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sdom

노자와 도덕경: 철학과 생명의 교훈

도덕경을 읽는 시선은 여럿이다.

병법서로 보는 이들이 있다. 삼십장의 “군대가 지나간 곳엔 가시덤불이 자라고, 큰 전쟁 뒤엔 반드시 흉년이 온다”거나 육십구장의 “용병에 이르기를, 나는 감히 주인이 되지 않고 손님이 된다”는 구절을 근거로 삼는다. 손자병법과 함께 읽으면 기묘하게 맞물리는 대목이 적지 않다.

양생서로 보는 이들도 있다. 칠장의 “성인은 자신을 뒤로 하여 오히려 앞서게 되고, 자신을 밖에 두어 오히려 보존된다”는 구절에서 장수의 비결을 찾는다. 무위자연을 몸의 섭생으로 풀어 읽는 방식이다.

권모술수의 책으로 보는 시선도 있다. 육십육장의 “다투지 않으므로 천하가 더불어 다툴 수 없다”는 말을 뒤집으면 가장 정교한 처세술이 된다. 이 독법에 따르면 노자는 주나라의 쇠락 앞에서 뜻을 펴지 못하고 물러난 정치적 패배자다.

철학서로 읽는 이들에게 도덕경은 존재론의 원형이다.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라는 첫 구절부터 언어와 실재의 간극을 짚는다. 헤겔이 도를 만물의 근본이자 천지의 근원이라 평한 것은 서양 형이상학의 눈으로 본 해석이다.

도교에서는 이 책을 삼대 경전의 하나로 삼는다. 도장(道藏)에 수록된 수많은 주석서가 이를 증명한다. 내단 수련자들은 현빈지문(玄牝之門)이나 곡신불사(谷神不死) 같은 구절에서 단법의 요결을 읽어낸다. 같은 글자를 두고 철학자는 우주론을 말하고 수행자는 연정화기(煉精化氣)를 말한다.

정치사상서로 읽는 시선도 있다. 소국과민(小國寡民)을 유토피아의 청사진으로 보는 독법이다. 절성기지(絶聖棄智)를 문명 비판으로 해석하면 근대의 아나키즘과 닿는 지점이 생긴다. 한비자가 도덕경을 법가의 시선으로 주석한 것도 이 맥락에서 읽힌다.

문제는 이 모든 해석이 각기 근거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전체를 담지 못한다는 점이다. 노자가 왜 오천 자를 남겼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대부분의 독법은 부분에 머문다.

사마천의 기록에 따르면 노자는 오래도록 주나라에 있다가 쇠락을 보고 떠났다. 사관으로서 역대 왕조의 흥망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인물이다.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을 적극적 방책 하나 내놓지 않고 관문을 나서면서 오천 자를 남겼다. 소극적 도피라면 글을 남길 이유가 없다. 공자가 그를 두고 용과 같다 했고, 윤희가 가르침을 청했으며, 도교가 그를 태상노군으로 받든 것은 은둔자를 기리는 일이 아니었다.

대도가 무너지면 인의가 나타나고, 지혜가 나오면 큰 거짓이 생긴다고 했다. 그가 떠난 것은 도를 전할 만한 그릇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오천 자는 버린 것이 아니라 열어둔 것이다. 누구든 들어올 수 있도록.

도덕경은 읽는 자의 그릇만큼 담긴다. 장수가 읽으면 전쟁의 도가 보이고, 양생가가 읽으면 섭생의 도가 보이고, 수행자가 읽으면 내단의 요결이 보이고, 철학자가 읽으면 존재의 근거가 보인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되 누구도 다 가져갈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책은 도를 닮았다. 도는 말할 수 없고, 말하면 이미 상도(常道)가 아니라 했다. 해석의 다양함 자체가 이 책의 본성일 수 있다.

린위탕이 말했다. 도덕경을 처음 펼치면 웃음이 나고, 다음엔 그렇게 웃은 자신이 우습고, 결국엔 이 책이 필요해진다고. 비워야 비로소 담기기 시작한다는 평범한 진리가 이 책 앞에서는 다르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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