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sdom

기회는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오지 않는다

기회를 잡기 어려운 이유는 대개 기회가 없어서가 아니다. 기회가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오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기회가 번쩍이는 표식을 달고 문을 두드릴 것이라 기대하지만, 실제로 오는 기회는 대부분 초라하거나 우스꽝스럽거나 미심쩍은 얼굴을 하고 있다. 그래서 기회는 와도 그냥 지나간다. 뒤늦게 돌아보며 그것이 기회였음을 아는 것이 인간이 반복해온 일이다.

이미 20 년이 넘은 전 상황을 떠올려 본다.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한다고 치자. 나는 전국의 작은 가게 주인들을 다 모아서 하나의 장터를 만들 것이고, 그 장터에서 이들이 전 세계에 물건을 팔게 할 것이다. 함께 하겠는가. 듣는 사람 대부분의 첫 반응은 정해져 있다. 저 사람 제정신인가. 영어 강사 출신이고 사업을 성공시켜본 적도 없는 사람이 그리는 그림이라면 더욱 그렇다. 실제로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마윈이었다. 1999년 그는 항저우의 자기 아파트에 친구와 동료 열여덟 명을 모아놓고 이 구상을 설명했다. 중국 소상공인을 인터넷으로 세계 시장에 연결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중국은 인터넷 기반이 걸음마 단계였고 전자상거래라는 말 자체가 낯설었다. 그의 구상은 허황되게 들렸고 투자자 대부분이 회의적이었다.

기록으로 남은 부분이 흥미롭다. 마윈은 초기에 서른 곳이 넘는 벤처 투자사로부터 거절당했다. 어떤 유명 엔젤 투자자는 저런 고집을 부리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판단해 투자를 거절했고, 훗날 그 결정을 크게 후회했다. IDG의 한 임원은 바이두와 씨트립에는 투자하면서 알리바바를 놓친 것을 두고 우리의 가장 큰 실패라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놓친 사람들은 눈이 어두운 사람들이 아니었다. 인터넷 기업만 골라서 투자하는 것이 직업인, 그 분야에서 가장 밝은 눈을 가졌다고 평가받던 전문가들이었다. 그런데도 못 봤다. 정작 5분 만에 투자를 결정한 사람은 손정의였다. 같은 대상을 앞에 두고 누구는 미친 소리를 들었고 누구는 판을 봤다.

왜 밝은 눈이 못 보는가. 심리학에 기능적 고착(functional fixedness)이라는 개념이 있다. 어떤 사물을 그것의 익숙한 용도로만 보게 되어, 다른 쓸모를 떠올리지 못하는 인지의 굳음을 말한다. 1945년 게슈탈트 심리학자 카를 던커(Karl Duncker)가 촛불 문제라는 실험으로 이것을 보여줬다. 참가자에게 초 하나, 압정이 든 상자 하나, 성냥 한 갑을 주고, 촛농이 아래 탁자에 떨어지지 않도록 초를 벽에 붙이라고 한다. 대부분은 압정으로 초를 벽에 직접 박으려 하거나 초를 녹여 벽에 붙이려 했다. 상자 자체를 벽에 고정해 초 받침으로 쓸 생각을 한 사람은 드물었다. 상자가 압정을 담는 통으로 제시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그 상자는 통이라는 용도에 붙박여 버린 것이다. 이 실험의 결정적인 부분은 후속 연구에 있다. 1962년 샘 글럭스버그(Sam Glucksberg)는 같은 문제를 내되 압정을 상자 밖에 따로 놓아두었다. 상자가 통이라는 역할을 벗은 채 빈 상자로 놓이자, 사람들은 훨씬 쉽게 그것을 받침으로 떠올렸다. 사물이 익숙한 껍데기를 쓰고 있느냐 아니냐가, 그 안의 쓸모를 보느냐 못 보느냐를 갈랐다.

기회도 이와 다르지 않다. 기회가 압정 통이라는 익숙한 형태를 하고 나타나면, 사람들은 그것을 압정 통으로만 보고 지나친다. 그 안에 받침이라는 쓸모가 들어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마윈의 구상은 당시 사람들 눈에 실패해본 영어 강사의 허풍이라는 익숙한 껍데기를 쓰고 있었다. 껍데기가 눈을 붙들었고, 껍데기 안의 판은 보이지 않았다. 전문가일수록 이 굳음이 심해질 수 있다는 점이 역설적이다. 익숙한 분류 체계를 많이 가진 사람은 새로 온 것을 기존 서랍 어딘가에 재빨리 집어넣는다. 서랍에 들어가는 순간 그것은 이미 아는 것이 되고, 아는 것이 되는 순간 더 들여다볼 이유가 사라진다.

장자에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소요유편(逍遙遊篇)에서 혜시가 장자에게 투덜댄다. 위나라 왕이 준 씨앗을 심었더니 다섯 섬들이나 담을 만한 큰 박(大瓠)이 열렸는데, 물을 담자니 무거워 들 수 없고 쪼개어 바가지로 쓰자니 너무 넓고 얕아 담기지 않더라. 쓸모가 없어 부숴버렸다. 장자가 답한다. 그대는 큰 것을 쓸 줄 모르는구나. 어찌하여 그 큰 박으로 배를 만들어 강과 호수에 띄우고 노닐 생각은 하지 않고, 넓고 얕아 담기지 않는다고 근심하는가. 혜시의 잘못은 박을 못 알아본 데 있지 않다. 박을 바가지라는 익숙한 용도로만 본 데 있다. 물을 담고 국을 뜨는 그릇이라는 서랍에 큰 박을 넣으려니 들어가지 않았고, 들어가지 않으니 쓸모없다고 결론지었다. 큰 것은 익숙한 척도로 재면 언제나 쓸모없어 보인다. 척도가 작기 때문이지 물건이 작기 때문이 아니다.

시장을 오래 지켜본 사람이라면 이런 장면을 자기 분야에서 여러 번 마주친다. 반도체가 그렇다. SK하이닉스는 한때 문을 닫기 직전까지 갔던 회사였다. 채권단 관리를 받다가 2011년 SK그룹에 인수될 무렵, 그 주식은 대단할 것 없는 자리에 있었다. 그 시절 하이닉스를 떠난 기술자나, 하이닉스라는 이름을 시들하게 보던 사람이 지금의 이 회사를 상상할 수 있었을까. 인공지능 시대가 열리며 고대역폭 메모리(HBM, High Bandwidth Memory)가 핵심 부품으로 떠올랐고, 이 분야를 앞서 잡은 하이닉스는 2024년 창사 이래 최대인 23조 원대 영업이익을 냈다. 2026년 6월에는 사상 처음으로 코스피 시가총액 1위에 올라 삼성전자를 제쳤다. 만년 2위가 40년 만에 거인을 넘어섰다는 표현이 나왔다. SK가 인수할 때 주당 평균 이만 삼천 원 남짓이던 주식은 몇 해 뒤 그 백 배 가까운 자리까지 올라갔다. 같은 반도체 회사인 삼성전자와의 운명을 가른 것은 규모나 역사가 아니라, AI라는 흐름에 얼마나 붙어 있었느냐 하나였다.

여기서 한 가지가 분명해진다. 그 회사에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들, 즉 그 분야를 가장 잘 아는 전문가들조차 이 흐름을 미리 알아본 경우는 드물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잘 알기 때문에 익숙한 판단이 앞섰다. 메모리는 값이 오르내리는 경기 산업이라는 오래된 서랍, 하이닉스는 이류라는 오래된 서랍이 눈을 가렸다. 서랍이 많을수록 새 물건은 빠르게 분류되고, 분류되는 순간 관찰은 멈춘다.

역사를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도 같은 구조가 보인다. 사기(史記)에 나오는 여불위는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던 진나라의 몰락한 왕손 자초를 보고 이것은 사둘 만한 기이한 재화라고 판단했다. 남들 눈에 자초는 쓸모를 다한 인질, 잊혀 마땅한 실패한 왕족이라는 익숙한 껍데기를 쓰고 있었다. 여불위만이 그 껍데기를 벗겨 안을 봤고, 훗날 그 자초의 아들이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이 되었다. 여불위가 남과 달랐던 것은 정보가 많아서가 아니다. 같은 사람을 두고 남들과 다른 서랍을 열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익숙한 얼굴을 하고 눈앞을 스쳐가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허황되어 보여서, 초라해 보여서, 이미 아는 것 같아서 그냥 지나치는 것들. 그것이 압정 통인지 초 받침인지, 바가지인지 배인지는 지나간 뒤에야 드러난다.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오지 않는 것을 어떻게 알아볼 것인가. 이 물음 앞에서 밝은 눈과 어두운 눈의 차이가 무엇인지, 각자 한 번쯤 자기 서랍을 열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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