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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부터 대보름까지

설 연휴,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까지 우리 선조들이 지켜온 풍속들이 있다. 요즘이야 “그게 뭔 소리야” 하겠지만, 알고 보면 다 이유가 있다. 미신이라고 넘기기엔, 수백 년을 살아남은 데는 나름의 생존 전략이 담겨 있다. 조상들이 괜히 만든 게 아니다. 다 겪어보고 만든 거다.

특히 도교에서는 정월 보름간을 단순한 연휴가 아니라, 천상의 신격들이 차례로 인간 세상에 내려오는 기간으로 보았다. 날마다 다른 신이 내려오니, 날마다 해야 할 일이 다르다. 천상에도 스케줄 관리가 있었던 셈이다.

정월 초하루 (설날)

설날 아침, 빗자루를 들면 안 된다. 복을 쓸어낸다는 거다. 그래서 옛날 어른들은 섣달 그믐날 대청소를 끝내놓고, 설날에는 빗자루를 아예 숨겨버렸다. 청소 안 해도 되는 공식적인 날이 있다는 게 이 풍속의 진짜 매력이다. 그릇을 깨뜨려도 안 된다. 깨지면 재산이 깨진다고 했다.

도교에서 정월 초하루는 한 해의 기운이 열리는 날이다. 이 날 향을 올려 천지(天地)에 경배하고 한 해의 평안과 복을 기원했다. 하늘과 땅에 먼저 인사를 드리는 거다. 사람한테 세배하기 전에 천지한테 먼저 절하는 순서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설날의 핵심은 세배다. 어른께 절하고 덕담을 받는다. 아이들에게는 세뱃돈이 돌아간다. 요즘 세뱃돈 시세가 물가를 이기는 속도로 올라서, 조카가 많은 사람은 설이 명절이 아니라 재난이다. 그리고 떡국 한 그릇을 먹어야 나이 한 살을 먹는다. 안 먹으면 나이를 안 먹느냐고? 먹어도 먹는다. 다만 떡국 없이 먹는 나이는 좀 서럽다.

복조리도 빠질 수 없다. 초하루 새벽에 복조리를 사서 벽에 걸어두면 한 해 복을 담는다고 했다. 조리가 쌀을 거르듯, 복만 걸러 담겠다는 뜻이다. 요즘은 복조리 파는 곳을 찾는 게 복을 찾는 것만큼 어렵다.

정월 초이틀

시집간 딸이 친정에 오는 날이다. 예전에는 시집가면 친정 문턱을 함부로 넘지 못했으니, 이 날만큼은 공식적으로 허락된 귀향이었다. 남편도 같이 가야 한다. 장모님 앞에서 점수를 따야 하니까. 선물과 세뱃돈을 챙겨가는 건 기본이고, 빈손으로 갔다가는 다음 귀향이 영원히 안 올 수도 있다.

점심은 친정에서 먹되, 저녁 전에는 시댁으로 돌아와야 했다. 요즘은 이런 구분이 많이 사라졌지만, 명절에 “어디 집 먼저 가느냐”로 부부싸움이 나는 걸 보면, 풍속은 사라져도 갈등은 건재하다. 어쩌면 이 싸움이야말로 가장 오래 살아남은 명절 풍속인지도 모른다.

정월 초사흘

초사흘은 민간에서는 말조심하는 날이다. 이 날은 다투기 쉽다 하여 외출을 삼갔다. 설 연휴 사흘째면 온 가족이 좁은 공간에서 지칠 대로 지쳐있을 때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처남과 매형 사이에 술자리 긴장감이 돌 때다. 이때 밖에 나가면 진짜 싸운다. 선조들이 괜히 금기를 만든 게 아니다. 경험에서 나온 위기관리 매뉴얼이다.

도교에서는 초사흘을 순성배두(順星拜斗)의 날로 본다. 별에 절하고 한 해의 액운을 풀며, 자신의 운명을 관장하는 별을 찾아 기도하는 날이다. 태세두(太歲斗), 평안두(平安斗), 재신두(財神斗) 등 각각의 두(斗)에 등을 밝히고 인과(因果)를 풀어달라 빌었다. 사람 사이의 입씨름은 피하되, 별에게는 적극적으로 말을 거는 날이다. 사람한테 할 말을 하늘에 하는 것이니, 어찌 보면 가장 안전한 소통 방식이다.

정월 초나흘

초나흘은 ‘까마귀 먹이 주는 날’이라는 풍속이 전해진다. 경상도 일부 지역에서는 찰밥을 지어 까마귀에게 던져주었다. 까마귀가 소식을 전하는 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불길하다고 미워하면서도 밥까지 해주는 게 한국적 정서다. 싫으면서도 챙겨주는 거. 명절에 안 오고 싶지만 오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또한 이 날은 장사하는 집에서 한 해 운수를 점치기도 했다. 예전에는 사장이 마음에 안 드는 직원을 이 날 부르지 않는 것으로 해고 의사를 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말 한마디 없이 안 부르는 것으로 끝. 카카오톡 읽씹의 조선시대 버전이다.

정월 초닷새

초닷새는 도교에서 재신(財神)을 맞이하는 날이다. 오로재신(五路財神)이 인간 세상에 내려오는 날이라 하여, 이 날 새벽부터 폭죽을 터뜨리고 향을 피워 재신을 영접했다. 오로재신이란 동서남북과 중앙, 다섯 방위의 재신을 뜻한다. 어느 방향에서 재물이 오든 놓치지 않겠다는 뜻이니, 선조들의 재물에 대한 집념은 비트코인 홀더 못지않다.

특히 장사하는 사람들은 이 날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자정이 지나자마자 문을 열고 향과 초를 밝히며 재신을 모셨다. 남들보다 먼저 문을 열어야 재신이 우리 집에 먼저 들어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요즘으로 치면 백화점 오픈런의 원조다. 명품 대신 재신을 줍줍하는 거다.

도교에서는 이 날 기고(寄庫)라 하여 지부(地府)에 금을 입고하는 의식을 행했다. 저승의 창고에 재물을 미리 저축해두는 개념이다. 이승에서 공덕을 쌓아 저승 계좌에 넣어두면, 그것이 다시 이승의 재물로 돌아온다고 보았다. 일종의 영적 적금이다. 이자율은 알 수 없지만, 원금 손실은 없다고 믿었다. 요즘 은행 금리보다는 믿음직하다.

이 날은 ‘파오(破五)’라고도 불린다. 초하루부터 나흘간 지켜온 금기들이 이 날을 기점으로 풀린다는 뜻이다. 집 안에 쌓인 쓰레기를 내보내고 대청소를 한다. 폭죽도 집 안에서 바깥으로 터뜨리는데, 불길한 기운을 밖으로 몰아내겠다는 의미다. 나흘 동안 참았던 청소 본능을 이 날 폭발시키는 거다.

만두를 빚어 먹는 풍속도 있다. “소인의 입을 봉한다”는 의미라고 하는데, 남의 험담하는 입을 만두처럼 오므려 붙인다는 뜻이다. 재신을 맞이하면서 소인의 입까지 막으니, 돈도 벌고 뒷담화도 차단하는 날이다. 재테크와 인간관계 관리를 동시에 해결하는 선조들의 멀티태스킹 능력이 놀랍다.

정월 초엿새

초엿새부터 가게 문을 열었다. 본격적인 영업 재개다. 육육대순(六六大順)이라 하여 6이 겹치는 날이니 장사가 순조롭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이 날 집집마다 설 동안 모아둔 쓰레기를 밖에 버린다. 이걸 ‘가난 보내기’라 했다. 쓰레기를 가난이라 부르는 발상이 절묘하다. 그 논리대로라면 분리수거 잘하는 사람이 제일 부자가 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정월 초이레 (인일)

초이레는 ‘인일(人日)’이다. 사람이 태어난 날이라는 뜻이다. 동양의 오래된 기록에 따르면 천지창조의 순서가 닭, 개, 돼지, 양, 소, 말, 사람, 곡식 순이었다고 한다. 사람이 일곱 번째다. 소보다 늦고 말보다 늦다. 자존심 상하는 순서지만, 곡식보다는 하루 빠르니 위안을 삼자.

이 날은 모든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 관가에서도 죄인을 벌하지 않았고, 부모도 아이를 꾸짖지 않았다. 1년에 하루쯤은 누구도 혼나지 않는 날이 있어야 한다는 거다. 직장인들은 이 풍속을 월요일마다 적용해달라고 건의하고 싶을 것이다.

도교에서는 초이레를 삼관대제(三官大帝) 검교일(檢校日)로 본다. 삼관대제란 천관(天官), 지관(地官), 수관(水官)을 말하는데, 이 날 삼관이 인간 세상을 살핀다. 일종의 천상 감사(監査)다. 이 날에 맞추어 수생채(受生債)를 갚는 의식을 행했다. 수생채란 이번 생을 받기 위해 저승에서 빌려온 빚이다. 태어난 것 자체가 빚이라는 발상이 무겁지만, 생각해보면 요즘 사람들도 태어나자마자 학자금 대출부터 시작하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생은 빚에서 시작하는 모양이다.

정월 초여드레

초여드레는 곡일(穀日), 곡식의 생일이다. 이 날 날씨가 맑으면 그해 농사가 풍년이고, 흐리면 흉년이라 했다. 농경사회에서 곡식의 생일을 챙기는 건 당연한 일이다. 곡식이 없으면 다 굶으니까. 요즘은 쌀 소비가 줄고 밀가루 소비가 느는 세상이라, 곡식의 생일을 챙기는 사람보다 빵집 오픈일을 챙기는 사람이 더 많다.

도교에서는 이 날 남두성군(南斗星君)이 하강하는 날이라 했다. 남두는 사람의 수명과 복록을 관장한다. 그래서 이 날 태세(太歲)에 참배하고 유년(流年)의 관살(官煞)을 풀었다. 태세란 그해의 운을 주관하는 별이고, 관살이란 한 해 동안 따라다니는 액운이다. 곡식 생일에 남두성군까지 내려오니, 초여드레는 먹고사는 문제를 하늘과 땅 양쪽에서 동시에 챙기는 날이었다.

정월 초아흐레

초아흐레는 도교에서 옥황상제(玉皇上帝)의 탄신일이다.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한 해의 평안을 빈다. 도교적 세계관에서 옥황상제는 천상의 최고 존재이니, 이 날 하늘을 향해 감사와 소원을 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풍조우순(風調雨順), 바람과 비가 제때 오기를, 그리고 가족의 건강을 빌었다.

이 날에는 옥황참(玉皇懺) 의식을 행했다. 옥황상제 앞에서 지난 한 해의 잘못을 참회하고, 새해의 복과 사함을 구하는 의례다. 최고 존재의 생일날 찾아가서 “죄송합니다, 올해는 잘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거다. 사장 생일에 팀원들이 축하 메시지 보내면서 은근히 연봉 인상을 바라는 것과 구조는 같다.

초닷새에 재신한테 돈 달라 하고, 초아흐레에 옥황상제한테 건강 달라 하고. 선조들의 소원 체계는 꽤 체계적이다. 담당 부서를 정확히 구분해서 청원하는 거다. 재신한테 건강을 빌거나 옥황상제한테 돈을 비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관할권을 존중하는 것이 빠른 처리의 비결이다.

정월 초열흘

초열흘은 민간에서는 돌의 생일이다. 맷돌, 절구 같은 석제 도구를 쉬게 하는 날이다. 돌한테도 생일이 있다니, 선조들의 세계관은 참 넓었다. 도구에도 쉬는 날을 준다는 건, 결국 그 도구를 쓰는 사람도 쉬라는 뜻이었을 거다. 조선시대 워라밸의 원형이다.

도교에서는 이 날 장생보명천존(長生保命天尊)이 하강하는 날로 본다. 이름 그대로, 생명을 길게 하고 목숨을 보전해주는 존재다. 그래서 이 날에는 연생보참(延生寶懺) 의식을 행하여 부모와 어른의 건강과 장수를 빌었다. 또한 태을구고천존(太乙救苦天尊)에게 병을 물리치고 재앙을 풀어달라 기도했다.

정월 보름간의 신격 중에서 이 날이 가장 직접적이다. 돈도 아니고 액운도 아니고, 그냥 살려달라는 거다. 오래 살고 싶다는 소원만큼 솔직한 것도 없다.

정월 열하루

열하루는 민간에서 사위를 대접하는 날이다. 초아흐레 잔치 음식이 남아있으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그 음식으로 사위를 불러 대접한다. 장인 입장에서는 남은 음식 처리와 사위 점수 관리를 동시에 해결하는 날이다. 사위 입장에서는 이틀 지난 음식을 먹으면서 감사합니다를 연발해야 하는 날이다. 누가 더 힘든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도교에서는 이 날 소재해액천존(消災解厄天尊)이 하강한다고 본다. 재앙을 없애고 액운을 풀어주는 존재다. 이 날에는 동악해원과(東嶽解怨科) 의식을 통해 전생과 금생에서 맺힌 원한을 풀어달라 빌었다. 살면서 의도치 않게 상처 준 존재들, 알게 모르게 쌓인 원한을 이 날 하늘에 올려보내는 거다. 사위 대접하면서 원한도 푸는 날이니, 시월드와 처월드 사이의 묵은 감정을 풀기에도 적절한 날이다.

정월 열이틀부터 대보름까지

열이틀부터는 대보름 준비가 시작된다. 등을 사고, 등 거는 틀을 만든다. 아이들 사이에서는 이런 노래가 불렸다. “열이틀 등틀 세우고, 열사흘 등 켜고, 열나흘 등 밝히고, 열닷새 보름달 보고, 열엿새 등 내린다.”

도교에서 정월 열사흘은 관성제군(關聖帝君)의 비승일(飛升日)이다. 관성제군은 관우(關羽)를 신격화한 존재로, 충의와 신의의 상징이다. 이 날에는 조상에게 명재(冥財)를 올리고, 조상의 가호를 빌며, 선대에서 미처 누리지 못한 복덕을 후손이 이어받기를 기원했다. 조상이 남긴 복을 상속받겠다는 발상이다. 부동산 상속은 세금이 붙지만, 복덕 상속은 세금이 없다. 다만 얼마가 남아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정월 대보름은 한 해의 첫 보름달이 뜨는 밤이다. 도교에서는 이 날을 상원절(上元節)이라 하여 천관대제(天官大帝)가 복을 내리는 날로 본다. 초하루부터 보름까지, 재신, 삼관대제, 남두성군, 옥황상제, 장생보명천존, 소재해액천존, 관성제군이 차례로 내려왔고, 마지막에 천관대제가 복을 내리며 마무리하는 구조다. 보름간의 천상 일정이 이렇게 짜여 있었다.

한국의 대보름 풍속은 다채롭다. 오곡밥을 지어 먹고, 부럼을 깨물며, 귀밝이술을 마신다. 부럼은 호두, 밤, 땅콩 같은 단단한 것을 이로 깨무는 건데, 한 해 동안 부스럼이 나지 않기를 바라는 뜻이다. 치과 입장에서는 1년 중 가장 걱정되는 날일 것이다. 귀밝이술은 아침에 찬 술 한 잔을 마시는 것으로, 한 해 동안 좋은 소식만 듣기를 바라는 풍속이다. 아침부터 술 마실 명분이 생기니, 이 풍속만큼은 절대 사라지면 안 된다고 생각한 어른들이 많았을 것이다.

달맞이도 빠질 수 없다. 높은 곳에 올라 먼저 보름달을 보는 사람이 그해 운이 좋다고 했다. 요즘은 아파트 옥상이 잠겨 있어서, 달맞이 경쟁이 원천 차단됐다. 쥐불놀이도 이 무렵의 풍속이다. 논두렁에 불을 놓아 해충 알을 태우는 실용적 행위인데, 아이들에게는 합법적으로 불장난할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다.

더위팔기라는 것도 있다. 대보름 아침, 아는 사람 이름을 불러서 대답하면 “내 더위 사가라!” 하고 외친다. 그러면 여름에 더위를 안 탄다고 했다. 대답한 사람은 더위를 떠안게 되니, 이 날 아침에는 누가 불러도 절대 대답을 안 했다. 조선시대 스팸전화 거부의 원형이다.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까지, 보름 동안 이어지는 이 풍속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민간에서는 쉬고, 비우고, 먹고, 다시 시작하는 리듬이 흐르고, 도교에서는 천상의 신격들이 하루하루 내려와 인간의 소원을 받아가는 질서가 흐른다. 돈이 필요하면 재신에게, 건강이 걱정되면 장생보명천존에게, 묵은 원한이 있으면 소재해액천존에게. 소원의 종류에 따라 담당 신이 달랐고, 신이 내려오는 날짜도 달랐다. 하늘도 분업을 한다.

요즘은 설 연휴가 길어야 닷새다. 보름은커녕, 사흘만 쉬어도 감사한 세상이다. 그래도 보름달은 올해도 뜬다.

설부터 대보름까지”에 대한 2개의 생각

  • 뭔가 설화나 신화 같기도 하고 흥미로운 이야기 감사합니다+_+
    이미지 생성하신 것 넘 귀여워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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