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sdom

억울함을 끊는 법, 도덕경 79장 좌계가 말하는 것

억울함을 끊으면 인생이 풀린다는 말은 정신승리가 아니라 회계의 문제다. 억울함은 감정이 아니라 이미 지불이 끝난 비용을 장부에서 지우지 못한 상태이고, 그 장부를 붙들고 있는 동안 판단력은 계속 깎여나간다. 일이 안 풀리는 사람들의 말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문장의 주어가 대부분 상대방이다. 상사가 사람을 볼 줄 모른다, 동료가 뒤통수를 쳤다, 집안이 받쳐주지 않았다. 사실관계가 틀렸다는 뜻이 아니다. 대개 맞는 말이다. 문제는 그 말들이 하나같이 청구서 형태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매몰비용(sunk cost)이라는 말은 원래 돈을 두고 쓰던 개념이다. 1985년 오하이오대학의 할 아크스(Hal Arkes)와 캐서린 블루머(Catherine Blumer)가 조직행동과 인간의사결정과정(Organizational Behavior and Human Decision Processes)에 발표한 실험이 이 개념을 확정지었다. 대학 극장 시즌권을 사러 온 사람들에게 무작위로 15달러, 13달러, 8달러의 가격을 매겼다. 공연은 똑같았고 좌석도 똑같았다. 다른 것은 이미 지불한 금액뿐이었다. 이후 여섯 달 동안 15달러를 낸 사람들이 할인을 받은 사람들보다 눈에 띄게 더 많은 공연을 보러 왔다. 앞으로 얻을 즐거움은 모두에게 동일한데, 이미 사라진 돈이 미래의 행동을 결정한 것이다. 두 사람은 그 동력을 손해를 인정하기 싫은 마음, 낭비했다는 사실을 자기에게 시인하기 싫은 마음으로 설명했다.

억울함은 이것의 감정판이다. 내가 이만큼 했는데 저쪽은 이것밖에 안 했다는 계산이 머릿속에 남아 있고, 그 차액이 언젠가 정산될 것이라는 기대가 붙어 있다. 정산은 오지 않는다. 애초에 상대는 그런 장부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다. 장부는 나 혼자 쓴 것이고, 나 혼자 읽고, 나 혼자 이자를 계산한다. 그 사이 원래 문제를 풀거나 다음 수를 두는 데 써야 할 머리가 왜 하필 나였는가를 되감는 데 쓰인다. 억울함이 깊어질수록 쓸 수 있는 판단의 폭이 좁아지고, 폭이 좁아지면 선택지가 줄고, 선택지가 줄면 다시 억울할 일이 생긴다. 이 구조는 시장에서 물린 종목을 붙들고 있는 사람의 심리와 정확히 같다. 손실이 확정되는 순간이 무서운 게 아니라, 내가 틀렸다고 인정하는 순간이 무서운 것이다.

도덕경(道德經) 79장은 이 장부를 다룬다. 和大怨 必有餘怨 安可以爲善 是以聖人執左契 而不責於人 有德司契 無德司徹. 큰 원망은 풀어도 반드시 앙금이 남으니 그것을 어찌 잘된 일이라 하겠는가. 그래서 성인은 좌계를 쥐고 있으면서도 남에게 따지지 않는다. 덕이 있는 자는 계약을 맡고, 덕이 없는 자는 징수를 맡는다.

좌계(左契)가 무엇인지부터 봐야 이 문장이 읽힌다. 종이 계약서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약속한 내용을 대나무나 나무판에 새긴 다음 그것을 세로로 쪼갰다. 쪼갠 두 조각을 각자 하나씩 나눠 갖는다. 훗날 갚을 때가 되면 두 조각을 가져와 맞춰본다. 쪼개진 단면의 결이 정확히 들어맞으면 진짜 계약이고, 어긋나면 가짜다. 나무의 결은 흉내 낼 수 없으니 위조가 불가능한 방식이었다. 이 쪼갠 물건을 부신(符信)이라 하고, 왼쪽 조각인 좌계는 받을 사람이, 오른쪽 조각인 우계(右契)는 갚을 사람이 지녔다. 그러니 좌계를 쥐고 있다는 말은 지금 말로 하면 차용증 원본을 손에 들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而不責於人의 責은 꾸짖는다는 뜻이 아니라 청구한다, 받아낸다는 뜻이다. 문장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게 된다. 성인은 차용증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들고 상대의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이 표현이 정확한 지점이 여기다. 노자가 말하는 성인은 채권을 포기한 사람도, 없던 일로 한 사람도 아니다. 증서는 여전히 손에 있다. 받을 것이 있다는 사실도, 그 액수도 정확히 알고 있다. 다만 청구하는 행위를 하지 않을 뿐이다. 억울함이 없어서가 아니라, 두드리는 행위 자체가 자기 소모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뒤에 붙은 무덕사철(無德司徹)의 徹은 주나라의 조세 제도를 가리킨다. 덕이 없는 자는 세리처럼 군다는 말이다. 받을 것을 기어이 받아내는 사람의 자리가 왜 낮은 자리인지, 세금 걷으러 다니는 사람을 떠올려보면 짐작이 간다.

이 구절의 앞부분이 더 냉정하다. 큰 원망은 화해시켜도 앙금이 남는다. 완전한 정산은 불가능하다는 선언이다. 사과를 받아도, 상대가 벌을 받아도, 세상이 내 편을 들어줘도 남는 것이 있다. 그래서 애초에 원망이 쌓이는 구조로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고, 이미 들어갔다면 정산을 포기하는 편이 남는 장사라는 것이다.

지난 7월 13일 홍콩에서 시남생(施南生)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75세, 다발성 장기부전이었다. 1984년 서극(徐克)과 함께 전영공작실(電影工作室)을 세워 영웅본색, 천녀유혼, 황비홍 시리즈를 만들어낸 사람이다. 서극이 만들고 그가 돈과 배급과 해외 판로를 맡았다. 두 사람은 1978년에 만나 1996년에 결혼했고, 아이를 갖지 않기로 했다.

2014년 시남생은 기자들에게 이미 이혼했다고 담담히 확인했다. 당시 서극과 서른 살 아래 여성 조수의 관계가 계속 보도되던 시점이었고, 기자들이 원한 것은 제3자에 대한 확인이었다. 그는 두 사람 사이의 일은 두 사람 사이의 일이며 제3자에게 설명할 것이 아니라는 취지로 답했다.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이후 서극이 이혼 직후 훨씬 젊은 조수와 아이를 낳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지킨 약속과 상대가 지키지 않은 약속의 차액은 명백했다. 좌계는 그의 손에 있었다.

그는 청구하지 않았다. 대신 계속 같이 일했다. 지취위호산의 제작자 자리에 그의 이름이 그대로 남았고, 2025년 제43회 홍콩금상장에서 두 사람은 나란히 평생공로상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서극은 이 두 상은 모두 그의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억울함을 정산하지 않은 사람이 결국 판을 계속 굴렸고, 판을 굴렸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자기 이름으로 남았다. 이것이 감정을 억눌러 얻은 결과인지, 애초에 남의 반응에 기대를 걸어두지 않아서 생긴 결과인지는 구별할 필요가 있다. 전자는 참는 것이고 후자는 계산 방식이 다른 것이다.

억울함이 반복되는 사람에게는 대개 공통된 습관이 있다. 교환을 비대칭으로 설계해놓고 대칭적인 반응을 기대한다. 동료의 일을 도와주면서 다음에 그가 내 편에 서주기를 기대한다. 이 기대는 계약이 아니다. 상대는 아무 데도 서명한 적이 없다. 부신으로 치면 우계를 건네준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나 혼자 좌계를 만들어 쥐고 있으므로, 상대가 계약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배신으로 읽힌다. 도와준 일은 이미 끝난 일이고, 그때의 결정은 그때의 내가 한 것이다. 상대를 내가 원하는 인간형으로 상정하지 않고 실제로 그런 사람으로 관찰했다면 애초에 다른 선택을 했을 것이다. 억울함을 끊는 첫 단계는 상대의 인간성을 다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내 관찰이 부실했음을 장부에 적는 것이다.

그다음은 방향을 바꾸는 일이다. 감정을 향해 가던 것을 목적을 향해 돌린다. 억울한 일이 생겼을 때 누구에게 말하고 싶어지는 충동은 그 자체로 손실 확정의 회피다. 말할수록 사건은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가 되면 반복 재생이 쉬워지고, 반복 재생이 쉬워지면 그 회로가 굳는다. 오래 시장을 보면서 확인한 것이 하나 있다면, 자기 손실을 자주 설명하는 사람일수록 손실 구간이 길다는 것이다. 설명하는 동안에는 청산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실무적으로는 세 가지가 남는다. 첫째, 감정이 올라올 때 사람에게 가지 말고 몸으로 처리한다. 뛰든 걷든 물리적으로 태워 없앤다. 언어화하지 않은 감정은 대개 사흘을 넘기지 못한다. 둘째, 억울함을 질문으로 바꾼다. 이 판에서 내 실제 이익은 무엇이었나, 상대의 실제 요구는 무엇이었나, 내가 지금 쥐고 있는 패는 무엇인가. 감정이 데이터로 바뀌는 순간 대부분의 억울함은 처리 대기 항목 정도로 축소된다. 셋째, 이해받으려는 마음을 내려놓는다. 상사는 내 야근을 보지 않는다. 배우자는 내 희생의 크기를 모른다. 성인의 세계는 결과로 정산되지 노고로 정산되지 않는다. 이해를 구하지 않으면 이해를 구하는 데 들어가던 힘이 통째로 돌아온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가 걸린다. 억울함을 완전히 지운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손해 봤는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시남생이 좌계를 쥐고도 청구하지 않았다는 말은 그가 채권의 존재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잊은 것과 청구하지 않기로 한 것은 다르다. 앞의 것은 무감각이고 뒤의 것은 선택이다. 노자가 남은 앙금이 있다고 굳이 적어둔 이유도 그쯤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쪼개진 나무 조각을 언제까지 들고 있어야 하는가. 태워 없애면 홀가분하겠지만 다음에 같은 종류의 계약을 또 맺게 된다. 들고 있으면 무겁고, 가끔 그것을 흔들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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