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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등급 – 몸이 아픈 것과 뇌가 아픈 것은 다르다

요즘 사람들이 제일 많이 하는 질문? 부자가 될 수 있을까?

부자가 되려면, 고통을 겪어야 해, 댓가를 치뤄야 해

그러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고통은 실제 경험해야 하는 고통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고통에도 등급이 있다. 같은 고통이라도 어떤 것은 사람을 깎아내리고, 어떤 것은 사람을 깎아 만든다. 고통을 많이 겪는 것이 성취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종류의 고통을 겪느냐가 갈림길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고통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마모에 가깝다. 체력을 소진하고, 잠을 줄이고, 자존심을 삼키는 것. 이런 것들을 견디면 보상이 온다고 믿는다. 그런데 세상은 노력의 양으로 분배하지 않는다. 낙타와 당나귀가 사람보다 더 많은 육체적 고통을 감내하지만, 그 대가로 부를 쌓지는 못한다. 노동의 고통은 대체할 수 있는 것이어서 값이 낮다. 대체할 수 없는 고통만이 값이 높다.

대체할 수 없는 고통이란 무엇인가. 자기가 쌓아온 것을 부수는 고통이다. 잘 되고 있던 방식에 구멍이 보일 때, 그것을 인정하고 허무는 것. 편한 자리에서 일어나 복잡한 문제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긴 시간 동안, 확실한 결과 없이, 생각만으로 씨름하는 것. 이런 고통은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 뇌가 아프다. 그리고 뇌가 아픈 고통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사람은 드물다. 물론 잡생각을 많이 해서, 뇌가 아픈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걸 즐기는 사람도 있다.

라드바우드대학교 행동과학연구소의 루이스 데이비드(Louise David)와 동료들이 2024년 Psychological Bulletin에 발표한 메타분석이 있다. 29개국에서 수행된 170건의 연구, 4,670명의 참가자, 358종의 과제를 종합 분석한 것이다. 결론은 단순했다. 생각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쾌하다. 과제의 종류가 무엇이든, 참가자가 누구이든, 어느 나라이든, 인지적 노력이 높아질수록 좌절감, 짜증, 스트레스 같은 부정 감정이 함께 올라갔다. 연구를 이끈 에릭 바일레벨드(Erik Bijleveld) 교수는 이렇게 정리했다. 사람들이 인지적으로 힘든 활동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이 생각하는 행위 자체를 즐긴다는 뜻은 아니다. 보상이 고통을 상쇄할 만하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지, 고통이 쾌감이어서가 아니다.

심리학에서 사람을 인지적 구두쇠(Cognitive Miser)라 부르는 것도 이 맥락이다. 1984년 수잔 피스크(Susan Fiske)와 셸리 테일러(Shelley Taylor)가 만든 개념인데, 인간의 뇌는 에너지를 아끼도록 설계되어 있어서, 복잡한 사고 대신 단순한 지름길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다니엘 카너먼(Daniel Kahneman)이 말한 시스템 1과 시스템 2의 구분도 같은 구조다. 시스템 1은 자동적이고 빠르고 힘이 안 드는 사고, 시스템 2는 의식적이고 느리고 힘이 드는 사고. 사람은 가능하면 시스템 1로 살려고 한다. 시스템 2를 가동하면 불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몸이 힘든 고통을 택한다. 생각이 힘든 고통보다 차라리 몸이 힘든 쪽이 견딜 만하기 때문이다. 세 시간 동안 인터넷에서 가격을 비교하는 것은 할 수 있지만, 세 시간 동안 자기 수입 구조의 구멍을 분석하는 것은 하기 싫다. 야근을 하면서 ‘나는 열심히 살고 있다’는 서사를 유지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야근이 과연 의미 있는 일에 쓰이고 있는지를 따지는 것은 불편하다. 전자는 자기 감동이고, 후자는 자기 해부다. 감동은 쉽고 해부는 아프다.

물론 정반대의 인간도 존재한다. 그들은 생각만 한다. 그리고 그 생각은 목표를 사라지게 하고, 행동을 못하게 한다. (명리학적으로는 인성과다) 그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생각의 고통이 아니라, 육체의 고통이 필요하다. 그 사람에게는 육체적 고통, 현실과 부딪치면서, 자신의 생각이 공상이라는 것을 아는 고통이 고급 고통이다.

도덕경(道德經) 41장에 이런 구절이 있다. 上士聞道勤而行之 中士聞道若存若亡 下士聞道大笑之 不笑不足以為道. 뛰어난 사람은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행한다. 보통 사람은 도를 들으면 있는 듯 없는 듯 한다. 못난 사람은 도를 들으면 크게 웃는다.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면 도라 할 수 없다. 노자가 여기서 가른 것은 지능의 차이가 아니다. 불편함을 감당하는 능력의 차이다. 도라는 것은 듣기에 편한 소리가 아니다. 기존의 나를 뒤흔드는 소리다. 상사(上士)는 그 뒤흔들림을 감당하고 움직이는 사람이고, 하사(下士)는 그 뒤흔들림이 불쾌해서 웃어넘기는 사람이다.

같은 41장에 明道若昧 進道若退 夷道若纇라는 구절도 있다. 밝은 도는 어두운 것 같고, 나아가는 도는 물러나는 것 같고, 평탄한 도는 거친 것 같다. 노자가 묘사한 도의 속성이 고급 고통의 속성과 겹친다. 제대로 된 길은 겉으로 보기에 어둡고, 뒷걸음질치는 것 같고, 울퉁불퉁하다. 그래서 대부분 돌아선다. 매끈하고 빛나는 길을 찾아간다. 그런데 매끈한 길은 대개 이미 수많은 사람이 걸어간 길이고, 그 끝에는 별것이 없다. 수많은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길이니까.

몸의 고통은 눈에 보인다. 남들이 알아준다. 그래서 일종의 사회적 화폐가 된다. 나 이번에 3일 밤샜어. 한 달 동안 하루도 안 쉬었어. 이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고, 듣는 사람도 고개를 끄덕인다. 반면 생각의 고통은 보이지 않는다. 열 시간을 앉아서 하나의 문제를 뜯어본 사람과, 열 시간을 서서 일한 사람 사이에서, 사회적 인정은 후자에게 간다. 전자가 한 것은 겉으로 보면 아무것도 안 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고급 고통의 가장 큰 장벽이다. 보상이 보이지 않는다. 당장의 결과가 없다. 벽돌을 쌓으면 하루가 끝날 때 벽이 올라간 것이 보인다. 그런데 자기 사고 체계의 구멍을 메우는 일은 한 달이 지나도 겉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 이 긴 공백을 견디는 것이 고급 고통의 핵심이다. 불확실성을 안고 가는 것. 결과가 언제 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계속하는 것. 복리가 작동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듯, 인지적 성장도 일정 기간의 축적 없이는 드러나지 않는다.

갈등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것도 고급 고통에 속한다. 거절해야 할 때 거절하는 것, 이해관계가 부딪힐 때 자기 입장을 정리하는 것, 결정의 책임을 지는 것. 이런 상황에서 받는 심리적 압박은 밤새 일하는 것보다 무겁다. 사람은 남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어서, 갈등을 회피하려 한다. 그런데 갈등을 회피하면 문제가 쌓이고, 쌓인 문제는 나중에 훨씬 큰 비용으로 돌아온다.

세상에서 평범하게 사는 것은 가장 쉬운 일이다. 흐름을 따르고, 안전한 곳에 머물고, 생각이 아프면 생각을 멈추면 된다. 그런데 생각을 멈추는 습관이 쌓이면, 어느 순간 생각하는 능력 자체가 줄어든다. 쓰지 않는 근육이 줄어들듯이. 그리고 그 줄어든 능력만큼 선택의 폭도 좁아진다.

고급 고통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데이비드의 메타분석이 보여주듯, 인지적 노력은 본질적으로 불쾌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이 있다. 같은 연구에서 체스를 두는 사람들의 사례가 언급된다. 수백만 명이 체스를 즐긴다. 체스는 인지적으로 극도로 힘든 활동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체스를 한다. 연구진의 해석은 이렇다. 사람들은 인지적 노력 자체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 노력이 가져다주는 보상을 알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다.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고통 너머의 것을 보는 눈이 있는 것이다. 노자의 표현을 빌리면, 상사(上士)는 도를 듣고 부지런히 행한다. 도가 쉬워서가 아니다. 도가 가리키는 곳을 보기 때문이다.

편안함에는 가격표가 붙어 있다. 지금 피한 생각의 고통은 나중에 넘을 수 없는 벽이 될 수 있다. 반대로, 지금 감당한 생각의 고통은 나중에 다른 사람이 쉽게 넘지 못하는 해자(垓子)가 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중간에 그만두기 때문이다. 그들이 물러난 자리에 남는 것은 넓은 공간과 높은 가치다.

어떤 고통을 선택하고 있는지, 그 질문을 던져본 적이 있는지 없는지가 아마 꽤 많은 것을 결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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