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sdom

한중 관계

최일선에서 중국과 한국 사이의 교량 역할을 했었기에, 환영받는 외국 투자자에서, 천대받는 한국인으로 전락해봤기에 (특히 사드 시절, 어딜 가든, 죄인 취급 받고, 욕 먹고 말이지, 그러면서 중국에 대한 오만 정이 다 떨어짐)

1992년 수교 이후 30년 넘게 무역흑자를 기록하던 한국이 2023년 처음으로 중국과의 교역에서 180억 달러 적자를 냈다. 2024년에도 이 기조는 이어졌다. 단순한 경기 변동이 아니다. 양국 경제관계의 구조가 바뀌고 있다는 신호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중국은 한국 기업들의 저렴한 생산기지였다. 삼성과 현대는 중국에서 조립하고 세계로 내보냈다. 2010년대 들어 한국은 반도체, 디스플레이, 화학제품 같은 중간재를 공급하고, 화장품과 드라마 같은 소비재를 수출하는 위치로 올라섰다. 2021년 한국 화장품의 대중 수출은 41억 달러를 찍었고, 전체 화장품 수출의 54%가 중국으로 갔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2024년 대중 화장품 수출은 25억 달러로 줄었고, 비중도 25%까지 떨어졌다. 중국 현지 브랜드들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가성비를 앞세운 중국산 화장품이 자국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나 일본 화장품도 같은 처지다. 한국만 밀린 게 아니라, 수입 화장품 전체가 밀리고 있다. 다행히 한국 화장품은 미국과 일본에서 빠르게 성장하면서 전체 수출액은 오히려 늘어 2024년 102억 달러를 기록했다. 미국 수입 화장품 시장에서 한국은 22%를 차지하며 프랑스를 제쳤다.

문화 콘텐츠는 더 복잡하다. 2016년 사드 배치 이후 중국이 한한령(限韓令)을 내렸다. 공식 명령은 아니었지만, 한국 드라마와 음악이 중국 플랫폼에서 사라졌다. TV 콘텐츠 대중 수출액은 2016년 6,460만 달러에서 2017년 1,690만 달러로 추락했다. 그 뒤로 회복되지 않았다. 한국 콘텐츠 업계는 넷플릭스와 동남아로 눈을 돌렸고, 결과적으로 수출 다변화에 성공했다. K-콘텐츠 전체 수출은 2023년 133억 달러를 넘겼다.

문제는 중국 시장 자체가 변했다는 점이다. 한한령 기간 동안 중국은 자국 콘텐츠 산업에 투자했다. 2025년 현재 중국 콘텐츠 시장 규모는 약 2,570조 원에 달한다. 짧은 형식의 미니드라마가 유행하고, 자국 아이돌과 드라마가 소비자들의 취향을 채우고 있다. 한한령이 풀려도 과거처럼 한국 콘텐츠가 중국 시장을 휩쓸기는 어렵다는 전망이 나온다.

산업 경쟁력 격차도 줄어들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2024년 10월 국내 제조기업 370곳을 조사한 결과, 한국이 중국보다 기술적으로 앞선다고 답한 비율은 32%에 그쳤다. 2010년 같은 조사에서는 90%가 한국의 기술 우위를 인정했다. 15년 만에 인식이 뒤집힌 것이다. 전경련 조사에서도 철강, 기계, 배터리, 디스플레이, 자동차 분야에서 중국이 한국을 이미 앞서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반도체와 조선만 한국이 앞서 있는데, 2030년이면 그마저도 뒤집힐 수 있다는 전망이 있다.

중국의 반도체 자급화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SMIC의 글로벌 파운드리 점유율은 5%에 도달했고, YMTC는 낸드 메모리에서 SK하이닉스와 삼성을 추격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2030년까지 수입 반도체를 완전히 대체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물론 첨단 공정에서는 여전히 격차가 있다. 하지만 성숙 공정 시장에서 중국산 칩이 가격 경쟁력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양국이 주고받을 것이 줄어들고 있다. 과거에는 한국이 부품과 기술을, 중국이 시장과 노동력을 제공하는 상호보완 관계였다. 지금은 같은 시장에서 같은 제품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로 바뀌고 있다. 수출 품목의 유사성 지수가 올라가고 있다는 연구 결과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여기에 미중 패권 경쟁이 얹혀 있다. 미국은 반도체, 배터리, AI 분야에서 중국을 압박하고 있고, 한국 기업들에게도 중국 공급망에서 벗어나라는 압력을 넣고 있다.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칩스법(CHIPS Act)은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투자하도록 유도했다. 삼성과 현대, SK는 미국에 수백억 달러를 투자하고 있다. 동시에 중국은 희토류와 그래파이트 수출을 통제하며 한국 배터리 산업을 압박하고 있다. 한국이 수입하는 합성·천연 그래파이트의 94%가 중국산이다.

한국 정부는 2023년 ‘3050 전략’을 발표했다. 2030년까지 중국 의존도를 50% 이하로 낮추겠다는 계획이다. 공급망 다변화를 추진하면서 동남아, 인도, 미국으로 투자를 분산하고 있다. 실제로 2023년 12월에는 한국의 월간 대미 수출액이 대중 수출액을 20년 만에 처음으로 앞질렀다.

그렇다고 중국을 완전히 등질 수는 없다. 중국은 여전히 한국 최대 교역국이다. 2024년 1월부터 11월까지 양국 교역액은 2,989억 달러에 달했다. 지리적으로도 이사 갈 수 없는 이웃이다. 한반도 평화를 논의하려면 중국의 역할이 필요하다. 북핵 문제, 종전 선언, 동북아 안보 모두 중국 없이는 풀기 어렵다.

2025년 경주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시진핑 주석이 11년 만에 방한했다. 양국은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재확인하고, FTA 2단계 협상과 AI, 바이오, 친환경 분야 협력을 논의했다. 한한령 완화 움직임도 보인다. 중국 광전총국은 해외 드라마 방영 심의를 완화하는 조치를 내놓았다.

하지만 구조적 문제들은 여전하다. 대만 문제, 서해 구조물 갈등, 반도체 공급망, 북중러 협력 강화. 단기간에 해결될 성격이 아니다. 미중 경쟁이 격화될수록 한국의 선택지는 좁아진다.

현실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미국과의 안보 동맹을 유지하면서도 중국과의 경제 협력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다. 문제는 양쪽 모두가 한국에게 줄 서라고 요구한다는 점이다. 미국은 첨단 기술 분야에서 중국 배제를 요구하고, 중국은 한미일 협력 강화에 반발한다.

타격을 최소화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경쟁이 심한 분야에서는 기술 격차를 유지하거나 넓히는 데 집중하고, 협력이 가능한 분야에서는 공동 이익을 찾는 투트랙이 필요하다. 반도체 첨단 공정, 바이오, AI 같은 분야는 미국과 손잡고, 관광, 문화 교류, 환경 협력은 중국과 이어가는 식이다. 제3국 공동 진출도 대안이다. 동남아나 중앙아시아에서 한중 기업이 함께 프로젝트를 수행하면 직접 충돌을 피하면서 협력의 여지를 남길 수 있다라고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헛소리 하지만,

기술 격차를 유지하거나 넓힌다는 건 희망 사항에 가깝다. 중국은 매년 이공계 졸업생을 350만에서 400만 명씩 배출한다. 한국은 14만 명 수준이다. 연구개발 투자도 중국이 연간 705조 원을 쓰는데, 이건 한국 1년 국가 예산보다 많다. 반도체 첨단 공정에서 아직 격차가 있지만, 성숙 공정은 이미 중국이 가격으로 밀어붙이고 있고, 시간이 지나면 첨단 공정도 따라잡을 가능성이 높다. 인재 규모와 자본 투입량에서 압도적 차이가 나는데 기술 우위를 계속 유지한다는 건 현실적이지 않다.

협력 가능한 분야라고 꼽은 것들도 다시 보면 허약하다. 관광은 중국이 무기로 쓴다. 사드 때도 그랬고, 최근 일본과 갈등에서도 중국은 자국민 일본 여행 자제령을 내렸다. 언제든 끊을 수 있는 카드다. 문화 교류라고 해봤자 한한령 8년 동안 한국 콘텐츠 업계가 배운 건 중국 시장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환경 협력은 실익이 얼마나 되나. 미세먼지 공동 대응 같은 의제가 있지만, 양국 관계의 핵심 축이 되기엔 너무 가볍다. 서로에게 절실하지 않은 분야에서 협력한다고 해서 관계가 단단해지지 않는다.

제3국 공동 진출도 마찬가지다. 동남아나 중앙아시아에서 한중 기업이 같이 프로젝트를 한다고 해도, 경쟁 품목이 겹치는 상황에서 협력보다 충돌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인프라 사업에서 중국 기업이 가격으로 밀어붙이면 한국 기업이 버틸 수 있나. 이미 여러 나라에서 중국 기업에 밀려난 사례들이 있다.

그러면 뭐가 남나.

냉정하게 보면 한국이 쓸 수 있는 카드가 많지 않다. 중국과 주고받을 것이 줄어드는 건 막을 수 없는 흐름이다. 과거처럼 한국이 기술을 주고 중국이 시장을 주는 구조는 끝났다. 중국은 기술도 있고 시장도 있다. 한국이 제공할 수 있는 게 뭔지 질문해야 한다.

미중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도 피하기 어렵다. 미국은 반도체, 배터리, AI 공급망에서 중국 배제를 밀어붙이고 있고, 한국 기업들은 이미 미국에 수백억 달러를 투자했다. 중국이 희토류와 그래파이트로 보복하면 한국 배터리 산업이 타격받는다. 양쪽 다 비위 맞추면서 실익 챙기는 건 점점 어려워진다.

결국 한국이 직면한 현실은 이렇다. 경쟁에서 이기기 어렵고, 협력할 분야도 마땅찮고, 중립도 허락되지 않는다.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타격을 분산하는 것 정도다. 중국 의존도를 낮추면서 미국, 유럽, 동남아, 인도로 시장을 넓히는 작업. 이미 화장품 수출이 그렇게 가고 있고, 콘텐츠 산업도 그렇게 갔다. 중국 시장을 포기한다기보다 중국이 빠져도 버틸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한중 관계가 과거처럼 돌아가기 어렵다는 걸 인정하고, 그 전제 위에서 손해를 줄이는 쪽으로 가는 게 현실적인 방향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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