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돋우는 사람과 나를 깎는 사람을 구분하는 단 하나의 기준
누가 나를 돋우는 사람이고 누가 나를 깎는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그 사람이 내 마음속에서 무엇을 불러내는지를 보면 된다. 어떤 이와 앉아 있으면 안에서 진심, 관대함, 호의, 가벼움 같은 것이 떠오른다. 또 어떤 이와 앉아 있으면 분노, 시기, 부끄러움, 체념 같은 것이 떠오른다. 상대가 특별히 한 일이 없어도 그렇다. 이것이 기운이 맞다 맞지 않다고 말할 때의 실체다. 사람을 판단하는 복잡한 기준을 다 내려놓고, 이 한 가지만 기준으로 삼아도 관계의 많은 부분이 정리된다.

주역(周易) 건괘(乾卦) 문언전(文言傳)에 同聲相應 同氣相求라는 구절이 있다. 같은 소리끼리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끼리 서로 찾는다는 뜻이다. 이어지는 문장이 水流濕 火就燥 雲從龍 風從虎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고, 불은 마른 데로 가고,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호랑이를 따른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이 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동양 철학의 오래된 관찰이다. 말하자면 마주 앉은 두 사람은 각자의 기운으로 서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고, 상대는 자기 안에서 그 질문에 맞는 것만 꺼내 보인다. 그래서 같은 내가 어떤 사람 앞에서는 유독 너그럽고, 어떤 사람 앞에서는 유독 날카롭다. 나는 변한 적이 없는데 상대에 따라 꺼내지는 부분이 다르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2008년 영국의학저널(BMJ)에 실린 프레이밍햄 심장 연구(Framingham Heart Study) 기반 논문이 있다. 하버드의 크리스타키스(Christakis)와 UC 샌디에이고의 파울러(Fowler)가 1983년부터 2003년까지 20년 동안 4,739명의 사회적 관계망을 추적했다. 결과는 이랬다. 가까운 친구가 행복해지면 본인이 행복해질 확률이 약 15퍼센트 올라간다. 친구의 친구가 행복해도 10퍼센트, 친구의 친구의 친구까지 6퍼센트 영향을 미친다. 1마일 안에 사는 이웃이 행복해지면 34퍼센트까지 오른다. 반면 직장 동료 사이에서는 이런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감정은 물리적으로 가까이에서, 서로의 내면을 열어 보이는 관계에서만 전이된다는 뜻이다. 동양에서 동기상구라 불렀던 것이 현대 통계로 확인된 셈이다. 용어만 바뀌었을 뿐 관찰은 같다.
사람은 상대의 기운에 반응해서 자기 안의 무엇인가를 꺼내는데, 이 반응은 생각보다 빠르다. 대화를 나누기 전에 이미 시작되어 있다. 방에 들어서는 순간, 악수를 하는 순간, 눈이 마주치는 순간. 몸이 먼저 안다. 이 사람과 있으면 왜 그런지 숨이 얕아진다거나, 이 사람 옆에서는 오래전 잊었던 농담이 떠오른다거나 하는 감각이 그것이다. 머리가 상대를 분석하기 전에 몸이 상대의 기운을 읽는다. 그리고 거기에 맞는 내 안의 결을 꺼낸다. 이 과정은 의식이 개입하기 어려울 만큼 자동적이다.
문제는 이 자동 반응을 의지로 눌러 참는 경우에 생긴다. 이 사람과 있으면 답답한데 인간관계 때문에 참는다. 이 사람과 만나면 피곤한데 일 때문에 계속 본다. 이런 만남이 이어지면 몸이 먼저 지친다. 감정은 소진되고, 집에 돌아와서도 그 사람의 목소리가 귀에 남고, 잠자리에서 그날의 대화를 곱씹는다. 이런 상태가 한 달, 두 달 이어지면 어느 순간 거울 속의 내 얼굴이 달라져 있다. 전에 없던 날카로움이 눈가에 생기고, 말투에 체념이 섞이고, 웃음의 결이 얕아진다. 본인은 자기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하고 의아해하지만,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상대가 계속 그 부분만 끌어냈을 뿐이다.
반대 경우도 있다. 어떤 사람과 몇 달을 가까이 지내는 사이에 자기가 전에 없던 방식으로 너그러워지고, 잊고 있던 자기 안의 좋은 결이 살아나는 경험이다. 이때 사람들은 상대가 자기를 바꿔놓았다고 말한다. 정확히는 상대가 끌어낸 것이다. 내가 본래 갖고 있던 것인데 오래 꺼내지 않아 녹슨 부분이 있었다. 그 사람 앞에서 그것이 다시 움직였다. 어떤 이는 이것을 귀인(貴人)이라 부른다. 명리학에서 말하는 귀인도 대단한 일을 해주는 사람이 아니다. 그 사람 앞에서 나의 좋은 부분이 움직이는 그 자리가 귀인 자리다. 큰 복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아니라 나의 복을 꺼내주는 사람. 설명은 달라도 관찰은 같다.
25년 넘게 사람을 관찰하면서 보이는 것이 하나 있다. 성장한 사람일수록 이 감각에 민감하다는 점이다. 어리고 자기를 잘 모르는 시기에는 이 감응을 무시한다. 불편한데도 인연이라고 우기고, 지치는데도 의리라고 붙잡고, 소진되는데도 성숙하지 못한 내 탓이라고 자책한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서 한 번 크게 아프고 나면 알게 된다. 옆에 있는 사람이 나를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를 몸이 말해주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부터는 이 감각을 무시하지 않는다. 이유를 못 찾아도 불편하면 거리를 두고, 이유는 있지만 편하면 가까이 둔다. 인간관계의 많은 피로는 머리가 몸의 신호를 뒤늦게 승인하는 데서 온다.
이 원리는 반대편에서도 작동한다. 내가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도 같은 기준으로 볼 수 있다. 나와 오래 함께한 사람이 점점 밝아지는지, 점점 닫히는지. 내 앞에서 그 사람이 자기 안의 좋은 부분을 꺼내는지, 숨기는지. 내가 상대의 내면에서 무엇을 끌어내고 있는지를 지켜보면, 나의 현재 상태가 거울처럼 보인다. 내가 흔들리면 주변 사람의 흔들림이 커지고, 내가 가라앉으면 주변의 공기도 가라앉는다. 크리스타키스와 파울러가 말한 3단계 파급이라는 것도 이 구조 안에서 움직인다. 한 사람의 기운은 그 사람 하나에서 끝나지 않는다. 주위 사람에게, 그 사람의 주위에게, 그리고 얼굴도 모르는 그 바깥까지 번진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일이 사적인 일로만 끝나지 않는다. 오래된 말로 하면 덕이 있는 자리에 사람이 모인다는 것이, 통계로 뒷받침된 현상이라는 뜻이다.
살면서 꼭 붙잡아야 할 사람과 가만히 놓아야 할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은 복잡할수록 틀린다. 단순할수록 정확하다. 그 사람 앞에서 내 안의 어느 결이 움직이는가. 그것이 전부다. 어느 쪽이 움직이든 그것은 내가 가진 것이지 상대가 만든 것이 아니다. 다만 상대는 그 결이 움직이기 쉬운 환경을 제공할 뿐이다. 그래서 이 감각은 결국 자기를 보는 도구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일 같지만, 실은 자기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상대를 통해 확인하는 일에 가깝다. 용이 지나가면 구름이 모이고, 호랑이가 가면 바람이 따른다. 내가 어떤 기운으로 서 있느냐에 따라 따라오는 것이 달라진다.
오래 살수록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인연은 끊을 때 힘이 드는 것이 아니라, 끌고 갈 때 힘이 든다는 것. 끊어야 할 인연을 끌고 가는 에너지가 새 인연을 맞을 자리를 막는다. 이것을 아는 것이 빠른 사람이 있고 느린 사람이 있을 뿐, 결국은 다 거쳐 간다. 그 사이에 자기 결이 얼마나 닳는지는 각자의 몫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