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넘으면 가족이랑 업력 줄다리기 좀 그만하자

살다 보면 깨닫는 게 있다. 내가 이 집에 태어난 것도, 이 부모를 만난 것도, 어릴 때 겪은 그 고생도 — 전부 내가 선택한 게 아니라는 거. 도교에서는 이걸 업력이라 한다. 전생에서 이어져 온,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인과의 사슬.
근데 문제는 이걸 40 넘어서도 계속 붙들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거다.
“엄마가 그때 나한테 그러지만 않았어도.” “아버지가 좀 다른 사람이었으면.” “형이 맨날 사고만 치니까 내가 수습하는 거지.”
이런 이야기를 20대에 하면 성장통이다. 30대에 하면 아직 정리가 덜 된 거다. 근데 40이 넘어서도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다면, 그건 내 인생을 남의 업력에 묶어둔 거다.
도덕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지족자부(知足者富), 강행자유지(強行者有志).” 만족할 줄 아는 자가 부유하고, 힘써 행하는 자가 뜻이 있다. 여기서 핵심은 ‘행’이다. 남의 인과를 끌어안고 주저앉아 있는 게 아니라, 내 발로 걸어가는 것. 그게 뜻이 있는 삶이다.
실제로 상담을 하다 보면 이런 경우를 자주 본다. 50대 중반의 한 분이 평생 어머니의 빚을 갚아왔다. 어머니가 보증을 서고, 사업을 말아먹고, 또 빌리고. 그분은 자기 인생이 없었다. 번 돈은 전부 어머니 뒷수습에 들어갔고, 본인의 결혼도 사업도 전부 뒤로 밀렸다. “효도잖아요”라고 하시는데, 얼굴에는 효도하는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원망과 피로가 가득했다.
이게 바로 공업(共業)이다. 남의 업력을 내 것처럼 짊어지는 것. 효도와 공업은 다르다. 효도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거고, 공업은 끌려가는 거다.
부모에게는 부모의 인과가 있고, 자식에게는 자식의 명이 있다. 내가 아무리 대신 아파해줘도, 그 사람의 업력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나까지 같이 가라앉을 뿐이다.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상선약수(上善若水)는 노자 말이고, 장자는 좀 더 직설적이다. ‘물고기는 물에서 살아야 하고, 사람은 도에서 살아야 한다. 물고기를 물에서 꺼내 서로 침을 발라주는 것보다, 각자 강과 호수에서 자유롭게 사는 게 낫다.'” 장자 대종사편의 “상여이막상어강호(相濡以沫 不如相忘於江湖)”가 바로 이 이야기다.
서로 침 발라가며 겨우 살아남는 것보다, 각자의 강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게 진짜 사랑이라는 거다.
40이 넘으면 이 정도는 알아야 한다. 도움을 줄 수는 있다. 하지만 대신 짊어지는 건 안 된다. 사랑을 끊으라는 게 아니다. 업력의 줄다리기를 놓으라는 거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평생 끌려다니다가, 정작 자기 산은 한 번도 못 올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산도 못 보고, 물도 못 보고, 중생도 못 만나고, 결국 자기 자신도 못 만난다.
이 세상에 한 번 온 거, 남의 인과를 대신 살다 가기엔 좀 아깝지 않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