.

이 지점에서 검증된 자료를 하나 볼 필요가 있다. 1990년대 말 스테이시 데일(Stacy Dale)과 프린스턴대학의 앨런 크루거(Alan Krueger)가 미국 대학 졸업생 자료로 던진 질문이 그것이다. 명문대에 다니면 나중에 돈을 더 버는가. 이 질문이 어려운 이유는 명문대가 애초에 잘될 사람을 골라 뽑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표본을 비틀었다. 같은 학교들에 지원해서 같은 결과를 받은 학생들, 즉 명문대에 붙었는데 안 간 학생과 붙어서 간 학생을 짝지어 비교한 것이다. 결과는 두 집단의 소득이 거의 같다는 것이었다. 2011년에는 자기 보고 소득이 아니라 사회보장국의 실제 소득 기록을 연결해 1976년 입학생과 1989년 입학생을 다시 추적했다. 결론은 유지되었다. 학교의 선발도를 통제하고 나면 학교가 주는 소득 효과는 0에 가까워졌다.

다만 예외가 있었고, 이 예외가 오히려 중요하다. 흑인과 히스패닉 학생, 그리고 부모의 학력이 낮은 집안 출신 학생에게는 명문대 효과가 뚜렷하게 남았다. 물려받은 연결망이 없는 사람에게는 학벌이 연결망을 대신해준다는 뜻이다. 학벌이 아무 쓸모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학벌이 대신해주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결과다.

그렇다면 사람의 성과를 실제로 예측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분야에는 50년 가까이 흔들리지 않은 상식이 하나 있었다. 인지능력이 직무 성과의 가장 강력한 예측 변수라는 것이다. 2022년 미네소타대학의 폴 새킷(Paul Sackett)과 동료들이 이 상식을 갈아엎었다. 기존 연구들이 범위 제한이라는 통계 보정을 잘못 적용해 수치를 부풀려왔다는 것이 요지다. 보정을 바로잡고 다시 계산하자 순위가 바뀌었다. 가장 높은 예측력을 보인 것은 구조화 면접이었고, 그다음이 직무 지식 검사, 이력 자료, 작업 표본이었다. 인지능력은 그 아래였다. 새킷 본인이 이 논문을 자기 경력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이라고 표현했다.

구조화 면접이 무엇을 재는지 생각해보면 이 결과는 덜 놀랍다. 그것은 머리가 얼마나 좋은지를 묻지 않는다. 어려운 상황에서 실제로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묻는다. 갈등이 생겼을 때 무엇을 했는가. 실패했을 때 어떻게 처리했는가. 사람을 설득해야 했을 때 어떤 순서로 움직였는가. 재는 대상이 지식이 아니라 행동의 이력이다.

더 오래된 사례도 있다. 1921년 스탠퍼드의 루이스 터먼(Lewis Terman)은 캘리포니아 아이들 중 지능 지수가 높은 1,528명을 골라 평생을 추적하는 연구를 시작했다. 선발 기준은 140 안팎이었다. 이 아이들은 평균적으로 잘 자랐다. 절반이 대학을 마쳤고, 의사와 변호사와 교수와 기술자가 되었다. 다만 노벨상 수상자는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반면 검사를 받았다가 점수가 모자라 탈락한 아이 둘이 나중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트랜지스터를 만든 윌리엄 쇼클리와 입자물리학의 루이스 앨버레즈다. 나중에 러셀 원(Russell Warne) 같은 연구자들은 이것이 측정의 실패라기보다 확률의 문제라고 반박했다.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기저 확률 자체가 워낙 낮아서, 어떤 기준으로 걸렀어도 놓칠 가능성이 컸다는 것이다. 반박은 타당하다. 그런데 이 반박이 도달하는 결론도 결국 같은 자리다. 그 숫자로는 예측이 안 된다.

학벌이 결정적인 영역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분명히 있다. 자격증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문, 이력서 첫 줄에서 걸러지는 관문, 처음 몇 년간 사람을 배치하는 기준. 여기서는 학교와 성적이 거의 전부다. 문제는 그 문을 통과한 다음이다. 같은 로펌에 들어간 열 명, 같은 병원에 들어간 열 명, 같은 운용사에 들어간 열 명은 이미 학벌이 비슷하다. 변별력이 사라진 자리에서 순위를 만드는 것은 다른 것일 수밖에 없다. 학벌이 중요한 영역일수록 그 안에서는 학벌이 무의미해진다는 뜻이다. 이 구조를 조직 밖에서는 보기 어렵다.

노자는 이 문제를 다섯 개의 짧은 문장으로 정리해두었다. 도덕경(道德經) 27장의 첫머리다. 善行無轍迹, 善言無瑕謫, 善數不用籌策. 잘 가는 사람은 바퀴 자국을 남기지 않고, 잘 말하는 사람은 흠잡을 자리를 남기지 않고, 셈을 잘하는 사람은 산가지를 쓰지 않는다.

여기서 산가지, 즉 주책(籌策)이 무엇인지 알아야 문장이 살아난다. 주판이 널리 퍼지기 전, 사람들은 대나무를 손가락 길이로 잘라 만든 막대 수십 개를 가지고 다녔다. 셈을 할 때는 그것을 바닥이나 셈판 위에 가로세로로 늘어놓았다. 늘어놓은 모양이 자릿수가 되고, 막대를 옮기는 동작이 계산이 되었다. 관청의 회계 담당자 앞에는 항상 이 막대 꾸러미가 있었다. 셈을 한다는 것은 곧 막대를 늘어놓는 일이었다.

노자는 정말 셈에 능한 사람은 그 막대를 꺼내지 않는다고 말한다. 눈으로 보고 알기 때문이다. 막대를 늘어놓는 행위는 계산이 아니라 계산이 남긴 자국이다. 왕필(王弼)은 이 대목에 사물의 수를 그대로 따르므로 형체를 빌리지 않는다는 주석을 달았다. 능력은 도구 안에 있지 않다.

성적표와 등수와 자격증은 능력의 산가지다. 능력 자체가 아니라 능력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자국이다. 자국은 눈에 잘 띄고 세기 쉽고 비교하기 편하다. 능력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국을 관리하기 시작한다. 자국을 늘리기 위해 돈을 쓰고, 자국이 늘어나는 것을 보며 안심한다. 27조 원 중 상당 부분이 이 안심의 값이다.

같은 장의 뒷부분에 이런 구절이 이어진다. 善人者不善人之師, 不善人者善人之資. 잘하는 사람은 못하는 사람의 스승이고, 못하는 사람은 잘하는 사람의 밑천이다. 그리고 이 관계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아무리 똑똑해도 크게 헤맨다고 덧붙인다. 不貴其師, 不愛其資, 雖智大迷. 사람을 자원으로 보는 눈,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서도 가져올 것을 찾아내는 눈을 노자는 능력이라고 부르고 있다. 요즘 말로 옮기면 인간관계 능력인데, 이 능력에는 시험이 없다. 채점표가 없으니 사교육 시장도 형성되지 않는다.

명리학(命理學)에서도 이 구분은 오래된 것이다. 사주에서 인성(印星)은 배우고 자격을 얻는 힘이고, 식상(食傷)은 자기 것을 밖으로 꺼내는 힘이며, 관성(官星)은 조직과 압박을 감당하는 힘이다. 인성만 두터운 사주는 흡수에는 강하지만 배출이 눌린다. 인성이 식상을 극(剋)하기 때문이다. 시험지 앞에서는 강하고 회의실에서는 말이 막힌다. 시험이 사람을 거르는 시대에는 이런 구조가 최상급 사주로 대접받았다. 그 시대가 얼마나 더 갈지는 별개의 문제다.

부부가 밤늦게 학원비를 놓고 다투는 장면을 보면, 다투는 내용은 돈이지만 실제로 부딪히는 것은 각자가 살아온 세계의 크기다. 한쪽은 자국을 세고 있고 다른 한쪽은 자국을 남기지 않은 것들을 기억하고 있다. 대화가 어긋나는 이유는 상대가 틀려서가 아니라 상대가 본 적 없는 것을 근거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한 걸음 더 가면 불편한 자리가 나온다. 바깥세상을 오래 본 사람도 자기가 본 것이 전부라고 믿는 순간, 정확히 같은 함정에 들어간다. 그가 목격한 승진과 실패와 배신은 특정한 시대, 특정한 산업의 표본이다. 학연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본 세대의 결론이 다음 세대에도 유효하다는 보장은 없다. 위계가 무너지고 기계가 실무를 가져가는 지금, 압박을 견디는 능력과 사람을 붙잡는 능력이 어떤 형태로 값이 매겨질지는 그도 본 적 없는 장면이다. 산가지를 늘어놓지 않고도 셈이 되는 사람이 유리하다는 원칙은 남겠지만, 무엇을 셈해야 하는지는 바뀔 것이다.

그래서 남는 질문은 아이에게 무엇을 시킬 것인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가 세고 있는 것이 무엇의 자국인지, 그 자국을 남긴 능력이 20년 뒤에도 값이 있는지. 그 답을 가진 사람은 아직 이 집 안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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