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sdom

고인지 빈곤이란 무엇인가 – 아는 것과 사는 것 사이의 간극

아는 것과 사는 것 사이에는 강이 흐른다. 많이 배운 사람이 반드시 잘 사는 것은 아니며, 머리가 좋다는 것이 곧 삶의 능력을 뜻하지도 않는다. 지식이 풍부한데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람을 요즘은 중국에서는 ‘고인지 빈곤(高認知貧困)’이라 부른다. 이 현상은 단순히 운이 나빠서가 아니라, 앎과 삶의 구조적 단절에서 비롯된다.

상하이에 서른 살 가까운 남자가 있었다. 50평방미터짜리 작은 집에 부모와 함께 살면서, 눈에 보이는 곳마다 책이 쌓여 있었다. 역사, 예술, 종교. 그런데 이 사람은 변변한 직장 하나 얻지 못했다. 이 사례가 중국 빌리빌리(Bilibili) 영상[중국판 유투브]에서 화제가 된 건, 이런 사람이 드물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였다. 머리로는 모든 걸 알지만, 몸으로는 아무것도 해본 적 없는 사람. 비즈니스 모델을 줄줄 읊으면서 정작 장사 한 번 못 해본 사람.

예전에 이런 부하가 있었다. 멋진 커피샵에서 무언가 그럴듯한 책을 읽는다. 말로는 모르는게 없다. 무언가 겁나 유식해 보인다. 그런데, 일을 시켜보면, 제때에 해내지 못하고, 알맹이가 없는 결과만 내놓고, 핑계는 많았다. 본인은 스스로를 워낙 높게 평가해서 내가 고과를 C를 준것을 이해 못하고, 나를 미워하고, 떠나버렸다.

도덕경(道德經)에 이런 구절이 있다.

爲學日益 爲道日損

배움은 날마다 더하는 것이고, 도를 닦는 것은 날마다 덜어내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건 ‘더하는 것’과 ‘덜어내는 것’이 서로 다른 방향이라는 점이다. 지식을 쌓는 일과 삶의 이치를 체득하는 일은 같은 길 위에 있지 않다. 오히려 반대 방향일 수 있다.

현대 심리학에서 이것을 ‘앎과 행함의 간극(Knowledge-Action Gap)’이라 부른다.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의 제프리 페퍼(Jeffrey Pfeffer)와 로버트 서튼(Robert Sutton)은 이 현상을 연구하면서 흥미로운 결론에 도달했다. 조직이든 개인이든,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말이 행동을 대체하는 구조’ 때문이라는 것이다. 회의에서 뛰어난 분석을 하고, 보고서에서 멋진 전략을 쓰는 것만으로 이미 무언가를 해낸 것 같은 착각이 생긴다. 뇌가 분비하는 보상 물질이 실제 행동과 언어적 분석을 거의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도교에서 말하는 지식의 ‘비만’이다. 기(氣)가 순환하지 못하고 한곳에 정체되면 몸이 병드는 것처럼, 인식이 행동으로 흐르지 못하면 앎 자체가 독이 된다. 장자(莊子)의 포정해우(庖丁解牛) 이야기가 이 맥락에서 다시 읽힌다. 소를 칼로 가르는 백정 포정은 19년 동안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는데, 칼날이 새것과 같았다. 그가 소의 해부학을 책으로 배웠기 때문이 아니다. 수천 번 손에 피를 묻히면서 뼈와 힘줄 사이의 결을 몸으로 익혔기 때문이다. 장자는 이것을 도(道)에 가까운 경지라 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포정이 처음부터 잘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처음 3년은 소가 통째로 보였고, 그 다음에야 결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배움이 몸에 스며드는 데는 시간과 반복이 필요했다. 제임스 다이슨(James Dyson)이 세계 최초의 먼지봉투 없는 진공청소기를 만들기까지 5,127개의 시제품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현대판 포정해우다. 다이슨 본인의 말에 따르면 2,627번째 시제품쯤에서 아내와 함께 동전을 세고 있었고, 3,727번째쯤에서 아내가 미술 과외를 시작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분석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오히려 멈추기 쉽다. 모든 위험을 계산해내고, 모든 실패 가능성을 미리 본다. 그래서 첫 발을 떼지 못한다. 이것을 ‘분석 마비(Analysis Paralysis)’라 부른다. 반대로 분석력이 부족한 사람은 어설프게 시작하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과정에서 분석으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감각을 얻는다.

나심 탈레브(Nassim Taleb)는 이것을 ‘피부를 걸어라(Skin in the Game)’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자기 돈을 걸지 않는 경제 분석가는 아무리 정교한 예측을 해도 그 예측에 자신의 생존이 걸려 있지 않다. 예측이 틀려도 출연료를 받고 퇴장한다. 반면 자기 돈으로 시장에 뛰어든 사람은 분석의 수준과 관계없이 전혀 다른 차원의 인지를 갖게 된다. 생존이 걸린 인식과 구경꾼의 인식은 같은 말을 쓰더라도 완전히 다른 것이다.

도교에서는 이것을 수행(修行)이라 했다. 수(修)는 닦는다는 뜻이고, 행(行)은 걷는다는 뜻이다. 앉아서 읽는 게 아니라 몸을 움직여 길을 걷는 것이다. 음부경(陰符經)에 이런 말이 있다.

觀天之道 執天之行

하늘의 도를 관찰하고, 하늘의 운행을 손에 쥐어라. 보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직접 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관(觀)에서 집(執)으로의 전환. 이것이 고인지 빈곤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경로일 수 있다.

디자인 교육에서 유명한 실험이 하나 있다. 도예 수업에서 한 그룹은 ‘수량’으로 평가하고, 다른 그룹은 ‘품질’로 평가했다. 학기가 끝났을 때, 가장 완성도 높은 도자기를 만든 사람은 수량 그룹에서 나왔다. 품질 그룹은 머릿속에서 완벽한 도자기를 구상하느라 손을 덜 움직였고, 수량 그룹은 수백 번 실패하면서 흙의 성질을 몸으로 익혔다. 이 실험은 데이비드 베일스(David Bayles)와 테드 올랜드(Ted Orland)의 저서 ‘Art & Fear’에 수록된 것으로, 창작 교육의 고전적 사례로 인용된다.

링크드인(LinkedIn) 창업자 리드 호프먼(Reid Hoffman)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첫 번째 제품이 부끄럽지 않다면, 너무 늦게 출시한 것이라고. 완벽을 기다리는 사람은 결국 아무것도 내놓지 못한다. 60점짜리 결과물을 시장에 던지고, 시장의 반응이라는 현실에 맞아보는 것. 그 과정에서 생기는 앎은 서재에서 10년을 보내도 얻지 못하는 종류의 것이다.

노자는 천하의 어려운 일이 반드시 쉬운 것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天下難事 必作於易

가장 작고 쉬운 것에서 시작하라는 말이다. 글 한 편을 쓰고, 물건 하나를 팔고, 사람 한 명을 만나는 것. 거기서부터 앎이 살로 바뀌기 시작한다.

진흙에서 자라난 인식은 지혜가 되고, 종이 위에 머무른 인식은 그저 이야깃거리가 된다. 하드디스크에 데이터를 가득 채운 것과 프로그램을 구동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이 세상에 똑똑한 사람은 넘쳐난다. 커피숍에 앉아 대기업의 전략을 쪼개고, SNS에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논한다. 그러나 손에 굳은살이 박히고, 몸에 상처가 남은 사람의 앎은 그것과 다른 무게를 갖는다.

인식이 명사인 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이 동사가 되는 순간, 그러니까 머릿속 지도가 발밑의 길로 바뀌는 순간부터 무언가가 달라지기 시작하는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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