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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세란 무엇인가? 한국과 중화권의 신앙 비교

태세(太歲)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아마 대부분의 한국인에게는 낯선 단어일 것이다. 점집에서 올해 운이 안 좋다느니, 삼재가 들었다느니 하는 말은 들어봤어도 태세라는 말은 처음 듣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중국이나 대만, 홍콩, 싱가포르 같은 중화권에서는 매년 정월이 되면 태세를 막아야 한다, 태세에게 절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넘쳐난다. 같은 한자문화권인데 왜 이렇게 다를까.

태세의 뿌리는 천문학이다. 고대인들이 목성을 관측했더니 대략 12년에 걸쳐 하늘을 한 바퀴 돌았다. 그래서 목성이 있는 위치로 해를 헤아렸다. 12년이니까 12지지와 딱 맞아떨어진다. 이것이 태세의 시작이다. 처음에는 그냥 달력 만드는 기준점이었을 뿐, 길흉과는 관계가 없었다. 사마천의 천관서나 회남자의 천문훈에 나오는 내용도 순수한 천문 관측 기록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태세가 있는 방위에서 땅을 파면 안 된다는 금기가 생겼고, 진한 시대에 이르러 태세 머리 위에서 흙을 파지 말라는 속담까지 만들어졌다. 별의 위치를 보고 해를 헤아리던 것이 어느새 그 별이 있는 방위를 피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바뀐 것이다.

중국 도교는 이 민간 금기를 받아들여 거대한 체계로 발전시켰다. 도교에서 태세는 단순한 방위 금기가 아니라 인격을 가진 신령이다. 육십갑자 해마다 한 분의 태세성군이 그해 인간 세상을 주관한다. 올해가 을사년이면 을사태세 오보대장군이 값년하고, 내년 병오년이면 병오태세 문철대장군이 값년한다. 이런 식으로 60명의 태세성군이 돌아가며 한 해씩 맡는다. 명나라 때는 황제가 직접 태세단을 세워 제사 지냈고, 청나라 때는 가뭄이 들면 천신과 지신과 함께 태세에게 기우제를 올렸다. 도교 경전에서는 태세를 연중천자라고 부를 정도로 높이 받든다. 한 해의 임금이라는 뜻이다.

도교의 태세 의식은 매우 구체적이다. 도관에서 도장이 집전하는 배태세 법회에 참가하고, 도사가 직접 그린 태세부를 몸에 지니고, 연말에는 사태세 법회를 열어 그해 태세성군의 보호에 감사드린다. 상해 성황묘 같은 곳에서는 정월 초파일부터 배태세 법회가 열린다. 홍콩의 황대선사나 대만의 각 궁묘에서도 마찬가지다. 중화권에서 태세는 삼재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다뤄진다.

중국 불교는 태세를 다르게 본다. 불교 경전에도 목성에 관한 기록이 있고, 별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내용도 있다. 칠요양재결 같은 경전에는 세성이 사람의 명에 임하면 계절에 따라 몸에 탈이 난다는 식의 기술도 있다. 그러나 불교는 태세를 운명의 주재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불교의 핵심 논리는 연기업력이다. 내 운명은 내 업이 만든 것이지 신령이 정해주는 것이 아니다. 환경의 영향은 인정하되, 신령이 운명을 좌우한다는 생각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 불교는 태세를 호법선신의 하나로 편입시켰다. 부처를 호위하는 여러 신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불교 사찰에서도 공천이나 순성 같은 의식을 하지만, 이것은 태세신에게 복을 비는 것이 아니라 수행의 한 방편이다. 핵심은 참회하고 선을 행하고 주문을 외우는 것이지, 태세 앞에 무릎 꿇고 한 해 운수를 빌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도교가 신령과의 소통을 통한 가피를 강조한다면, 불교는 수행을 통한 업력 전환을 강조한다.

한국 불교는 더 나아간다. 한국 사찰에는 아예 태세를 모시는 전각이 없다. 산신각, 칠성각, 삼성각 같은 토속신앙과 융합한 전각은 있다. 한국 불교가 토착 신앙을 완전히 배척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다. 그런데 태세전이나 태세 법회는 없다. 한국의 사찰 어디를 가도 태세성군을 모신 곳을 찾을 수 없다. 칠성은 받아들였는데 태세는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태세 신앙은 도교 체계 안에서 발전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도교와 불교가 오랜 세월 공존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민간에서는 도관에 가서 태세에게 절하고, 절에 가서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한국에도 도교가 들어왔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구려 영류왕 7년인 624년에 당나라 고조가 도사를 파견하여 천존상을 보내고 도덕경을 강론하게 했다. 영류왕과 수천 명의 고구려인이 그 강론을 들었다고 한다. 643년에는 연개소문이 당나라에서 도사 8명과 도덕경을 들여와 도교를 국가 종교의 지위로 올려놓기까지 했다. 불교 사찰을 도관으로 바꾸고 도사들을 거처하게 할 정도였다. 고려시대에는 복원관, 대청관 같은 도관을 세워 삼청상을 모시고 국가 차원의 초제를 올렸다. 조선시대에도 소격서라는 관청에서 도교 제사를 지냈고,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는 초제가 계속되었다. 성황당이 전국 곳곳에 있었던 것도 도교의 흔적이다.

그런데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 도교는 독자적인 교단으로 자리잡지 못했다. 도관을 세우고 도사가 상주하면서 신도를 모으고 경전을 전수하는 식의 종교 체계가 형성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첫째, 조선 건국 이후 성리학이 국시가 되면서 도교는 이단으로 배척받았다. 중종 때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파는 소격서 혁파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들의 논리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도교가 세상을 속이고 더럽히는 좌도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은 천자만 할 수 있는데 제후국인 조선에서 제천하는 것은 예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중종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제도라며 버티다가 결국 1518년 소격서를 혁파했다. 이후 복설과 혁파를 반복하다가 임진왜란 이후 완전히 폐지되었다.

둘째, 한국에는 이미 도교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토착 신앙이 있었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환인, 환웅의 이야기나 신선사상은 중국 도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다. 민간에서는 굳이 중국식 도교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무속과 산악신앙, 칠성신앙 등이 비슷한 역할을 했다. 도교의 요소들이 무속이나 불교에 스며들어 녹아버린 것이다. 옥황상제, 칠성, 산신 같은 개념이 불교 사찰의 삼성각이나 칠성각에 자리잡은 것이 그 증거다.

셋째, 도교를 전문적으로 전승할 교단이 형성되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정일도, 전진교 같은 도교 종파가 도관을 중심으로 도사를 양성하고 경전을 전수하며 신도를 관리했다. 한국에서는 소격서 같은 국가 기관이 초제를 담당했을 뿐, 민간에 도관이 퍼지거나 도사 집단이 형성되지 않았다. 소격서가 폐지된 후에는 도교 의식을 전승할 주체 자체가 사라졌다. 일부 지식인들이 개인적으로 도가 사상에 심취하거나 내단 수련을 한 경우는 있었지만, 이것은 종교 교단과는 다른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태세 신앙처럼 전문적인 과의와 경전 체계가 필요한 것은 한국에서 전승될 수 없었다. 태세 의식을 집전할 도사도 없고, 태세부를 그릴 법사도 없고, 배태세 법회를 열 도관도 없었다. 칠성이나 산신처럼 불교나 무속에 흡수될 수 있는 단순한 신격은 살아남았지만, 육십갑자 태세성군과 두모원군, 값년 체계 같은 복잡한 도교 교리는 전승되지 못했다.

정리하면 이렇다. 중국 도교는 태세를 연중천자로 높이 받들어 정성껏 제사 지낸다. 중국 불교는 태세를 호법선신의 하나로 인정하되 수행을 근본으로 삼는다. 한국 불교는 태세 자체를 수용하지 않았다. 같은 별을 보면서 세 갈래로 다른 길을 간 것이다.

하늘에서 목성은 지금도 12년 주기로 궤도를 돌고 있다. 그것은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다만 그 별이 인간에게 무엇인가는 문화권마다 달리 규정되어 왔다. 어떤 곳에서는 연중천자로 받들어지고, 어떤 곳에서는 호법선신의 하나로 편입되고, 어떤 곳에서는 아예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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