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tune

삼 년의 기운 – 운이 바뀌는 시간에 대하여

운이 좋은 사람에게는 삼 년이 있다. 삼 년 동안 무엇을 해도 풀리는 시기가 온다. 반대로 삼 년 동안 무엇을 해도 막히는 시기도 온다. 사람이 삼 년 왕성하면 귀신도 건드리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미신이 아니다. 오래 살아본 사람들이 남긴 관찰이다. 운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흐르는 것이고, 흐르는 것에는 마루와 골이 있다.

도덕경(道德經) 58장에 이런 구절이 있다. 禍兮福之所倚 福兮禍之所伏. 화에는 복이 기대어 있고, 복에는 화가 숨어 있다. 이 문장이 2,500년 동안 살아남은 이유가 있다. 모든 시대, 모든 문화권에서 예외 없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잘 풀리는 시기의 한가운데에 다음 위기의 씨앗이 들어 있고, 도무지 안 풀리는 시기의 바닥에 다음 전환의 기운이 자라고 있다. 노자는 이것을 단순한 낙관론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구조를 말한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같은 장에 이어지는 구절이 더 날카롭다. 其無正 正復爲奇 善復爲妖. 바른 것이 없으면, 바른 것이 다시 기이한 것이 되고, 좋은 것이 다시 요사한 것이 된다. 사람들이 인생의 마루에서 가장 흔히 저지르는 실수가 이것이다. 지금의 좋은 것이 영원히 바른 것이라고 믿는 것. 그래서 그 좋은 것을 붙들려 한다. 붙들면 뒤틀린다. 좋았던 것이 요사스러워지는 순간이 온다. 돈이 많아서 좋았는데 그 돈이 가족을 갈라놓고, 지위가 높아서 좋았는데 그 지위가 귀를 닫게 만든다. 복이 화로 바뀌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복 자체의 구조 안에 이미 들어 있었던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범려(范蠡)라는 사람이 있었다. 춘추시대 월(越)나라의 대부였다. 월왕 구천(勾踐)이 오(吳)나라에 패하여 노예처럼 끌려갔을 때, 구천 곁에 남아서 치욕의 시간을 함께 버텼다. 구천이 오나라 왕 부차(夫差)의 말똥을 핥으며 충성을 연기할 때, 범려는 그 옆에서 계략을 짰다. 와신상담(臥薪嘗膽), 장작 위에 눕고 쓸개를 핥는다는 고사가 여기서 나왔다. 이십 년을 참았다. 이십 년 뒤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했다. 구천은 천하의 패자가 되었고, 범려는 최고의 공신이 되었다.

그런데 범려가 한 일이 있다. 떠났다. 모든 것을 버리고 월나라를 떠났다. 함께 고생한 동료 문종(文種)에게 편지를 보냈다. 새가 다 잡히면 좋은 활은 치워지고,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삶아진다. 구천이라는 사람은 고난은 함께할 수 있지만 안락은 함께 나눌 사람이 못 된다. 문종은 이 충고를 무시했다. 얼마 뒤 구천에게 자결을 명받았다.

범려는 제(齊)나라로 가서 이름을 바꾸고 장사를 시작했다. 거부가 되었다. 재산을 모두 나눠주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다. 또 거부가 되었다. 세 번을 반복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화식열전(貨殖列傳)에 기록된 내용이다. 범려가 세 번이나 부를 쌓고 세 번이나 나눠줄 수 있었던 것은 돈 버는 재주가 비상해서가 아니다. 운의 흐름을 읽었기 때문이다. 올라갈 때 올라가는 줄 알고, 내려갈 때 내려가는 줄 알았다. 복이 극에 달하면 화가 온다는 것을 몸으로 이해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극에 달하기 전에 스스로 내려왔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것을 못 한다. 잘 될 때는 더 잘 될 것 같고, 안 될 때는 영영 안 될 것 같다. 감정이 판단을 점령하기 때문이다. 잘 되는 시기에는 흥분이 객관성을 밀어내고, 안 되는 시기에는 두려움이 가능성을 가린다. 그래서 마루에서 더 높이 올라가려다 떨어지고, 골짜기에서 주저앉아 올라갈 기회를 놓친다.

오래된 말 중에 이런 것이 있다. 기와 조각에도 뒤집힐 날이 있고, 동풍에도 남쪽으로 방향이 바뀔 때가 있다. 십 년 동안 강 동쪽이 부유했다가 십 년 뒤에는 강 서쪽이 일어난다. 헌 옷을 입은 사람을 비웃지 마라. 이 말들은 체계적인 이론이 아니다. 그냥 오래 살아본 사람들의 눈이다. 그런데 이 눈이 틀린 적이 거의 없다.

시장에서 이십오 년을 보내면서 확인한 것도 이것이다. 어떤 자산이든 영원히 오르는 것은 없고, 영원히 내리는 것도 없다. 모두가 흥분할 때가 꼭대기고, 모두가 절망할 때가 바닥이다. 이것은 법칙이 아니라 관찰이다. 주식이든 부동산이든 사람의 인생이든, 구조가 같다. 올라가는 것은 내려오고, 내려간 것은 다시 올라간다. 문제는 그 순환을 아느냐 모르느냐가 아니라, 알면서도 그 안에서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느냐다.

도덕경 58장이 말하는 것의 핵심은 사실 운의 순환이 아니다. 그 순환 안에서 사람이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다. 같은 장 뒷부분에 나오는 구절이 있다. 是以聖人方而不割 廉而不劌 直而不肆 光而不耀. 그러므로 성인은 반듯하되 남을 자르지 않고, 날카롭되 남을 찌르지 않고, 곧되 제멋대로 하지 않고, 빛나되 남의 눈을 부시게 하지 않는다. 이것이 마루에서의 자세다. 잘 될 때 겸손한 것이 아니라, 잘 되는 것 자체가 다음 변화의 전조임을 아는 사람의 태도다.

골짜기에서의 자세는 더 단순하다. 버티는 것이다. 화려한 전략이 아니라 그냥 버티는 것이다. 안 풀리는 시기에 가장 위험한 것은 상황 자체가 아니라, 그 상황에 자기 정체성을 맡겨버리는 것이다. 지금 안 된다는 사실이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정의하게 놔두는 것. 범려가 구천 옆에서 이십 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지금의 치욕이 자기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귀인이 찾아온다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귀인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운이 바뀌는 시점에 내가 서 있는 자리가 귀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같은 사람이 찾아와도, 내가 주저앉아 있으면 그 사람은 그냥 지나가고, 내가 준비되어 있으면 그 사람이 귀인이 된다. 귀인의 등장은 운의 결과가 아니라, 준비의 결과다.

삼 년이라는 숫자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상징이다. 운에는 주기가 있고, 그 주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지금이 바닥이라면 바닥은 영원하지 않다. 지금이 꼭대기라면 꼭대기도 영원하지 않다. 풍수가 돌아가듯, 기운이 돌아가듯, 사람의 운도 돌아간다. 문제는 돌아가는 것을 아느냐가 아니라, 돌아가는 동안 내가 어떤 사람으로 있느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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