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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가 낮은 사람은 왜 고집이 센가 – 장자 추수편과 더닝 크루거 효과

인지가 낮은 사람은 고집이 세다. 이것은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인지 구조의 문제다. 자기가 아는 세상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 사람에게, 그 바깥의 이야기는 소음일 뿐이다.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들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인지 경직성(Cognitive Rigidity)이라 부르고, 동양 고전에서는 2,300년 전에 이미 같은 구조를 정확히 짚어놓았다.

장자(莊子) 추수편(秋水篇)에 우물 안 개구리 이야기가 나온다. 井蛙不可以語於海者 拘於虛也. 우물 안 개구리에게 바다를 말할 수 없는 것은, 사는 곳에 갇혀 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장자는 이것을 어리석음이라 하지 않았다. 갇혀 있기 때문이라 했다. 개구리가 바보라서 바다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우물이 개구리의 전부이기 때문에 바다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이 구조를 이해하면 인지가 낮은 사람과의 대화가 왜 안 되는지가 보인다. 대화라는 것은 서로 다른 세계가 만나는 일이다. 내 세계와 당신의 세계가 다를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야 대화가 시작된다. 그런데 인지가 낮은 사람은 이 전제 자체가 없다. 자기 우물이 세상의 전부이므로, 다른 세계의 존재를 인정할 근거가 없다. 근거가 없으니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것이 밖에서 보면 고집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사람들이 종종 성실하다는 것이다. 성실함은 좋은 덕목이지만, 인지가 낮은 사람의 성실함은 좀 다르다. 정해진 틀 안에서 반복하는 데 능하다. 한번 세운 기준을 흔들림 없이 지킨다. 문제는 그 기준 자체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준을 세울 때 가용한 정보가 충분했는지, 시간이 흐르면서 세상이 바뀌지는 않았는지, 혹시 처음부터 잘못 세운 것은 아닌지. 이런 질문을 하려면 자기 틀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그런데 바깥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니, 질문이 생기지 않는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메타인지(Metacognition)가 정확히 이 능력이다. 자기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인식하는 능력. 2024년 Frontiers in Psychology에 실린 연구에 따르면, 인지 경직성은 단순히 생각이 딱딱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 타인에 대한 인식, 그리고 신경인지적 과정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구조적 특성이다.

공부를 안 하는 것도 이 구조에서 나온다. 공부라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자기가 모르는 것이 있다는 인정에서 출발한다. 모른다는 인정이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 공부를 한다. 반대로, 자기가 아는 것이 충분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공부할 이유가 없다. 과거에 배운 것, 경험으로 쌓은 것, 그것이 자기 세계의 전부이고 그 세계가 완전하다고 느끼니까.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면 기존 세계와 충돌이 생기는데, 그 충돌을 해결하는 방법이 두 가지다. 기존 세계를 수정하거나, 새 정보를 버리거나. 인지가 낮은 사람은 거의 예외 없이 후자를 택한다.

이것은 지능과 다른 문제다. 1999년 코넬대학교의 심리학자 데이비드 더닝(David Dunning)과 저스틴 크루거(Justin Kruger)는 능력이 낮은 사람일수록 자기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른바 더닝-크루거 효과(Dunning-Kruger Effect)다. 이 연구가 말하는 핵심은 단순하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자기에게 능력이 부족하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할 능력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2025년에 발표된 쌍둥이 연구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IQ 분포에서 하위권에 있는 사람일수록 자기 인지적 한계를 인식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결과가 나왔다. 메타인지 능력 자체에 유전적 요인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머리가 좋은 사람 중에도 인지가 낮은 사람이 있다. 학력이 높은 사람 중에도 있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 중에도 있다. 오히려 어떤 영역에서 성공한 사람이 더 위험할 때가 있다. 한 분야에서 잘 작동했던 세계관을 다른 분야에도 적용하면서, 그것이 보편적으로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25년 넘게 사람을 관찰하면서 본 패턴이 있다. 한 분야에서 크게 성공한 사람이 다른 분야에서 유독 완고한 경우가 많다. 성공 경험이 자기 판단에 대한 과도한 신뢰를 만들고, 그 신뢰가 새로운 정보의 유입을 차단한다. 행동경제학에서는 이것을 과잉확신 편향(Overconfidence Bias)이라 부른다. 한 영역의 전문성이 다른 영역에서의 겸손을 삼켜버리는 현상이다.

근자감이라는 말이 있다. 근거 없는 자신감. 인지가 낮은 사람의 자신감이 정확히 이것이다. 그런데 당사자에게는 근거가 있다. 자기 우물 안에서는 모든 것이 설명되니까. 우물의 벽이 세계의 끝이고, 우물 위로 보이는 하늘이 하늘의 전부이고, 우물 바닥의 물이 물의 전부다. 이 안에서 개구리는 전지전능하다. 모르는 것이 없다. 바다를 모르는 것은 바다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 자기가 무지하기 때문이 아니다.

장자가 추수편에서 이 이야기를 꺼낸 맥락이 있다. 하백(河伯), 즉 황하의 신이 가을 홍수 때 강이 불어나자 자기가 가장 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다에 도달하니 끝이 보이지 않았다. 바다의 신 북해약(北海若)을 만나서야 비로소 자기가 작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백은 황하를 다스리는 신이다. 작은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도 바다를 보기 전까지는 자기가 가장 크다고 믿었다. 장자는 이 이야기로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경계가 문제라는 것이다. 하백의 인지는 황하의 경계 안에 갇혀 있었다. 경계 안에서는 하백이 옳았다. 경계를 벗어나니 틀렸다. 더닝과 크루거가 실험실에서 데이터로 증명한 것을, 장자는 우화로 그려냈다. 경계 안에 있는 존재는 자기 경계를 볼 수 없다는 것.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의 구조도 이것과 같다. 자기가 옳다고 여기니 변화할 이유가 없다. 변화는 자기가 틀렸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제하는데, 그 전제 자체를 수용하지 않으니 변화의 문은 처음부터 닫혀 있다. 이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구조의 문제다. 의지가 있어도 보이지 않는 문을 열 수는 없다.

이런 사람이 인지가 낮지 않다면, 누가 인지가 낮은가. 이 물음은 단순해 보이지만 꽤 날카롭다. 보통 인지가 낮다고 하면 학력이 낮거나 사회적으로 취약한 사람을 떠올리기 쉽다. 그런데 실제로는 반대인 경우가 적지 않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주변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 오래 한 분야에 있으면서 세상이 바뀐 줄 모르는 사람, 과거의 성공을 현재의 판단 근거로 삼는 사람.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기 세계 밖을 상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상하지 않으니 질문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으니 배우지 않고, 배우지 않으니 바뀌지 않는다.

인지가 낮다고 해서 사회적 지위가 낮은 것은 아니다. 이 점은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세상에는 인지가 낮은 상태로도 잘 돌아가는 자리가 있다. 정해진 것을 성실하게 반복하면 되는 자리, 기존 질서를 유지하면 되는 자리. 이런 자리에서는 고집이 오히려 장점이 된다. 문제는 그 사람과 가까운 관계가 될 때 생긴다. 가까운 관계에서는 조율이 필요하고, 조율은 자기 세계를 일시적으로 내려놓는 능력을 요구한다. 인지가 낮은 사람은 이 능력이 결핍되어 있다. 내려놓을 수 있으려면 먼저 자기가 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들고 있다는 자각 자체가 없으니까.

추수편의 하백은 바다를 보고 나서 부끄러워했다. 自以比形於天地 而受氣於陰陽 吾在天地之間 猶小石小木之在大山也. 자기가 천지 사이에서 작은 돌멩이, 작은 나뭇가지 같은 존재였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 깨달음이 가능했던 이유는 하백이 황하의 경계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경계 안에 머물렀다면 영원히 자기가 가장 크다고 믿었을 것이다.

인지가 낮은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라는 말은 차갑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냉정함이 아니라 현실 인식이다. 우물 안에 있는 사람을 밖으로 끌어낼 수 있는 힘은 바깥에 없다. 하백도 누군가가 끌고 나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 황하의 끝까지 흘러갔다. 본인이 경계까지 가지 않으면 바다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까운 관계가 위험하다. 가까이 있으면 끌어내고 싶은 욕구가 생기고, 그 욕구는 거의 항상 좌절로 끝난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 바다 사진을 보여줘도, 개구리는 그것을 우물 벽에 비친 그림자라고 생각한다.

결국 인지라는 것은 아는 것의 양이 아니라, 모르는 것의 존재를 감지하는 능력이다. 서양 심리학은 이것을 메타인지(Metacognition)라 하고, 장자는 이것을 경계 바깥을 보는 눈이라 했다. 이 능력이 있는 사람은 고집을 부릴 수가 없다. 자기가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항상 안고 있으니까. 반대로 이 능력이 없는 사람은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가 옳은 것이다. 본인의 세계 안에서는 실제로 옳으니까. 다만 그 세계가 우물만 하다는 것을 모를 뿐이다.

하백이 바다에 도달한 뒤에 한 말이 있다. 吾長見笑於大方之家. 큰 도를 아는 이들에게 오래도록 웃음거리가 될 뻔했다는 뜻이다. 하백은 바다를 본 뒤에야 자기가 웃음거리였다는 것을 알았다. 보기 전에는 몰랐다. 지금 우물 안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만 바다까지 갈 의향이 있는지는, 개구리 본인만이 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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