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하는 자리가 주는 착시 우월감, 비판은 왜 똑똑해 보이는가
평가할 수 있는 자리에 앉으면 사람은 조용히 바뀐다. 별점을 매기고 후기를 남기는 기능이 일상 곳곳에 스며든 뒤로, 우리는 누구나 심사위원석에 한 자리씩을 얻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는 순간, 많은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조금 위로 올라선 기분을 느낀다. 남을 깎는 말이 나를 높이는 것처럼 착각하는 이 현상은 개인의 인성 문제라기보다, 평가라는 행위 자체가 인간의 지각에 걸어두는 오래된 함정에 가깝다.
이 함정의 구조는 이미 40년 전에 실험으로 확인되었다. 하버드의 심리학자 테레사 애머빌(Teresa Amabile)이 1983년에 발표한 연구 “명석하지만 잔인한(Brilliant but Cruel)”이 그것이다. 실험은 단순했다. 같은 소설에 대한 두 개의 서평을 준비하되, 하나는 극도로 호의적이고 하나는 극도로 신랄하게 썼다. 내용의 무게가 다르다는 반박을 막기 위해, 연구진은 긍정적 단어를 반의어로 하나씩 바꿔 두 서평의 정보량을 거의 같게 맞췄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물었다. 어느 서평을 쓴 사람이 더 똑똑해 보이는가.

결과는 한쪽으로 기울었다. 신랄한 서평을 쓴 사람은 지적 능력에서 40점 만점에 26.66점을, 호의적인 서평을 쓴 사람은 23.40점을 받았다(F=20.71, p<.001). 문학적 전문성 평가에서도 비판적인 쪽이 앞섰다. 반대로 호감도와 친절함에서는 정반대의 그림이 나왔다. 호의적인 서평자는 친절함에서 27.94점을 받았지만, 신랄한 서평자는 12.49점에 그쳤다(F=49.03, p<.001). 정리하면 이렇다. 비판하는 사람은 더 똑똑해 보이고, 덜 사랑받는다. 칭찬하는 사람은 더 따뜻해 보이고, 덜 예리해 보인다.
여기서 핵심은 한 방향의 착시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헐뜯는 말에서 안목(眼目)을 읽고, 무언가를 칭찬하는 말에서 순진함을 읽는다. 칭찬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비판은 보는 눈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우리의 지각은 자동으로 가정한다. 그래서 똑똑해 보이고 싶은 사람에게는 아주 값싼 전략 하나가 생긴다. 그냥 부정적으로 말하면 된다. 애머빌은 이 현상에 잔인함의 유인(cruelty incentive)이라는 표현을 붙일 만한 여지를 남겨두었다. 지성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클수록, 사람은 흠을 찾는 쪽으로 기운다.
후기와 별점이 보편화된 시대는 이 유인을 모두의 손에 쥐여준 시대다. 예전에는 평론이 소수의 직업이었다. 지금은 배달 음식 하나, 숙소 하룻밤, 낯선 이의 글 한 편에도 우리는 판정을 내린다. 심리학에서 하향 비교(Downward Social Comparison)라고 부르는 오래된 기제가 있다. 나보다 못한 대상을 찾아 견줌으로써 스스로의 위치를 끌어올리려는 마음의 습관이다. 평가하는 자리는 이 하향 비교를 손쉽게 실행하는 버튼과 같다. 별 하나를 깎는 순간, 나는 그 대상보다 위에 서고, 그 위에 선 감각이 잠깐의 우월감으로 돌아온다.
익명성이 더해지면 이 경향은 한층 풀려난다. 심리학자 존 술러(John Suler)가 정리한 온라인 탈억제 효과(Online Disinhibition Effect)는, 얼굴과 이름이 가려진 환경에서 사람들이 평소라면 삼갔을 말을 훨씬 쉽게 내뱉는 현상을 가리킨다. 상대의 표정이 보이지 않고, 내가 누구인지도 드러나지 않으며, 이 말에 책임질 일도 없을 것 같은 자리. 그 자리에서 비판은 안목의 증거라는 착시와 만나면, 지적질은 지성의 옷을 입은 채 거리낌 없이 흘러나온다.
문제는 이 옷이 빌린 옷이라는 점이다. 애머빌의 실험이 실제로 보여준 것은 신랄한 사람이 더 똑똑하다는 사실이 아니다. 신랄한 사람이 더 똑똑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보이는 것과 인 것 사이의 이 틈이 함정의 본체다. 흠을 지적하는 능력과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전혀 다른 근육이다. 서평을 난도질하는 데 드는 품과 소설 한 편을 써내는 데 드는 품이 같을 리 없다. 그러나 심사위원석에 앉은 감각은 이 차이를 지운다. 남의 결과물을 재단하는 동안, 사람은 자신이 그 결과물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도덕경(道德經) 24장은 이런 자리에 대해 짧게 말한다. 자현자불명 자시자불창 자벌자무공 자긍자부장(自見者不明 自是者不彰 自伐者無功 自矜者不長). 스스로를 드러내는 자는 밝지 못하고, 스스로 옳다 하는 자는 뚜렷해지지 않으며, 스스로를 자랑하는 자는 공이 없고, 스스로를 높이는 자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노자(老子)가 겨냥한 것은 자기를 세우려는 몸짓 자체다. 남을 깎아 나를 세우는 일은 결국 자현(自見)의 한 형태다. 밝아 보이려는 동작이 도리어 밝음을 가린다는 것이, 이 구절이 오래 남은 이유다.
흥미로운 것은 애머빌의 원래 연구가 비판을 권하려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녀의 학문적 관심은 오히려 창의성이 어떤 조건에서 살아나는가에 있었다. 냉정한 평가의 시선이 상주하는 환경에서 사람의 창의성이 어떻게 위축되는지를, 그녀는 평생에 걸쳐 연구했다. 비판이 똑똑해 보인다는 그 유혹의 대가로 무엇이 시드는가라는 질문이, 실은 이 연구의 그림자였던 셈이다.
평가하는 자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후기 기능은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고, 판정의 버튼은 더 많은 곳에 놓일 것이다. 다만 그 자리에 앉을 때마다 한 가지는 물어볼 수 있다. 지금 나를 위로 올려주는 이 감각은, 내가 실제로 위에 있어서 생긴 것인가, 아니면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해주는 자리가 잠시 빌려준 것인가. 별 하나를 깎는 손끝에서 올라오는 그 미세한 우월감의 출처를, 사람은 대개 확인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