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sdom

부는 왜 사람을 냉혹하게 만드는가, 그리고 경외감이라는 처방

인간의 수명과 건강을 가르는 것은 결국 연결(connection)의 문제다. 캘리포니아대 버클리(UC Berkeley)의 심리학자 대커 켈트너(Dacher Keltner)의 이십여 년 연구를 한 줄로 줄이면, 사람은 타인과, 그리고 자기보다 큰 무언가와 이어져 있을 때 오래 건강하게 살고, 그 연결이 끊길 때 몸부터 상한다는 것이다. 부가 사람을 냉혹하게 만드는 일도, 경외감(敬畏感, awe)이 몸의 염증을 가라앉히는 일도 결국 이 하나의 축 위에서 일어난다.

이 연결을 담당하는 것이 공감(empathy)이다. 켈트너가 강조하는 공감은 감상적인 착함이 아니라, 뇌가 타인의 경험을 자기 안에서 흉내 내는 구체적인 작동이다. 상대가 아파하면 나의 뇌도 그 아픔을 잠깐 시뮬레이션하고, 그 신호가 미주신경(迷走神經, vagus nerve)을 타고 심장과 호흡과 옥시토신(oxytocin) 분비로 이어진다. 이 회로가 살아 있을 때 사람은 서로를 향해 열리고, 몸도 편안해진다. 문제는 이 회로가 쓰지 않으면 무뎌진다는 데 있다.

부와 권력이 사람을 냉혹하게 만든다는 켈트너의 관찰이 무서운 것은, 그 냉혹함이 타고난 성품이 아니라 나중에 만들어진 상태라는 점 때문이다. 부자가 처음부터 차가웠던 것이 아니라, 부와 권력을 쥐는 과정에서 공감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원리는 단순하다. 남에게 기댈 필요가 없어진 사람은 남의 마음을 읽을 이유도 줄어든다. 그렇게 타인을 시뮬레이션하는 일을 멈추면, 켈트너의 표현대로 공감 결핍(empathy deficit)이 생긴다. 이것은 도덕의 타락이 아니라 신경의 위축에 가깝다. 실제로 권력을 느끼게 한 집단은 뇌의 거울 신경(mirror neuron) 활동이 떨어졌고, 타인의 감정을 알아맞히는 과제에서 오류가 약 50퍼센트 더 많았다. 그의 초기 실험에서도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표정에 담긴 감정을 정확히 읽지 못했고, 십 달러를 낯선 이와 나누게 하면 더 적게 가진 사람이 더 많이 내주었다. 가진 자는 세계와의 연결선을 하나씩 놓으면서, 그만큼 자기 자신을 크게 부풀린다.

노자(老子)는 이 흐름을 이미 도덕경(道德經) 아홉 장에 적어두었다. 金玉滿堂, 莫之能守. 富貴而驕, 自遺其咎. 금과 옥이 집에 가득해도 지킬 수 없고, 부귀하면서 교만하면 스스로 허물을 남긴다는 것이다. 이천오백 년 전에는 그 허물이 무엇인지 도덕의 언어로만 말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을 측정할 수 있다. 부풀어 오른 자아가 잃는 것은 결국 타인과의 연결이고, 끊어진 연결은 고립과 무딘 공감으로, 다시 몸의 부담으로 돌아온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미국의 기대수명은 2019년 약 78.8세에서 2021년 76.1세로 떨어졌는데, 팬데믹이라는 계기 아래에는 이렇게 서로에게서 떨어져 나간 사회가 깔려 있었다.

그렇다면 병이 자아의 팽창과 연결의 단절이라면, 처방은 자아를 다시 줄이고 연결을 되살리는 모든 것이 된다. 가까운 처방은 접촉과 선의다. 따뜻한 손길, 부드러운 미소, 다가서는 몸짓은 옥시토신을 늘리고, 연민을 베푸는 행위는 몸 안에서 화학적 반응을 일으켜 다시 더 많은 연민을 부른다. 켈트너가 인간을 두고 선하게 태어났다(born to be good)고 말한 것은, 나눔과 협력이 생존에 유리하도록 진화가 몸에 새겨 넣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처방의 더 큰 형태가 경외감이다.

경외감은 자신보다 거대하고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 앞에서 일어나는 감정이다. 켈트너는 이때 사람이 작은 자아(small self)를 경험한다고 말한다. 광활한 자연, 별이 가득한 하늘, 웅장한 음악, 신(神)적인 것, 혹은 타인의 도덕적 아름다움 앞에서 나라는 존재의 경계가 흐려지고, 대신 나를 둘러싼 세계와의 연결이 선명해진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방향이 부와 권력이 만드는 방향과 정확히 반대라는 점이다. 부는 자아를 부풀려 세계와 나를 떼어놓고, 경외는 자아를 줄여 나를 세계에 붙인다.

그래서 경외감의 효과는 항염증 하나에 머무르지 않는다. 켈트너와 스텔러(Jennifer Stellar) 등이 2015년 학술지 이모션(Emotion)에 발표한 연구는 경외감이 염증성 사이토카인(cytokine), 특히 인터루킨6(IL-6)이 낮은 상태와 연결된다는 것을 보였고, 이는 여러 긍정 감정 가운데 경외감에서 두드러졌다. 그러나 같은 해 피프(Paul Piff) 등이 이천여 명을 대상으로 한 다섯 건의 연구(JPSP, 2015)는 그 반대편의 효과를 보여준다. 경외를 느낀 사람은 더 관대해졌고, 더 윤리적으로 판단했으며, 특권의식(entitlement)이 줄었다. 큰 나무들이 늘어선 숲에 잠시 서 있게 한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더 잘 돕고 덜 이기적으로 굴었다. 부가 부풀린 바로 그 특권의식을 경외감이 깎아낸다는 것이다. 몸의 염증이 낮아지는 것도, 마음이 너그럽고 행복해지는 것도, 자아가 제 크기로 돌아오면서 세계와 다시 이어지는 하나의 사건이 남긴 서로 다른 흔적일 뿐이다.

여기서 인과율(因果律)이 미신이 아니라 과학이라는 말의 뜻이 분명해진다. 자아를 부풀리면 연결이 끊기고 공감이 무뎌지며 몸이 상하고, 자아를 비우면 연결이 살아나고 마음이 열리며 몸이 편안해진다. 이것은 하늘의 상벌이 아니라, 원인이 결과로 돌아오는 자연의 결이다. 도교(道敎)가 허(虛)와 무위(無爲), 곧 자기를 비움을 오래도록 말해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연에 대한 경외, 자기보다 큰 것에 대한 경외는 감상이 아니라, 부풀어 오르기 쉬운 인간이 제 크기로 돌아가는 오래된 방법이었다. 다만 그것을 알아채려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비우는 정(靜)의 순간이 필요하다. 사람이 마지막으로 무언가 앞에서 숨을 멈추었던 때가 언제였는지, 그 기억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를 헤아려보는 데서 무언가는 시작될지도 모른다.

댓글에 인색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