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이 어려운 이유, 감정이 사실을 이길 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이 어려운 이유는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상당수의 경우, 상대는 사실을 감정 아래에 두고, 논리를 자기 입장 아래에 둔다. 이 순서가 뒤집힌 사람에게는 아무리 정확한 자료를 건네도 소용이 없다. 그에게 자료는 판단의 재료가 아니라, 이미 정해진 결론을 지키는 데 쓰이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흔히 이런 사람을 인지가 낮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이 표현은 오해를 부른다. 인지가 낮다는 것을 머리가 나쁘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문제의 절반을 놓친다. 여기서 낮다는 것은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순서의 문제다. 감정이 사실보다 먼저 오고, 내 입장이 논리보다 먼저 온다. 이 순서가 고정된 사람은 지능이 높아도 똑같이, 때로는 더 심하게 이 함정에 빠진다.
이 점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연구가 있다. 예일대 로스쿨의 댄 카한(Dan Kahan)과 동료들이 2017년 학술지 Behavioural Public Policy에 발표한 실험이다. 연구진은 미국 성인 약 1,100명에게 2×2 표로 정리된 실험 데이터를 주고, 이 숫자가 무엇을 뒷받침하는지 판단하게 했다. 절반에게는 그 숫자가 피부 발진에 바르는 크림의 효과를 다룬 연구 결과라고 알려주었다. 나머지 절반에게는 완전히 똑같은 숫자를, 총기 규제가 범죄율에 미친 영향을 다룬 연구 결과라고 알려주었다. 숫자는 한 글자도 다르지 않았다. 바뀐 것은 그 숫자에 붙은 이름표뿐이었다.
피부 크림 조건에서는 예상대로였다. 수리력(numeracy), 즉 수치를 다루는 능력이 높은 사람일수록 표를 정확히 읽어냈다. 여기까지는 상식과 맞는다. 문제는 총기 규제 조건이었다. 똑같은 숫자인데도 사람들의 답이 정치 성향에 따라 갈렸고, 정확도는 오히려 떨어졌다. 더 놀라운 것은 그다음이다. 수리력이 높은 사람들에게서 이 편향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커졌다. 계산을 잘하는 사람일수록, 자기 정치 성향에 맞는 결론이 나오는 방향으로 숫자를 더 능숙하게 해석해냈다. 데이터가 총기 규제가 효과 있다고 말하면 진보 성향의 고수리력자가 정답을 잘 맞혔고, 데이터가 효과 없다고 말하면 보수 성향의 고수리력자가 정답을 잘 맞혔다. 같은 표를 놓고 말이다.
이 결과가 무서운 이유는, 논리력이 편향을 막아주는 방패가 아니라 편향을 정교하게 만드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머리 좋은 사람은 틀린 결론을 더 그럴듯하게 방어한다. 판사가 되어야 할 이성이 변호사로 고용되는 것이다. 의뢰인은 이미 정해져 있다. 자기 입장이다.
여기서 소통이 왜 그렇게 어려운지가 드러난다.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이 사실은 서로 다른 게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쪽은 정보를 주고받아 더 정확한 결론에 도달하려는 게임을 한다고 믿는다. 다른 한쪽은 자기 입장이라는 영토를 지키는 게임을 하고 있다. 앞사람이 사실을 하나 더 내밀수록, 뒷사람에게는 방어해야 할 공격이 하나 더 늘어난다. 그래서 좋은 자료를 제시할수록 상대가 더 완강해지는 기이한 광경이 벌어진다. 정보의 문제가 아니라 게임의 문제다. 같은 탁자에 앉아 다른 규칙으로 다른 승부를 보고 있으니, 정보가 아무리 정확해도 합의에 이를 길이 없다.
감정이 사실보다 먼저 온다는 것도 같은 구조다. 감정은 결론을 미리 정해놓는 힘이 있다. 어떤 사안에 대해 불쾌함이나 두려움이 먼저 자리를 잡으면, 그다음에 들어오는 사실들은 그 감정을 확인해주는 것만 통과하고 반박하는 것은 걸러진다. 본인은 냉정하게 판단한다고 믿지만, 그 냉정함 자체가 이미 감정이 세워둔 방향 위에서 작동한다. 화가 난 사람은 자기가 화나서 이런 결론을 내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결론이 옳으니까 화가 났다고 생각한다. 원인과 결과가 뒤바뀐 채로, 감정은 사실의 옷을 입는다.
이 지점에서 오래된 문헌 하나가 떠오른다. 노자는 도덕경 70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吾言甚易知, 甚易行, 天下莫能知, 莫能行. 내 말은 매우 알기 쉽고 행하기도 쉬운데, 세상은 알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한다. 이어지는 구절이 핵심이다. 言有宗, 事有君, 夫唯無知, 是以不我知. 말에는 근원(宗)이 있고 일에는 주재자(君)가 있는데, 사람들이 그 근원을 알지 못하기에 나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노자가 짚은 것은 정확히 우리가 본 그 구조다. 소통의 실패는 말의 표면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말은 쉽다. 실패는 그 말을 지배하는 근원의 층위에서 일어난다. 듣는 사람이 그 근원을 잡지 못하면, 아무리 쉬운 말도 닿지 않는다. 그리고 오늘의 언어로 옮기면, 그 근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의 감정이고 입장이다. 말은 표면이고, 판단을 지배하는 것은 그 밑에 앉은 주재자다. 주재자가 사실이 아니라 감정일 때, 표면에서 오가는 어떤 정확한 말도 그 밑을 바꾸지 못한다.
노자는 그래서 나를 아는 자는 드물다(知我者希)고 담담하게 인정하고, 성인은 거친 베옷을 입은 채 옥을 품는다(被褐懷玉)는 문장으로 장을 닫는다. 모두에게 이해받기를 포기한 자리다. 옥을 품었으되 굳이 꺼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을 체념으로 읽을 수도 있고, 다른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소통이 가능한 상대와 불가능한 상대를 구분하는 감각, 그리고 불가능한 쪽에 옥을 낭비하지 않는 절제로 읽을 수도 있다.
시장에서 오래 사람을 상대하다 보면 이 구분이 실전 감각이 된다. 협상이든 거래든, 상대가 지금 사실을 검토하는 중인지 아니면 입장을 방어하는 중인지를 초반에 읽어내지 못하면 시간과 자료를 헛되이 쏟게 된다. 정말로 사실을 저울질하는 상대에게는 자료가 힘을 발휘한다. 입장을 지키는 상대에게 자료를 들이미는 것은 오히려 그를 무장시키는 일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근거가 아니라, 그의 감정과 입장이라는 근원을 먼저 건드릴 수 있느냐, 혹은 그 대화를 이어갈 가치가 있느냐에 대한 판단이다. 30년 넘게 지켜보며 확인한 한 가지가 있다면, 대화가 안 되는 사람을 대화로 바꾸려는 시도가 가장 값비싼 낭비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가 남에게만 해당하는 것일까. 카한의 실험에서 편향이 가장 컸던 쪽은 계산에 서툰 사람이 아니라 능숙한 사람이었다. 자기가 이성적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일수록, 그 이성을 자기 입장의 변호에 동원할 무기 또한 크다. 다음에 어떤 사안 앞에서 나는 그저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라는 느낌이 선명하게 들거든, 그 선명함이 어디에서 오는지 잠깐 멈춰 볼 일이다. 그 느낌은 사실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고, 이미 정해진 입장이 사실의 옷을 입고 내는 목소리일 수도 있다. 둘을 구분하는 일은 남에게는 쉽고 자기에게는 어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