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sdom

손절의 기술, 혹은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누구나 실수한다. 머리가 아무리 좋아도, 경험이 아무리 많아도, 잘못된 길에 들어서는 건 피할 수 없다. 투자를 잘못 잡고, 사람을 잘못 만나고, 일을 잘못 시작한다. 그건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있다는 증거에 가깝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같은 실수를 해도 어떤 사람은 금방 털고 일어나고, 어떤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영영 못 일어난다는 것이다. 25년 넘게 투자판에 있으면서, 또 역학을 공부하면서 수많은 사람의 인생 흐름을 들여다봤는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격차를 만드는 건 실수의 빈도가 아니었다. 빠져나오는 속도였다.

도덕경 76장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으면 굳고 뻣뻣해진다. 초목이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여리지만, 죽으면 마르고 꺾인다. 그러므로 굳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이다.” 노자가 2,500년 전에 이미 말한 것이다. 유연한 것이 살아남고, 뻣뻣한 것이 부러진다. 잘못된 길에 들어섰을 때 몸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이 살아남고,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돌아가”라며 버티는 사람이 꺾인다. 이건 처세술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다.

우리는 대부분 ‘버리지 못하는’ 쪽에 속한다. 이미 쏟아부은 것이 아까워서 계속 매달린다. 경제학에서는 이걸 매몰비용(Sunk Cost)이라 부르고, 대니얼 카너먼은 “사람이 손실에서 느끼는 고통은 같은 크기의 이득에서 느끼는 기쁨의 2.5배”라고 했다. 100만 원을 잃은 고통을 지우려면 250만 원을 벌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영화가 별로인 걸 30분 만에 알면서도 끝까지 앉아 있고, 관계가 끝난 걸 진작 알면서도 헤어지지 못하고, 시장이 뒤집어진 걸 알면서도 포지션을 안 정리한다. 아깝기 때문이다. 이미 쓴 시간이, 이미 쓴 돈이, 이미 바꿔버린 내 모습이 아깝기 때문이다.

이 현상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콩코드 여객기다. 1962년, 영국과 프랑스는 꿈의 초음속 여객기를 함께 만들기로 합의했다. 처음 예상한 개발비는 7천만 파운드 수준이었다. 그런데 개발이 진행될수록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최종적으로 투입된 돈은 당시 화폐 기준으로 15억에서 21억 파운드, 2023년 기준으로 환산하면 110억에서 160억 파운드에 달했다. 연료 소모가 심했고, 소음 때문에 육지 위를 날 수도 없었으며, 처음 주문을 넣었던 항공사들은 하나둘 빠져나갔다. 결국 에어프랑스와 영국항공만 남았고, 그마저도 정부 압력 때문에 운항한 것이지 자발적 선택이 아니었다. 양국 정부는 이미 너무 많이 쏟아부었기에 멈출 수 없었고, 멈추지 못했기에 더 많이 잃었다.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이 사례를 ‘콩코드 오류(Concorde Fallacy)’라는 이름으로 가르친다. 이미 들어간 비용에 발목이 잡혀 앞으로의 손실을 키우는 전형적인 사례로.

도교에서는 이런 상태를 집착이라 부른다. 장자 소요유편에서 붕새는 9만 리를 올라가는데, 매미와 비둘기는 나뭇가지 사이를 오가면서 “저게 뭐가 대단하냐”고 비웃는다. 매미와 비둘기가 높이 날지 못하는 건 날개가 작아서가 아니다. 자기가 서 있는 나뭇가지를 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콩코드 프로젝트를 끌고 간 양국 정부도, 주식 시장에서 물타기를 반복하는 투자자도, 끝난 관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도 본질은 같다. 나뭇가지를 놓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반대편에 서 있는 사례도 있다. 1985년, 인텔은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일본 업체들이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장악하면서 인텔은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있었고, 회사의 수익은 1984년 1억 9,800만 달러에서 1985년 200만 달러 수준으로 곤두박질쳤다. 당시 인텔의 사장이었던 앤디 그로브는 회장 고든 무어에게 이렇게 물었다. “만약 우리가 쫓겨나고 이사회가 새 CEO를 데려온다면, 그 사람은 뭘 하겠습니까?” 무어는 망설이지 않았다. “메모리 사업을 접고 마이크로프로세서에 올인하겠지.” 그로브가 말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그 문을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서, 새 CEO처럼 그 결정을 직접 내리지 못합니까?” 인텔은 창업 이래 자신들의 정체성 그 자체였던 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접었다. 7,000명이 넘는 직원을 해고했고, 1억 8천만 달러를 들여 회사 전체를 재편했다. 이사회의 한 멤버는 나중에 이 결정을 두고 “이사로서 내린 가장 슬픈 결정”이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이 고통스러운 결단 이후 인텔은 마이크로프로세서 시대의 절대 강자가 되었고, 그 뒤 30년간 전례 없는 성공을 거뒀다.

그로브가 한 일을 역학적으로 보면, 이건 정확히 ‘국면 전환’이다. 명리학에서 대운이 바뀌면 사주의 용신도 바뀐다. 과거에 나를 살렸던 기운이 지금은 나를 해치는 기운이 될 수 있다. 메모리 반도체는 인텔을 만든 기운이었지만, 1985년 시점에서 그것은 이미 인텔을 죽이는 기운으로 변해 있었다. 그로브는 그걸 읽었다. 과거의 용신에 매달리지 않고, 새로운 국면의 용신을 찾아 갈아탔다. 같은 상황, 정반대 선택. 콩코드는 과거에 매달렸고, 인텔은 과거를 잘라냈다. 차이는 단 하나다. 이미 들어간 것을 제로로 놓을 수 있느냐, 없느냐.

이걸 ‘제로 베이스 사고(Zero-Base Thinking)’라 부른다. 과거에 내가 얼마를 투자했든, 얼마나 공을 들였든, 지금 이 순간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이 선택을 하겠는가. 하겠다면 계속하고, 안 하겠다면 즉시 접어야 한다. 단순하다. 그런데 이 단순한 걸 실행하는 사람은 놀라울 정도로 적다.

왜 그런가. 심리학에서는 이걸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로 설명한다. 현실이 내 판단과 어긋날 때, 사람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대신 자기 판단을 합리화하는 쪽을 택한다. “아직 기회가 있어”, “조금만 더 버티면 돌아올 거야”, “이 정도 손해는 감내할 수 있어”라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주식 시장에서 큰돈을 날리는 사람들 대부분이 나쁜 종목을 산 것 때문이 아니라, 잘못 산 걸 인정하지 않고 물타기를 반복한 것 때문이라는 건 이 바닥에 오래 있어본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다.

도덕경 9장은 이렇게 말한다. “잡고 있으면서 가득 채우려 하는 것은, 차라리 그만두는 것만 못하다. 벼려서 날카롭게 만든 것은 오래 보전할 수 없다. 금옥이 집에 가득하면 능히 지킬 수 없다. 부귀하면서 교만하면 스스로 허물을 남긴다. 공이 이루어지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이다.” 공성신퇴(功成身退). 공을 이루면 물러나라는 것이 아니라, 한 국면이 끝나면 집착 없이 다음으로 넘어가라는 뜻이다. 이것이 물의 도리이기도 하다. 물은 막히면 돌아가고, 낮은 곳이 있으면 흘러간다. 막힌 곳에서 억지로 뚫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물은 어디든 도달한다.

조지 소로스는 이런 말을 했다. “맞느냐 틀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맞았을 때 얼마를 벌고 틀렸을 때 얼마를 잃느냐가 중요하다.” 소로스가 전설이 된 건 항상 맞아서가 아니다. 틀렸을 때 빠르게 인정하고, 감정 없이 손절하고, 다음 기회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고백하기도 했다. “나는 틀린다는 걸 빨리 인정할 수 있기 때문에 부자가 된 것이다.” 체면은 돈이 안 된다. 논리만 돈이 된다.

투자 이야기만은 아니다. 맞지 않는 직장에서 “5년이나 다녔는데 지금 나가면 경력이 아깝지 않나”라며 버티는 사람들이 있다. 끝난 관계에서 “내가 이만큼 바꿨는데, 내가 이만큼 참았는데”라며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다. 다만 냉정하게 말하면, 그건 상대가 아까운 게 아니라 ‘대가를 치른 자기 자신’이 아까운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마음이, 앞으로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만든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싼 비용은 돈이 아니다. 기회비용(Opportunity Cost)이다. 잘못된 곳에서 1분을 더 쓰면, 제대로 된 곳에서 1분을 잃는다. 잘못된 결정을 되살리려고 쓰는 에너지는, 새로운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데 쓸 수 있었던 에너지다.

그래서 삶에도 투자에서처럼 손절선이 필요하다. 투자에서는 일정 비율 이상 하락하면 조건 없이 빠지는 규칙을 세운다. 삶도 마찬가지다. “이 일은 석 달만 더 해보고 변화가 없으면 떠난다”, “이 관계는 두 번만 더 대화를 시도하고 통하지 않으면 정리한다”처럼, 스스로에게 기한과 조건을 걸어두는 것이다. 그래야 감정에 끌려다니지 않는다.

한 가지 더. ‘나’와 ‘나의 결정’을 분리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내 결정이 틀렸다고 내가 틀린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앤디 그로브처럼, 자기 자신을 해고하고 새 사람처럼 다시 들어와서 판단하는 연습. 장자가 말한 ‘심재(心齋)’, 마음을 비우는 것. 과거의 감정을 전부 지우고, 오직 지금 눈앞의 상황만으로 결정하는 연습. 쉽지 않다. 그러나 이것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국 인생의 격차를 만든다.

삶은 끝없이 이어지는 게임이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아무리 99번을 잘못 걸었더라도 100번째에 방향을 바꿀 수 있다면, 그건 여전히 늦지 않은 것이다. 다만 심연이 보이는데도, 그 안에 빠뜨린 신발 한 짝이 아까워서 자기까지 뛰어드는 사람이 되지는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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